김대령 목사의 시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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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해방구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는가?

  5.18 광주 사태에 대한 좌익 사관의 모순은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정복하여 해방구 사령부의 진지와 무기고로 삼은 폭도들의 행위를 정부는 방치해야 했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그들은 무기 반납을 끝까지 거부한 해방구 병력을 정부군이 무력으로 해산시킨 것은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도지사를 축출하고 주야로 도청에 상주했던 폭도들(혹은 해방구 병력) 중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들도 있었다는 발표도 있다. 그들이 광주 해방구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광주가 대한민국 영토가 아니라 공산당 자치구임을 표명하는 것이 해방인가? "해방"이란 단어의 의미가 아무리 좋든 "해방구"는 동북아 근대사에서 해방구는 민주주의 국가 내에 자리잡은 공산주의 사회의 뜻으로 사용되는 어휘이다.

  1980년 5월 21일 일부 폭도들을 포함한 무장 시위대가 도청을 정복한 후에 시위대는 무기를 반납하고 사태 수습을 원하는 원하는 온건파와 무력 투쟁을 선동하는 과격파로 나뉘었다. 그때 과격파가 선언한 해방구의 기원은 1940년 대 중반의 중국 해방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은 큰 나라이다. 그러나 중국 영토 내에 공산주의 해방구가 설립된지 불과 몇년 만에 쟝개석 총통의 민주주의 정권은 해방구에서 전국으로 독버섯처럼 퍼져나간 공산당 군대에 패망한채 대만으로 쫓겨가 피난 정부를 세워야 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에 해방구 사령부와 선량한 광주 시민을 구별하여 불과 세시간 만에 해방구를 해산시키고 도청을 광주 시민에게 되찾아준 이희성 장군의 진압 작전을 실로 명작전이었다. 그러나, 중국판 광주 해방구를 장개석 총통의 중국 정부군은 진압하는데 번번히 실패하였다.

  1947년 3월 병력을 이동하여 해방구의 동서 양 날개인 섬북(陝北)과 산동 지역에 대하여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7월에 해방군이 전략적 공격으로 돌입하자 장개석은 1948년 1월과 8월에 부분적 방어와 중점적 방어의 전략 방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9월부터 국민당 주력군은 요심(遼沈)전투, 회하(淮河)전투, 평진(平津)전투에서 해방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장개석은 결국 1949년 1월 사임을 선언하였지만 막후에서는 여전히 지휘를 계속하면서 국공 쌍방 대표회담에서 제정한 <국내평화협정(國內和平協定)>의 수용을 거절하였다. 해방군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계속 진군하여 대륙에서의 국민당 통치를 무너뜨렸으며, 장개석은 12월에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공산당 군대와 시민군의 구별이, 그리고 폭도와 시민의 구별이 어려운 해방구 진압 작전은 이렇듯 어려운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에는 한국 최초의 해방구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즉, 여순반란사건이 종결된 직후부터 1948년 12월 빨치산 부대가 율어지역을 해방구로 장악하는 때까지의 과정이 그려져있다. 이 벌교에서 좌익과 우익의 충돌을 빚는 중에 생긴 첫 해방구는 해방 정국의 이념적 갈등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좌익이 모인 정치적 자치 지역이 이 해방구였다. 그리고 광주 해방구는 이런 좌익들의 끈질긴 노력의 한 연장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만일 5.18 광주 사태가 순수한 민주화 운동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빨치산이 1948년과 1950년에 만든 해방구의 명칭을 사용하였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이 남한에 설립된 해방구를 이용하여 대남 적화를 시도한 적이 두번 있었다. 그 첫번째는 1949년 중국 해방구의 공산당 군대가 혁명에 성공한 것을 본 이듬해인 1950년이었으며, 그 두번째는 1975년 3월 월맹 호지명이 같은 방법으로 월남 중부 지방에 해방구를 만들어 월남을 패망시킨 것을 본 후 5년이 지난 1980년 5월이었다. 그러나 첫번째는 맥아더 장군의 9.15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두번째는 이희성 장군의 5.27 도청진압작전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러면, 남한에 설립된 첫번째 해방구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자. 4.3항쟁과 여순반란 사건의 초기 진압으로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기에 6.25 동란 발발 직전에 남한의 빨치산은 지리산 이현상 부대(100여명)을 포함해 모두 460명이었다. 그 수가 그해 10월에는 만 명이 넘게 불어나는데, 그것은 인민군 패잔병들이 빨치산에 편입되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 6월 25일에 남침한 김일성은 그 다음날인 6월 26일에 평양방송을 통해 "남반부 빨치산들은 해방구를 확대 창설해 적의 배후를 공격, 소탕하라"고 촉구하였다.

  흔히, 5.18 광주 사태는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점화하여 혁명 노동자 윤상원이 매듭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관현에게 무장 폭동의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광주 시민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폭동을 선동한 윤상원의 이름과 제929 빨치산 부대 부대장 윤상철의 이름이 같은 돌림자라는 사실이 아마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주목을 끈다.

  빨치산은 한국 전쟁 때 아군을 한층 더 불리하게 한 존재였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 때도 민간인과 식별이 안되는 공산당 유격대가 작전을 어렵게 했으며, 또 실제로 실수가 전혀 없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동족인 월남 사람들도 1975년 3월 중순 월남 중부에서 광주 사태와 유사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틈에 섞인 월맹군과 시민군을 식별해낼 수 없어서 결국 4월 15일 수도 사이공이 공산당 군대에 함락되고 패망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혈맹 터키군도 첫 전투에서 국군을 괴뢰군과 혼동하여 국군 일개 부대를 전멸시킨 사례가 있다. 같은 한국인끼리도 광주 사태 때 폭도들이 섞인 시민군이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계엄군이 시민군과 계엄군을 식별하지 못하는 실수가 있었다. 이것이 한국에 파병되자마자 빨치산에 많은 괴롭힘을 당했던 미군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때 빨치산과 양민 식별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단정짓기 어려운 이유이다.

  빨치산이 미군을 괴롭혔던 사례 중 하나는 1950년 8월25일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가 경남 거창의 미군사령부를 습격하여 100 여명의 인명 피해를 낸 일이었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빨치산의 게릴라 전술은 미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주월미군이 1973년에 월남에서 철수한 것도 월맹 게릴라와 월남 민간인 식별이 너무 어려웠던 까닭이다. 사실, 8월 25일이면 실제로 이미 낙동강 전투에서 십만 명의 병력을 잃은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령을 내렸던 그 시점이다. 그때 맥아더 장군이 모든 반대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9.15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이미 그해 여름에 세계 지도에서 영영 사라진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5.18 광주사태 때 만들어진 해방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상기하여야 역사적 사실이 있다. 빨치산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활동한 주 무대가 호남지역이었다. 정부 공식 기록은 빨치산이 소탕된 시점을 1956년 7월13일로 잡는다. 그러나 1950년대 해방구를 확대 창설하던 빨치산의 뿌리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만일 우리가 식물의 뿌리처럼 사상의 뿌리도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5.18 광주 사태 때 광주시민들도 조심알 점이 최소한 한가지는 있었다. 윤상원 일당이 사흘에 걸쳐 광주 교도소를 습격하여 삼천 명의 죄수들을 총기 무장시키려 했을 때 그것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마냥 손뼉쳐 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950년과 1980년에 만들어진 해방구가 또 한번 만들어진 때는 1992년 전대협 마지막 출범식이 있던 날이었다. 이날 좌익 학생들은 한양대에서 서울을 해방구로 만들었으며, 빨갱이들이 이렇게 서울에 해방구를 만든 날이 한총련 시작의 날이기도 하다. 중국 해방구와 월남 해방구가 자유 민주주의 정부를 전복시킨 사례들을 상기한다면 1980년 5월 27일 새벽의 도청 진압 작전은 반드시 성공하여야 할 작전들이었다. 그 시가전에서 군경과 시민군 양편에 희생자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광주 사태가 며칠만 더 장기화되면 북한에서 당장 남침하려 하던 때에 어떻게 그 진압을 미룰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도청에 상주해 있던 해방구 병력 중 일부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다. 또,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임을 부정하고 해방구 사령부 병력임을 자처한 이들을 순수한 시민군으로 보는 것도 무리이다. 그것은 동북아 근대사에서 "해방구"라는 어휘는 공산당 자치 정부의 뜻으로 사용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해방구 사령부 소속으로서 군복을 입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순수한 시민군으로 보는 것도 논리적 무리가 있다. 당시 윤상원 일당이 광주에 퍼뜨린 그 수많은 유언비어들 중에서 하나라도 사실인 것이 있던가? 그럴진대, 무엇때문에 그들이 도청을 정복하고 도지사를 축출하고 도청 사무실을 해방구 병력 무기고로 사용한 일을 민주 항쟁이라고 두둔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이미 과거지사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순수한 민주화 운동과 폭동을 구분할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명확한 기준을 가지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안정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1975년 민중봉기 때 월남 군인들이 무기를 버리고 탈영하였기에 패망하였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무장 폭도들의 도청 점거가 민주화 운동인지 폭동인지를 명확히 가리는 잣대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광주 도청에 설치된 기관총 광주 도청에 설치된 기관총.
(사진 좌)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정복하고 도지사를 축출하고 주야로 도청을 점거하던 그들은 시민군, 폭도, 해방구 병력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들이 국군 장병들에게 사격할 때 사용했던 기관총은 몇가지 의문을 남긴다. 제 아무리 민주화 운동이란 간판을 붙인다 해도 무장 폭동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도청을 전투기지로 삼은 해방구가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가? 그들의 총기 무장으로보아 이것은 순수한 민주화 운동으로도 비쳐지지 않을 뿐더러, 과연 저들에게 민주주의 철학이 있었는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광주의 상처 치유는 쌍방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즉, 광주 시민들 편에서도 당시 유언비어의 출처도 확인하지 않고 파출서 등 공공건물에 화염병을 던진 행위는 옳았는지 성찰할 때 광주 상처는 더 빨리 치유되며 민족은 화합될 수 있을 것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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