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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명칭의 어원과 우리 민족의 소망

(이 글은 2003년 10월 26일에 저의 칼럼 사이트 http://column.daum.net/sion/  에서
"하나님 명칭의 어원에 관하여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쓴 글입니다.)
 
   이근수님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옛적부터 "하느님" 혹은 "하나님"이란 하나님 명칭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 중국어의 상디(上帝:상제)와 뚯이 비슷합니다. 일본어에서는 "하나님"을 가미(神)랴고 부릅니다.

   그런데, 중국어의 상디(上帝:상제), 일본어의 가미(神)와 한국어의 "하나님"이 모두 기독교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사용되지만 한국어의 하나님 명칭이 가장 기독교 하나님의 속성을 잘 나타냅니다. 중국어의 上帝에 비해 한국어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유일신 하나님의 의미가 모두 선명합니다. 일본어 가미(神)는 기독교 하나님을 가르치지만 잡신 역시 가미로 불리는 약점이 있습니다.

   오히려 영어의 God 보다도 더 성서작인 하나님 명칭이 한국어의 하나님 명칭입니다. 영어의 God은 소문자 god, 즉 잡신과 발음이 똑같다는 것이 영어의 하나님 명칭의 한계입니다.

   한국인들 중에 하나님 명칭이 서양에서 유래한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실은 하나님은 우리 고유의 하나님 명칭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심을 알았듯이 우리 선조들도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 선조들이 알았던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민족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조상이 있듯이, 인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조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종교성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유산입니다.

   샤머니즘은 종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현세적입니다. 종교에는 사람의 사후(死後)의 문제, 즉 구원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종교는 인생이 어디로 가느냐를 묻습니다. 그런데, 샤머니즘의 관심은 오로지 오늘의 액운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에는 내일의 시간이, 구원론이 없습니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종교와 구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크리스마스는 온인류가 심지어 불교 신자들도 경축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불교는 자력 종교입니다. 불교에서 부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나 도를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는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종교이며, 여기에 동양의 심오한 철학이 있습니다.

   불교는 수양의 종교요 고행의 종교입니다. 불교에 많은 좋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무리 머리깍고 산에 들어가도 아무리 고행을 하여도 사람의 힘으로는 하늘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류의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 사건에 인류의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갈 수 없자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지옥불에 떨어지는 멸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불교가 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 하는데 비해,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근수님은 한국 정치 시사에 아주 밝으신 분이며, 그래서 저도 이근수님 글의 독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한국 정치의 문제입니까? 탐욕의 문제, 곧 죄의 문제입니다. 불교 철학에서 욕심은 백팔 번뇌의 원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한국은 불교 문화권입니다. 그런데, 한국 정치가 바로 이 탐욕의 문제의 사슬에 걸려 있습니다. 일전에 님이 지적하신 KS 상류층의 문제는 바로 탐욕의 문제입니다.

   이근수님이 기독교는 오래동안 세계를 지배하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배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민족 종교가 아니라 세계 종교인 것입니다. 보세요! 로마제국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기독교인들을 굶주린 사자들에게 물어뜯겨 죽게 하는 모진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로마가 기독교국이 되었으며, 그 복음이 유럽의 야만인들에게 전해져 유럽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강대국의 역사가 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와 아주 흡사하였습니다. 주변에 이집트 제국이, 오늘날의 이라크인 바빌로니아 제국이, 오늘날의 이란인 페르시아 제국이 있어 늘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제국이나 그리스 제국의 궁전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시골 나사렛 동네의 나굿간 구유, 즉 말먹이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강대국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왜 우리 민족의 하나님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약한 민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허물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허물 많은 우리 한국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소망을 품고 계시며,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랍니다. 비록 이 세상의 정치는 악하더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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