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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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평화 담론에 대한 역사의 교훈과 복음 메시지

   2003년 3월 20일 드디어 21세기 첫 전쟁의 포성이 중동의 하늘에서 울렸다. 앞으로 이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세계는 손에 땀을 쥐고 이라크 전선을 지켜보고 있다. 원래 미국은 사막 바람이 불기 시작하기 전인 3월 3일 전쟁을 개시하려 하였으나 프랑스가 UN 안보리 표결을 방해하는 바람에 지연되었다. 과연 프랑스 정부는 진정으로 이라크와 세계의 평화를 반전 평화론을 주장하는 것일까?

   프랑스 정부는 1930년대에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였다. 오늘날 사담 후세인이 생체 실험을 하면서 생화학 무기를 만들고 있듯이 당시에도 독일의 히틀러가 생체 실험을 하면서 살생 무기들을 만들고 있었다. 당시 경제가 아주 나쁜 독일이 오늘날의 이라크처럼 군수 산업만 발전시키며 군비 증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던가? 바로 자기네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프랑스 정부도 군비 증강을 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반전 평화 목소리만 컸을 뿐 아무도 히틀러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던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프랑스인들은 그때도 범하였다.

   당시 히틀러가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키는 방법은 한 나라 한 나라씩 불가침조약을 맺어 침략 대상국을 안심시킨 다음 불시에 예고 없이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유럽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찌 독일이 1939년에 갑자기 폴란드를 침공하여 사흘 만에 점령하였는데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 독일이 요청하는 불가침조약을 맺고 평화 협정을 강화하는 외교적 노력으로 평화를 보장받으려 할 뿐 어느 나라도 독일을 제재하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찌 독일의 히틀러가 써 준 불가침조약은 그가 예고 없이 이웃 나라를 침공할 때마다 휴지 조각이 되었다. 독일이 이웃 나라들을 차례로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도 외교적으로 평화를 보장받으려 했던 프랑스는 독일군의 침공을 20분만에 항복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나?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나치스 히틀러의 폭정에 시달리게 된 후에야 프랑스 국민들은 지하 레지스땅스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막강한 독일군 앞에서는 바위에 달걀 던지기였다. 오스트리아, 네델란드, 덴마크 등 유럽 여러나라를 차례로 점령해 나가던 히틀러는 러시아를 확실하게 정복한 다음에 영국을 삼키려 했다. 그때까지 영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히틀러는 영국에 동맹 협상을 제의했다. 외교적으로 평화를 보장받으려는 많은 영국의 정치인들이 히틀러에게 속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처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처칠은 반전 평화의 여론을 무릅쓰고 그 시점이 지체할 수 없는 결단의 때임을 깨달았다.

   아! 그때 프랑스인들은 용단을 내려 프랑스에 출전한 영국 처칠 수상의 결단에 얼마나 감격해 마지 않았던가? 그러나 영불 연합군도 막강한 독일군의 화력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2일 던커크 철수작전 60주년 행사는 영국인들에게도 프랑스인들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뜻깊은 날이었다. 도버(Dover) 해협을 사이에 끼고 영국의 동남부 항구 도시 도버와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던커크(Dunkirk)가 있다. 바로 여기서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승선한 가운데 2000년 6월 2일에 던커크 대철수 60 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영국은 당시 참전 용사들이 그 때 그 복장으로 집합한 가운데 매해 이 기념 행사를 치루어 왔는데, 어느덧 60 년이 지나는 동안 이 기념식의 주인공이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으므로 60 주년이 마지막 기념 행사이기에 더욱이나 뜻 깊었다. 81세의 한 퇴역 군인은 던커크 철수 당시의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패배하였으나 구조되었다”라고 대답하였다.

   만일 1940년 5월 2일 던커크 철수작전이 실패하였다면 1975년 패망한 월남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듯이 프랑스는 사라졌을 것이며, 히틀러는 백전 백승의 기세로 전세계를 정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던커크 작전은 기적적으로 성공하였다.

   1940년 5월 하순, 독안에 든 쥐꼴로 던커크에 집결해 있는 연합군이 벼랑 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독일군에 완전 포위되어 바다 외에 퇴로가 없었으며, 마지막 탈출 희망의 보루인 항구마저 공습에 폭파되었다. 이때의 그들은 마치 촐애굽 때 앞에는 홍해 바다 뒤에는 애굽 병력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 같았다. 과연 그들을 위하여 도버 해협의 바닷물이 갈라지는 기적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기적이 있었다.

   5월 24일 큰 배가 진수할 항구가 폭파된 던커크에 영국의 모든 작은 배들이 연합군 구조의 의무를 띠고 들어오고 있었으며, 때를 같이하여 구데리안 장군 휘하의 독일군 철갑 부대가 던커크의 마지막 방어선인 운하를 막 넘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왜 히틀러가 그 순간 갑자기 구데리안 장군에게 즉시 철수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명령을 내렸을까? 이것은 역사가들에게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사건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이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큰 증거이리라. 그리고 이틈을 타 6월 4일까지 11일간의 철수 작전이 완료되었을 때 198,000 명의 영국군과 14,000 명의 프랑스와 벨기에 군 등 도합 338,000 명의 연합군 병력이 작은 배들에 실려 구조되었다. 이 구조받은 자들이 누구였던가? 그들은 영국의 정예군 병력, 훗날 연합군에 승리를 안겨줄 주역들이었다.

   던커크의 연합군은 적에게 포위되고 퇴로가 없었으되, 아직 적의 포로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군의 진영과 적의 진영 틈새에 있는 자들, 구조될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되 구조될 희망이 전혀 없지 않은 자들이었다. 오늘날의 사담 후세인처럼 사악한 전쟁광 히틀러는 영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을 전멸시킬 힘이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구조는 가능하였다. 6.25동란 때 부산에서 삼면으로 인민군에게 포위당한 우리 민족이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극적으로 구조되었듯이 던커크에서 독일군에 포위당한 채 전멸 위기에 있던 연합군도 구조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망명 정부와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줄기차게 호소하였던 것이니 오늘날 나치스 히틀러와 같은 또 하나의 전쟁광 사담 후세인을 상대로 하는 미국의 전쟁을 프랑스가 반대한다는 것은 실로 배은 망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그때 미국이 즉시 참전하였는가? 아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두가지 이유로 반전론이 우세하였었다. 첫째, 당시 미국의 대외 정책은 고립 정책이었다. 1823년에 몬로 대통령이 "미국은 국제 문제에 개입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다"는 몬로주의(Monroe Doctrine)를 주창한 이래 미국의 고립 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즈음하여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14개 조항을 바탕으로 국제연맹이 설립되었어도 미국이 가입하지 못했던 것도 미국은 고립 정책을 고수하여야 한다는 국내 여론이 워낙 거세었기 때문이다. 둘째, 1930년대 초의 경제 공황에서 갓벗어난 미국은 대륙의 전쟁에 참전할 경제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만일 명 외교가 처칠의 끈질긴 설득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영영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며, 미국의 참전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영국은 독일군 공군의 무자비한 폭격에 버티지 못하였을 것이며, 영국마저 독일에 점령당했다면 영국에 망명해 있던 프랑스 망명 정부가 없어지면서 프랑스 역사는 끝장났을 것이다.

   이라크는 1991년 쿠웨이트침공 이전에도 쿠르드족 300마을을 생화학무기로 "인종청소"하였다. 탄도미사일을 발사해 주변국을 위협하는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족 중 15세에서 17세 소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본국인에게도 온갖 살인, 납치, 고문을 자행했다. 회의실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권총으로 부하를 죽이는 자가 후세인이다. 그는 세계적 테러조직 배후에는 세인이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인들이 히틀러의 폭정을 싫어했던 것 이상으로 이라크 사람들도 후세인의 폭정을 싫어한다. 그리고 2차대전 때 프랑스 국민들이 너무도 절실하게 미국의 참전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이라크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국민들이 너무도 절실하게 미국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 2월 18일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때 대구 K-21 공군비행장 소속 미군 병사들이 먼저 지하철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많은 인명을 구해낸 미담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백명이 넘는 실종자의 신원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기에 그 참화는 어떻게든 예방되었어야 할 사고였다. 이날 전동차 내에서 김대한씨라는 방화범이 인화물질이 담긴 10ℓ짜리 플라스틱통 2개에 라이터로 불을 일으키기 전 그의 손에서 플라스틱통이나 라이터를 뺏고 못 뺏고의 문제는 참사의 위기를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사담 후세인의 폭정을 지지하는 친북 좌파는 김대한씨의 손에서 라이터를 뺏으려 하지 말고 외교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반전 평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나치 당의 히틀러나 전쟁광 후세인의 손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빼앗을 기회를 놓칠 때 인류가 당하는 참화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프랑스 국민들은 2차대전 중에 몸소 경험하지 않았던가? 미국은 방화범의 손에서 인화물질을,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손에서 생화학 테러 무기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미국이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두 조건이 있다. 생화학 테러 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없애라. 아니면 사담 후세인이 물러가라. 이 두 가지 요구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미국은 아직 방화범의 손에서 플라스틱병과 라이터를 빼앗을 기회가 남아있을 때 행동하는 선택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프랑스 정부의 반전 주장이, 그리고 김정일의 독재와 폭정을 지지하는 무리들의 반전 평화 시위가 사담 후세인에게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을 주었다면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전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라크의 후세인도 북한의 김정일도 대량 살상 무기 소유욕에 불타는 자들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마가복음 11장 1~10절)에서 우리는 진정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본다. 만인의 구세주로서 오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 그분은 군마를 타고 오시거나 헛된 영광의 거대한 기념비들을 후대에 남긴 바로와 앗시라이의 군주들처럼 전차낫을 단 병거를 타고 싸움터를 누비지 않고 온유와 인내와 온화와 평강의 상징을 타고 오셨다. 그의 수행원들은 창을 든 무사들이 아니라 종려나무 가지를 든 농민들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충성의 경례는 트럼펫들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청으로부터 나오는 "호산나"이다.

   그러나 그 상징은 바로 그의 왕국의 비밀을, 그의 성품의 가장 깊숙한 신비를 드러낸다. 상냥함은 신실하며 전능하나, 무력과 폭력은 약하다. 주님은 지진이나 불아니 강한 바람 중에가 아니라 세미한 작은 음성 중에 계신다. 비들기의 가벼운 깃털이 그 강한 발톱과 피로 물든 부리를 기진 로마의 독수리보다 더 멀리 나를 것이다. 그리고 온유함으로 세워지며, 그 유일한 무기로서 사랑의 힘과 인내의 전능함을 가진 왕국은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던커크에서 독일군에 삼면으로 포위되었었던 프랑스인들에게도, 부산에서 삼면으로 인민군에 포위당했던 한국인들에게도 미국의 참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다. 아울러, 세계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염원은 나귀 새끼 타고 오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서 영접함으로 표현된다.

석양의 기도
이라크전에 파병된 아일랜드병사들이 3월 17일 성패드릭의 날을 맞아 기도하고 있다.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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