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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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역할에 대한 역대 한국 대통령들의 시각차

   1945년 8월 15부터 3년간의 미군 군정 시절 동안 우리나라의 재정을 지원했던 미국은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196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예산의 90%를 지원했다. 즉, 한국 정부 예산의 70%는 미국 정부가 무상 지원으로 지원하였으며 나머지는 외화벌이와 약간의 조세 수입으로 충당하였었다. 그런데 그 외화벌이라는 것이 주한미군 병사들이 한국에서 사용하는 달러를 가만히 앉아서 벌어드리는 것이었으며 한국 국가 예산 수입원의 20%나 차지하였었다. 이렇게 국가 예산의 90%를 미국에서 지원받았으면서도 한국 GNP는 고작 75달러로 당시 세계120개국 중 꼴찌에서 둘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처럼 수출을 통한 국가 수입원이 전혀 없었던 시절에도 이병철씨 같은 거부들이 있었다. 수출이라고는 일달러 없던 나라에서 수입 무역을 하면 열 배의 폭리를 취하여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당시 한국 경제의 현주소였다.

  1960년 4.19 혁명의 의미가 무엇이든간에 그 무렵 미국은 한국 정부 예산의 무상 지원을 중지하는 방침을 세우고 그 이듬해부터 무상 지원액을 1억불씩 삭감해 나간다는 조치를 취했다. 오늘날의 좌익 운동권이 나라의 경제에 대하여 무식한 것 못지 않게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지식인들과 학생들도 나라의 경제에 대하여는 정말 무지하였었다. 당시 미국이 해마다 3억불씩 우리 정부에 무상으로 지원하던 외화가 우리나라 예산의 70%를 차지하였던 때에 해마다 무상 지원액을 1억불씩 삭감해나가면 우리나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987년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 경제가 부도날 뻔 했던 것과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말하며, 1905년 국치의 을사보호조약의 주원인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한말에 고종의 칭호를 황제로 격상시키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승격시켰어도 일본에 채무가 있었기에 나라의 주권을 빼았겼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4.19 혁명의 의미를 감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즉, 1961년의 5.16 혁명 없는 1960년의 4.19 혁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학생들이 4.19 혁명을 일으겼다. 마냥 장한 일인가? 아니다! 4.19 혁명이 무엇이던가? 대통령 중심제를 내각 중심제로 바꾼 것이다. 즉, 미국식의 대통령 중심제를 하루 아침에 영국식 내각 중심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이론적 뒷받침 없이 하루 아침에 무능한 장면 내각을 날조해 만들어 놓으면 민주주의 정치가 실현되는 것인가? 아니다. 부패 정권인 장면 내각은 미국의 무상 원조 중지 조처에 따른 대책을 세우기는 커녕 그 부패가 극에 달했었다. 오늘날의 좌익 운동권 못지 않게 당시 지식인들도 민주화 운동을 거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라 경제가 망하여서 주권을 다른 나라에 빼앗길 위기에 처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인가?

  반공 의지가 분명했던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미국이 한국 정부 예산을 지원할 이유가 분명했다. 그러나 4.19 혁명 세력이 하루 아침에 미국식의 대통령 중심제를 영국식의 내각 중심제로 바꾼 데에는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위한 미국의 파트너 역할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본래 한미 동맹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성취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4.19구데타로 축출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시각에서는 한미 동맹을 한국인이 환영하지 않는 의미로 비쳐질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4.19 혁명의 도전은 이승만 정권과 더불어 한미 공조를 유지하였던 미국에 대한 도전이 아니겠는가. 당시 미국이 4.19 를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든 윤보선 대통령의 장면 내각 등장을 기점으로 미국의 무상 원조 단계화 삭감은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는 전혀 자립 경제의 능력이 없었기에 이대로 나가면 이삼년 내에 한국 경제는 부도가 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이것은 나라의 경제가 부도나면 어렵게 되찾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우리 힘으로 지키기 어렵게 됨을 의미한다. 이처럼 오늘의 좌익 운동권이나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의 문제는 경제에 대한 무지, 참된 민주화 운동은 나라 경제의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름에 있다.

  다행히도 이런 위기의 때에 우리나라에는 참된 민주화운동을 실현시키기 위한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이 나타나셨다. 어떤 이들은 그의 등장을 군사혁명이라고 하지만 역사학도의 시각에서 1961년의 5.16혁명은 경제 혁명이었다. 당시 열 배의 폭리를 얻는 수입상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수입을 못하게 하는 대신 수출상으로 전업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수출 정책에 따르는 기업들에는 미국에서 기술 이전을 해 주시고 세계에서 가장 저리의 장기 외자를 유치해 지원하여 주셨다. 이렇게 수입상이 변하여 수출상으로 탄생된 대표적인 기업이 이별철씨의 삼성이었다. 그러면, 열배나 폭리 취하는 수입상 못하게 했으니 이병철씨가 손해 보았는가? 아니다. 삼성이 국제 경쟁력을 가진 세계적인 기업이 되면서 오히려 엄청난 성장을 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국가 경제를 좀먹으면서 돈벌던 이들이 이제는 산업 전사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구멍가게 아니면 수입상밖에 없던 우리나라 경제계에 국제 경쟁력을 갖춘 민족 기업들이 생기면서 서민들의 경제 생활도 날로 윤택하여졌음은 물론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입상 거부들을 수출 산업전사로 끌어들일 자들로서, 미국에서 선진 기술을 이전해와서 그들의 기업을 육성해 줄 대상으로 보았다면 전두환 대통령은 재벌을 세계 시장에 진출시킬 대상으로 보셨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팀은 세계 수출 시장을 조사한 다음, 어느 업종의 어떤 기업이 어느 지역에 진출하면 경쟁력이 있는지 조사한 다음, 이 수출 마케팅 마스터 플랜에 따라 정부가 기업에 외교적, 행정적 지원을 해 주었다. 기업주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해외 순방할 때 경제인 수행원으로 따라다니다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수출 노다지가 터지는 것을 보았다.

  수출 마케팅에 관한 한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에 비해 대단한 진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수출 경쟁력을 갖춘 산업으로 발전시키는데 힘을 쏟으셨다. 한 예를 든다면, 서구에서는 200년 걸려야 발전하는 중화학공업을 박정희 대통령은 십년 만에 세계2위의 경쟁력을 갖춘 공업으로 발전시키셨다. 외국인들이 이를 가리켜 "한강의 기적"이라 말할 때 그 한강은 지하자원 없고, 자본 없고, 기술 없고, 시장 경제의 경험이 없는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 초창기에는 마케팅 실수가 있었다. 1960년대에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머리카락을 팔아 자녀 학비를 내시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의 수출은 가발 수출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발업계에서 서로 경쟁하며 덤핑하였던 것은 한국인끼리의 출혈 경쟁이었다. 전두환 대통령 때는 우리 기업끼리의 덤핑을 없애는 고도의 수출 마케팅 정책이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재벌을 북방 정책을 위한 파트너로 보았다. 당시는 구소련, 중국, 동구 등 열리는 구공산권 시장에 전략적으로 진출하여야 할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미국에서 선진 기술을 이전해와 우리 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갖춘 시대요, 전두환 대통령 시대가 선진국 수준의 마케팅 전략으로 흑자 수출 시대를 연 시대였다면, 노태우 대통령 때는 한국 기업이 전략적으로 구공산권 시장에 발빠르게 진출한 시대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재벌을 보는 시각은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급격하게 달라진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모순은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기는 커녕 재벌 해체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야심이 있었다. 그것은 "잘 사는 놈들 혼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뜻은 IMF 시대에 실현되었다. 문제는 서민들만 더 못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경제 정책은 우리 기업끼리 출혈 경쟁을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내수 시장은 한정되어 있는데 중소기업 육성한다면 그 수만 늘여 놓았기에 엄청난 수의 중소기업들이 오히려 부도났다. 그리고 수출 정책에 소극적이었기에 대기업들이 내수 시장에서 생사를 거는 출혈을 하였다. 그의 임기 초의 신경제는 중소기업끼리의 경쟁을 부채질하였다면 일년만에 바뀐 신자유주의 정책은 우리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때 생산 전문화를, 전두환 대통령 때처럼 수출 시장 전문화를 유도시키지 않고 영업 허가를 남발하였기에 우리 기업의 국제 경쟁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잘 사는 놈들 혼내 주겠다"는 말로 함축되는 그의 경제관에 따라 경제 정책을 지시하던 김영삼 대통령이 경제 관료들의 말을 받아들인 적이 한번 있었다. 임기 말이 가까운 1996년 겨울에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했는데, 당시 국민회의 대표 김대중씨가 반대하며 기아자동차 분규를 장기화시켰기에 결국 노동법 개정안은 철회되었다. 그 결과 1997년 말 외환위기가 초래되었기에 사실 IMF 사태는 양김씨의 공동 작품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대에 와서 재벌에 대한 편견은 한층 더 가시화된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벌 억제 수단으로 중소기업을 육성하려고 했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벤처를 육성하였다. 문제는 양김씨에게는 수출 전략이 없었다는 것이다. 박정의 대통령처럼 미국에서 선진기술을 이전해 주지 않고, 전두환 대통령처럼 수출 시장도 열어주지 않고 중소기업 수와 벤처 수만 늘여 놓았을 때 외화벌이를 해오기는 커녕 대부분의 중소기업들과 벤처들이 부도났다. 이것을 양김씨의 경제 정책 실패라고 한다.

   전혀 자신의 친위대를 두지 아니하고 국민을 위한 공복으로서 일하시던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늘 자기 친위대를 두는 김대중 선생의 습성은 그의 재벌 정책에서도 반영된다. 김대중 선생은 1980년대에는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친위대를, 11990년대에는 동교동계를 육성하더니 집권하자마자 MBC를 자기 친위 방송으로 육성하였다. 이렇게 그의 친위대 육성 습성이 재벌 정책에 반영되었을 때 문제는 공적자금 지원을 결정하는 잣대가 그의 친위 기업이냐 아니냐로 가름된다는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거의 다 성장한 대우는 내쳐도 현대에는 엄청난 공적 자금을 쏟아 붓는다.

  역대 대통령 중 재벌에 대한 가장 심한 편견은 노무현에게서 보여진다. 똑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어도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모든 국민이 함께 나라를 발전시킬 산업 전사로 보인다. 자본 없고, 기술 없고, 자원 없고, 시장 경험 없으며. 있는 것은 수입상들밖에 없었어도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는 모든 것이 수출용품으로, 모든 국민이 수출전사로 보였다. 그는 당시의 구조악이었던 수입상들을 끌어안아 수출전사들로 변화시켰다. 전두환 대통령도 재벌을 구조악으로 보지 않고 수출 역군으로 보았다. 그는 기업들에 해외 시장 진출의 문을 열어주었다. 같은 물이라도 주인이 쓰기에 따라 도랑물이 되기도 하고 샘물이 되기도 한다.

  1950년대의 남로당과 196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관의 차이가 무엇인가? 붉은 완장 차고 죽창든 남로당원들은 도토리 키재기하여 자기보다 잘사는 동네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서열 파괴와 무조건 빼앗기식의 경제관과 달리 박정희 대통령은 온 국민을 심지어 수입상들까지도 끌어안고 국가 발전의 원대한 비전을 향하여 끌어 안았다. 같은 물이라도 주인이 쓰기에 따라 도랑물이 되기도 하고 샘물이 되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때에도 구조악은 있었다. 그러나 물은 도랑물이 아니라 샘물이라는 비전이 있었다. 그때 외국 투자가들이 몰려왔다. 노무현의 동북아 물류 중심국 방안의 속 내용은 한국 경제를 외국 투자가들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해외 투자가들이 떠나고 있지 아니한가. 이것은 샘물이 될 수 있는 물을 도랑물로만 보는 그의 편견에 뿌리박은 개혁 정책 때문이 아니겠는가! 실로 지금은 기술 자립과 수출 경쟁력 향상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자립 경제를 실현시키시려던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철학이 그리워지는 때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립 경제에 기반을 둔 확고한 경제 주권 확립의 바탕 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육영수 여사와 더불어 청와대 뜰을 걸으시는 박정희 대통령

목련나무 밑에 머물러 유심히 꽃을 바라보다가 저편으로 사라지는
두 분의 모습은 목련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오랜만에 남편과의 산책을 즐기는 어머니의 웃음 띤 얼굴도
활짝 핀 목련과 아주 닮아 있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육영수- 중에서)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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