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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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익 재등장의 기원: 사회경제학적 관점

   우리나라에 좌익이 출현한 것은 해방 정국으로 거슬러올라가며, 그 뿌리는 일제 시대의 공산주의 운동권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한국 사회에 좌익이 재등장한 기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그의 경제 정책의 실패로 IMF 환난의 한 요인을 제공하기 시작했던 1995년 말에 그는 "역사바로잡기"라는 것을 하였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부인하는 "역사바로잡기"는 좌익의 정계 진출의 시작이었으며, 한국 경제는 이때부터 병들고 엉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일제 시대에는 지하에 있던 공산주의 세력이 왜 해방 정국 때 그토록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가? 그것은 경제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90년초에 러시아가 70년간의 공산주의 지배 치하를 벗어났으며, 시장 경제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장 경제를 경험한 적이 없었던 대다수의 러시아 서민들은 그 자유를 어떻게 만끽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강아지며 뭐든 집안에 팔만한 것이 있으며 거리로 나와 온종일 서서 누군가가 사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바로 이와 비슷한 문제가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사슬에서 갓 해방된 우리나라에 있었다. 해방--그것은 새로운 기회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그림자가 없지 않았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도 일본 총독부 정치는 새로운 직업 창출에 얼마간의 기여를 하였던 듯하다. 본래 우리나라는 소수의 양반과 다수의 양반 아닌 자들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양반 계층에 속하지 못하는 자들이 흔히 쌍놈으로 불려지기도 했는데, 그들의 대표적인 직업이 남의집 머슴살이였다. 양반이 아니라도 토지가 있는 자는 머슴 신세를 면할 길이 있었지만 토지마저 없는 자들에게는 머슴살이가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 일본의 착취가 전혀 무료 착취는 아니었던 듯하다. 일제 시대 이전에 우리나라는 은행이 없는 특이한 나라였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 분명히 한국인이 재산권을 행사하는 은행들이 세워졌다. 이것은 한국인의 사업이 근대화되었으며, 농사 이외의 많은 새로운 직종들이 창출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서 머슴들의 수가 한결 줄어들었 것으로 관측된다. 그럼에도 1950년~60년대에는 우리나라에 다시 남의 집 머슴살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한 형태가 훗날 가정부라고 불리는 식모였다.

    자,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 이것은 매우 기쁜 날이었다. 그럼에도 또 다른 현실,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던 현실이 있었다. (해방 후 한 동안은 오히려 경제가 혼란해진 이유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다루기로 한다.) 해방의 감격과 더불어 오는 또 다른 충격은 직업의 감소였다. 물론, 일본인이 없으면 한국 경제의 자립이 어렵도록 한 일본 총독부 정책도 그 원인이었지만 일본인들이 떠나자 많은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었으며, 우리나라에 남은 유일한 생산 수단은 다시 농업이었던 듯이 보인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다시 단순생산경제 시대로 잠시 복귀하였다. 이것이 서민의 경제에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지금은 사이버 세계가 또 하나의 영토이다. 땅 한 평 없어도 정보를 소유한 자는 새로운 경제적 재화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직후의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관공서의 월급 줄이 끊어지고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는 상황에서 역시 유일하게 확실한 생산 수단은 농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토지 소유가 생계를 보장함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해방 정국을 움직이는 것은 토지 쟁탈전이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김일성이 순식간에 권력을 장악한 이유는 러시아 군대의 지원과 아울러 토지 개혁이었다. 지주는 토지를 몰수당한다는 이 토지 개혁을 대다수의 서민들은 그 토지를 자기네에게 나누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주의 수보다는 지주가 없는 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에서 공산주의 혁명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공산화될 위험은 사실 북한보다 남한이 훨씬 더 많았었다. 농민의 수도, 빨갱이의 수도 남한이 훨씬 더 많았었다. 그리고 박헌영이 남로당 지도자로 있었던 서울은 공산주의 이론의 센터였다.

    아직 민주주의라는 용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던 우매한 민중은 공산주의를 선택한다. 우리에게 국토 분단은 아픔이지만 오히려 남한만이라도 공산주의 지배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한 긍정적인 면이 있다. 만일 소련의 우리나라 침략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완전 공산화될 뻔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면, 해방 정국 때 서민들은 왜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가기 쉬웠는가? 그것은 그들이 아직 경제 이론에 관한 장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오늘날 한국 사회에 좌익이 다시 등장하였는가? 똑같은 이유 때문인바, 좌익은 경제 이론에 관한 한 눈뜬 장님이기 때문이다.

    자, 1960년 대 초 우리나라 GNP가 80불로 아프리카 가나와 더불어 세계 최하위였다. 그것도 미국이 한국 재정의 90%를 무상 지원해 주었는데도 우리나라 GNP가 아직 80불 미만이었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은 경제에 관한 한 밑빠진 독이요, 밑빠진 독에 미국이 무상원조를 20년 이상은 계속할 수 없다 하여 무상원조 동결 조치를 취하려던 때였다. 한국 경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였으며, 미국이라고 영원토록 무상원조를 할 수도 없었기에 미국이 적어도 경제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을 포기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무엇을 미하였던가?

    미국이 90%를 대주었는데도 일인당 국민소득이 80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만일 미국의 무상지원이 중단된다면 GNP 10불 이하 시대로 하루만에 추락함을 의미하였다. 그러면 GNP 10불 이하인 나라의 독립 유지가 가능하겠는가? 어느날 갑자기 공무원 월급이, 직장인 봉급이, 공장 노동자의 수당이 십분의 일로 줄어들었을 때 한국 사회에 어떤 충격을 미치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아직 1달러의 수출 능력도 없던 나라에서 미국의 무상지원이 중단된다는 것은 국가 부도를 의미하였다. 우리나라는 필수적으로 수입하여야 하는 품목이 있다. 국내 석유 생산이 전혀 없기에 석유를, 농산물 자급 자족이 안되기에 농산물을 수입하여야 한다.

    정치사회학적 시각에서 한국 좌익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부정하는 자들을 말한다. 경제에 관한 한 눈뜬 장님인 한국 좌익은 이구 동성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부정한다. 그러면 좌익이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부정할 때 그들의 결론은 무엇인가? 자칫 GNP가 10불 이하로 떨어질뻔하였던 한국 경제에 박 대통령이 GNP 만불 시대로 도약하는 산업적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좌익 논리의 결론에서 우리는 좌익 세력의 목표를 발견한다. 한국 좌익은 목표는 경제를 마비시켜 온 국민을 절대 빈곤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 좌익은 어째서 파업을 선동하며 온갖 수단으로 한국 경제를 마비시키는 일에 전념을 다하는가? 그것은 경제에 관한 눈뜬 장님들이 평등과 공산이라는 구호 때문이다. 그들은 분배의 평등을 말한다. 문제는 그들은 생산 방법과 생산의 효용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수출의 국가 경쟁력에 대하여 그들은 함구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수출 능력은 없지만 분배가 완전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였다고 하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제에 관한 눈뜬 장님들인 좌익은 우리나라에서는 석유가 생산도되지 않으면 식량 자급자족이 안된다는 사실에 함구한다.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자족율이 삼분의 일에 훨씬 못 미친다. 그것은 국민의 삼분의 이 이상이 굶어죽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런 절대 빈곤하에서 분배의 평등이라 허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960년대 초에는 군(軍)이 민간 사회보다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가 빨랐다. 당시 군 장교들에게는 미국 국방부가 지원하는 유학 프로그램이 있었으나 민간인들에게는 미국 유학의 기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4.19 혁명 후 장면 내각 때 우리나라에 위기감이 있었다. 그때도 좌익들이 설쳐 나라를 어지렵혔다. 그러나 민간 사회가 보지 못했던, 그리고 정부가 알아도 국민에게 알릴 수 없었던 또 다른 위기가 있었다. 국가 예산의 80%에 달하는 무상 지원이 미국이 중다하려 하고 있었으며, 한국 경제는 파국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대로 나라를 망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애국심이 5.16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몇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게 하였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을 시찰하시는 박정희 대통령 .
(1968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 시찰 업무 중 브리핑을 청취하고 계신다.)
천연자원이 없고, 자본도 기술도 시장경제 경험도 없는 한국은 경제 발전의 희망이 안보였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였으며,. 선진국 학자들이 그렇게 판단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런데 경제 이론에 관한 한 눈뜬 장님인 한국 좌익의 문제는
한강의 기적의 부정이며, 이것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부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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