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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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비유와 민족의 소망/ 다섯 처녀의 기다림의 등불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 1절부터 13절에 보면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온다. 우리와 결혼 풍습이 아주 다른 나라의 옛날 이야기이지만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열 처녀 중에 다섯 처녀는 미련하고 다섯 처녀는 슬기있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 기름을 예비한 처녀들은 슬기 있는 처녀들이요 기름을 예비하지 않은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이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이라는 입장도 같았으며 기다리는 신랑이 더디오고 있었다는 사실도 같았다. 신랑이 어찌 더디 오는지 모두 졸며 잤다. 그러나 밤중에 마침내 신랑이 왔으며 소리가 나기를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였다.

  파스칼이 말하였듯이 사람은 늘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어릴 때는 '가나다라' 하며 글읽기 배울 날을 기다린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중학생이 될 날을, 고3때는 입시에서 해방될 날을 기다린다.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하면 기다림의 끝인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요즘 한국 국민은 어서 북핵위기의 터널을 벗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세상에는 환난이 있으며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기다린다.

  더 나은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행동을 부르짖는다. 근자에 우리 사회에서 매국적 행위를 일삼는 좌익들도 그들 나름대로 더 나은 세상에 대하여 말한다. 국민 기업이 해체되면 외화벌이를 할 대안이 없는데도 그들은 그것이 더 나은 세상이 되는 것인 양 말한다. 과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남로당이 그랬으며, 지금도 기다리는 일이 앞당겨지기 위하여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들이 있다.

  엊그제(2003년 5월 초) 두 20대 청년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해 그들은 66세의 버스기사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버스를 운전하다가 아들 혹은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에게 얻어터진 기사는 다시 핸들을 잡다가 기절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이었다. 서울 시내에 버스는 얼마든지 있으며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는데 왜 때렸을까? 일분 아니 몇초를 더 못 기다려서 어른을 때려 죽인단 말인가? 우리나라에 버스라는 교통 수단이 등장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의 일이며 그전에는 걸어다녔었다. 오히려 먼 길을 걸어다니던 옛 사람들은 여유라는 멋을 가지고 있었으나 요즘 신세대의 몇몇 청년들은 무엇때문에 그토록 조급해하는가?

  여중생범대위는 이 두 한국 청년의 조급증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살인 사건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지난 6월 13일 파주군 미군장갑차전용도로상에서 일어난 두 여중생 과실사고도 그 일차적 발생원인은 두 여중생의 조급증이었다. 물론 창문의 크기가 볼펜의 지름 크기밖에 안되어서 장갑차의 사각지대에서는 운전병의 시야에 행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가항력적 요인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 장갑차 훈련이 사전예고된 시간대에는 미군장갑차전용도로는 민간인이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두 여중생이 잠깐만 길옆에서 기다려야 했다. 바로 그 도로로 6.25때 북한 인민군 장갑차들이 남침하였었기에 그날 아침 10시에 10대의 미군장갑차들이 인민군 장갑차 방어 훈련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30초 사이로 10대가 지나는데 길어야 오분인데 오분만 옆에 비켜서 기다리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본래 장갑차전용 군사도로인 그 길은 인도가 없기에 장갑차와 행인이 함께 이용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여중생범대위가 정말로 대책을 세우려면 여중생들에게 교통안전수칙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 교통사고가 별로 없는 것은 시민들에게 교통규칙 준수가 생활화되었기 때문이요, 한국에 교통 사고가 많은 것은 사람들이 교통규칙을 지키기에는 너무도 조급해하기 때문이다. 두 여중생 사고 원인은 근본적으로 한국인의 조급해하는 국민성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은 교통안전수칙을 무시해도 좋은가? 아니다. 정말로 일등 국민이 되려면 우리도 개선할 것은 개선해야 한다. 그러면, 범대위는 엊그제 두 청년이 나이든 버스기사를 폭행하여 살인한 것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는가? 정말로 우리 국민을 불안케 하는 것은 이런 폭행이다. 젊고 힘이 세다고 대낮에 어른들을 이렇게 때려죽이는 사회는 결코 안전한 사회가 아니며, 또 이런 모습이 결코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민의 안전을 그토록 염려하는 범대위는 기다림에 인색한 한국 국민성이 빚어낸 이번 살인사건에 대하여는 뭐리고 말하며 어떤 대책을 제시하려는가.

  인권 운동의 가면을 썼으나 본 정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범대위와 학생단체의 가면을 썼으나 그 정체는 김정일 똘마니들인 한총련의 문제는 과격 행동이다. 그들은 그들의 촛불시위가 한국 외교의 시계를 60년 거꾸로가게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느지 미국대사관에 쳐들어가며 미국 성조기를 찢는 과격 행동을 하였다. 근자에는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그들은 과격 행동을 하지 않으며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의 열 처녀의 비유에 색다른 역사관이 있다. 여기 이 비유의 주인공들은 역사를 무력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바라는 일이 잘되기 위하여, 좋은 미래를 위하여 행동하시는 분은 저편에서 오신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은 행동하기는커녕 졸다가 잠이 들기까지 하였다.

  파스칼은 배가 안전하게 항해지에 도달할 것을 알면서 파도가 이리저리 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인생의 큰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안전한 항구로 우리가 탄 배를 인도하시는 것을 알면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인생의 큰 즐거움이다. 어느 독일 목사님이 탄 미국가는 배에 큰 개가 한 마리 동승하였다. 그런데 그 개는 몹시 슬퍼 보였다. 배 간판의 낯선 환경의 냄새는 그 개가 여태껏 알았던 개의 세계의 냄새와 전혀 다른 냄새였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안전한 앙구를 모르는 그 개는 이제는 개의 세계가 끝장난 줄로 알고 내내 절망하며 괴로와하였다.

  다시 독일로 오는 배에도 개 손님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개는 몹시 평안해 보였다. 물론 이 개에게도 배는 낯선 환경이었다. 그러나 이 개 옆에는 꼬마 주인 아씨가 동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개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지금 내가 맡는 냄새는 내가 아는 개의 세계의 냄새가 아니예요. 나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곳은 어떤 세상인지 몰라요. 그러나 나는 이것을 안답니다. 주인 아씨는 나보다는 훨씬 차원이 높은 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씨가 나를 데리고 가는 곳은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안답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예수님이 선장이신 배를 타고 인생의 바다를 항해할 때 우리가 누리는 평안이 이와 같음을 말하여 준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내일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또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항해의 인도자이시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밝은 희망을 가지고 우리의 미래를 기다린다. 이것이 신양성경 마태복음 25장 1~13절의 다섯 처녀의 이야기이다.

  오늘날 범대위가 촛불을 반미주의의 상징으로 왜곡시켰지만 본래 두 여중생 촛불 추모식은 본래 미군 장병들이 6월 18일에 처음 시작하였다. 미군 장병들은 두 여중생 추모의 뜻을 이 촛불에 담았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등불 시위는 혼인잔치의 즐거움을 상징하였다. 신랑은 밤중에 도착하였으며 가슴 설레며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들의 환희와 애정과 희망이 이 등불에 담겨있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미래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이 비유의 주인공들은 역사를 무력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희망의 미래를 위하여 행동하시는 분은 여기 있는 그들이 아니라 저편에서 오신다. 그들은 단지 기름만 예비하면 된다. 이런 느긋한 기다림의 멋과 여유는 맥아더 장군이나 니폴레옹 황제 같은 명장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들은 전세가 초전에 불리하여도 느긋하게 승리를 기다린다. 좋은 작전이 예비되어 있는 그들에게는 승리의 확신이 있을 뿐이며, 또 그런 장수가 인솔하는 군대는 승리하였다. 그러나 중학생들을 내세운 범대위의 촛불시위는 정치와 경제와 안보의 위기를 한꺼번에 몰고왔다. 우리나라에 초중고생들을 정치적 시위 현장으로 내몰아야 할 다급한 상황이 있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엉뚱하게 정치적 시위를 하는 것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

  성경의 다섯 처녀의 등불시위는 기름을 예비한 자들이 미래의 희망을 기념하는 축제였으며, 한국 범대위가 선동한 촛불시위는 학생의 본분을 망각한 자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정치 시위였다. 촛불시위 자작극을 벌인 앙마가 한국민에게서 한일 월드컵의 에너지릉 도둑질해간데 이어, 범대위는 촛불 시위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밝은 미래를 위한 희망마저 도둑질해 가려 하고 있다.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이들은 초중고생들을 학교와 학생의 본분으로 되돌려 보낸다. 어린 꿈나무의 본분은 실력 향상이지 결코 정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범대위의 촛불시위가 분열시킨 국론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가 성경의 다섯 처녀의 등불시위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좋은 미래를 위하여 행동하시는 분은 여기 있는 우리가 아니라 저편에서 오신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예비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 기름을 예비하였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미래 한국을 위해서도 밝은 희망을 가지고 느긋한 마음으로 미래를 기다릴 수 있다.

여중생 추모 촛불 시위를 처음 시작한 미군 병사들

여중생 추모 촛불 시위를 처음 시작한 미군 병사들.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인민군 장갑차 방어 훈련 작전 중이었던 미2사단 44공병대 장병들이
6월 18일 오후 8시에 고 심미선, 신효순 양을 위해 촛불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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