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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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즈펠드의 대승과 맥아더의 대패와 김일성의 생일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4월 15일(2003년) 이라크전에서 미·영 연합군의 승리를 선언했다. 한국에서는 이라크 전쟁 파병 문제를 놓고 국론이 양분이 되어 갑론을박하는 사이 상황은 종료되었으며, 이미 이라크 전쟁은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한지 삼주 만에 바그다드는 함락되었으며, 다시 일주 만에 부시 대통령의 승리 선언으로 전쟁은 종료되었다. 실로 이 전쟁은 이라크전 위기와 때를 같이하여 핵무기 벼랑끝 외교를 시작한 북한의 예상을 뒤엎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 충분할 만큼 속전 속결로 끝나고 말았다. 천문학적 고가의 최신 미사일들을 발사하였음에도 이 전쟁은 미국이 치룬 역대 전쟁 중에 군비가 가장 적게 든 전쟁으로도 유명하다. 한국 전쟁 때 미국이 사용한 군비가 3,360억불이었던데 비해 이번 이라크 전쟁에는 500억불밖에 안들었다. 한국 전쟁 때 전사한 미군 장병의 수가 56,000명이었는데 비해 이번 이라크 전쟁 때의 미군 전사자의 수는 손가락으로 헤아려 몇명 안된다.

  미처 한국군이 파병되기도 전에 부시 대통령이 승리를 선언함으로 종전된 이 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의 명전략이 유명해졌다. 지상군을 너무 일찍 투입하여 적진 깊숙히 들어가는 그의 새로운 전략이 처음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전선에서의 소모전 대신 바로 적의 심장부를 찔러 적의 사령부를 공격하는 그의 전략은 적중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의 전쟁사에서 전쟁의 개념을 바꾼 획기적인 전략이었다. 실로,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최신 무기를 이용한 전쟁의 명전략가이다. 미국이 낳은 또 하나의 세계적인 명 전략가는 태평양 전쟁의 영웅 맥아더 원수이다. 패전국 일본의 국민들이 여태껏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맥아더 원수이며, 미국은 명장 맥아더를 태평양의 황제라로 불렀을 정도로 그는 신출 귀몰한 명전략가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부시 대통령이 승전 선언을 한 15일에 북한에서는 성대한 김일성 생일 기념 행사가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승전 선언은 북한 당국의 패배감을 의미한다. 이라크는 북한의 주요 무기 수출국이요 핵무기 거래 대상국이다. 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어야 북한이 핵무기를 이라크에 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을 북미 양자 회담 테이블로 불러낼 수 있으며, 한미 동맹 해체를 요구할 수 있었다. 북한이 원하는 바가 단지 경제 원조라는 노무현씨의 오판과는 달리 김정일이 요구하는 것은 북미 불가침조약, 한미 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이다. 즉, 이것은 한민족과 미국의 대결의 문제이니 미국은 북한의 적화통일에 간섭하지 말라, 그러면 그 댓가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사라져 버렸으니 김정일의 계산이 빗나가고 말았다. 더구나, 전선에서 치루는 과거의 전쟁 개념과는 달리 이번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이라크 지휘부를 곧바로 공격하는 전쟁이었다. 이것을 의식하였기 때문이었을까? 이번 김일성 생일 기념 행사 때 김정일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로서는 부시 대통령이 승전 선언을 한 날이 결코 흥겨운 날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일성 생일 기념 행사는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에너지가 동이 나고 식량이 떨어진 나라에서 그렇게 성대한 생일 행사를 치루어야 할 이유가 궁금하기만 하다. 더욱이 올해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지 9년째 되는 해이다. 과연 김일성이 그토록 위대한 인물인가?

  오늘 (2003년 4월 15일) 미국의 승전 선언일에 김일성 생일 행사를 지켜보며 우리가 김일성에 대해 회고하는 바는 북한에서는 6.25동란 때 김일성이 맥아더 장군을 물리쳤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북한에서는 북한 인민군이 미군보다 강한 군대라고 가르친다. 과연 그렇게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을까? 여기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명장 맥아더 장군의 군대가 북한 인민군에게 궤멸된 전쟁 일화가 있다. 이번 이라크 전쟁 때 미군 한 명 전사 소식에 미국 온 국민이 울고 한 명 구출 소식에 미국 온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그런데, 한국 전쟁 초기 때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군 몇만명이 전사하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25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가? 우리나라는 한국군 창설한지 일년도 채 못되어 당한 전쟁이었다. 그때 육사가 있어서 한국군이 창설된 것이 아니었다. 항일 운동을 하던 중국 공산당 팔로군 출신 인사들 중 고향이 북한인 사람은 북한 장교가 고향이 남한인 사람은 남한 장교가 되었다. 즉, 정권 경쟁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밀려난 이들이 군부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을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이들에게 민주주의 철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4.3반란 사건을 일으킨 박헌영의 남로당과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의 인사들이 그 시대의 좌익이었다. 그리고 6.25 전쟁 준비를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좌익들이 공모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 여기서 당시 좌익이 장악하였던 한국군 상황을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의 회고록을 통해 살펴보자.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계속 묵살하였다. 6.25가 발발 2주전에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6.25 1주일 전에 전후방부대의 대대적인 위치교환이 이루어졌다. 지형도 낯설고 부하와 상관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6월 11일부터 발령됐던 비상경계령이 6.24일 0시에 해제됨과 동시에 전 장병의 절반 병력에게 휴가를 주었다. 6월 24일 저녁에는 전후방 연대장급 이상의 모든 지휘관을 불러 육군 장교클럽 댄스 파티를 열어 새벽까지 술과 파티를 즐기게 했다. 국군이 계속 퇴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 방송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하였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한강 이북에 있는데도 당시에는 유일했던 한강교를 서둘러 폭파하였다.

   98,000명의 한국군 병력이 후퇴하고 있는데 한강교를 폭파하니 어떻게 되는가? 맨몸으로 한강을 건너 남쪽 둑에 모인 병사가 겨우 22,000명이었다. 그러나 군복은 커녕 총 한 자루 없는 이 병력으로 무슨 전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바로 이때 6월 29일 새벽 6시 맥아더 원수가 그의 전용기 C-54를 타고 와서 한강 남쪽 제방을 순시하였다. 여기는 이미 북한군이 장악한 곳이었으나 명장 맥아더 장군은 여유 만만하게 적군의 지형과 후방의 지형을 관찰하였다. 순간 한강 남쪽으로부터 수원에 이르는 피난민 행렬을 본 그는 나즈막히 탄식하였다. "아! 지난 수천년가 시련이 많던 이 민족에게 또 다시 시련이 닥쳤구나!" 그리고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결심하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민족을 공산주의 침략자들로부터 구출해내고 말리라."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 기지로 돌아온 그는 즉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한국 전쟁 참전 결심을 받아내었으니 그 시간이 6월 30일 새변 4시 57분이었다. 만일 오늘날 한국이 이라크 참전 문제를 가지고 몇달째 찬반 토론하는 것처첨 미국이 하였다면 한국이란 나라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태평양의 황제라고 부르던 맥아더 원수가 한국을 돕기 위해 그날 밤을 새웠다. 그리고 일단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하여 O.K. 소리를 받아낸 그는 미국 국회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 원수가 누구였던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었으며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면 가장 당선이 유력한 자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미국 국회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았다. 한국의 운명이 풍전 등화이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그는 즉시 행동하였다.

   그날 트루먼은 2개사단과 1개 전투연대 파견을 전 세계에 공표하였다. 그리고 한국 시간으로 7월 1일 새벽 3시에 스미스 부대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구마모도를 출발하였다. 미국과 16시간의 시차를 감안하면 트루먼 대통령이 6월 30일 아침에 파병 계획을 공표하자마자 파병이 시작된 것이다. 전투 태세가 항시 갖추어져 있는 한국군도 이라크 파병 준비하는데 두 달 이상 걸리는데, 미국이 한국에 즉각적으로 파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사실 기적적인 일이었다. 당시 주일 미군 병력 중에 전투 병력이 있었는가? 없었다. 때는 2차 대전 종전 후 평화를 구가하던 때이므로 군정 직후의 일본에는 행정병, 취사병, PX 사병, 지휘관 당번병, 군종사병들만 있었을 뿐이다. 이들 병력이 갑자기 소집되어 한국에 파병되었다. 전쟁에 이기라고 파병된 것이 아니라 부산마저 인민군에게 함락되넌 것을 단 며칠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급히 파병되었다.

  당시 미군은 지원병제도 아니었으며 본래 전투병과도 아닌 이들은 19세~20세의 어린 나이였다. 취침 중 영문도 모른체 M-1 소총 지급을 받고 새벽 세시에 파병된 스미스 부대가 구마모도를 출발하였을 때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청춘의 나이에 전멸할 8,000명 병력이 당할 비극을 슬퍼하는 하늘의 눈물임을 그들은 알았을까. 그날 아침 8:05분에 이다쓰게에 도착하여 08:45분에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4대의 C-54기에 탑승하고 부산으로 출발했지만 안개가 짙어 내릴 수 없었다. 10회나 회항하다가 오후 세시에 겨우 착륙하여 열차를 타고 7월 2일 오전 8:00시에 대전에 도착했다. 즉, 취침 중 갑자기 소집되어 파병된 첫 부대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잠을 자지 못한채 낯선 땅에 도착하였다. 그들을 환영한 것은 소련제 소총과 장갑차의 사격이었다. 지상군이 식사하고 취침할 기지조차 없었던 미군은 인민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으며, 첫 파병 병력 8,000명은 전멸하였다.

  김일성이 볼 때 이것은 인민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멀리 앞을 내다보는 장군이었으며, 이 8,000명 미군의 전사는 인계 철선의 역할을 하였다. 비록 맥아더 장군이 저지른 일이기는 하지만 미군 8,000명이 전사하였다. 수천명의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사한 한국은 혈맹이며, 이제 한국 전쟁은 미국인에게 더 이상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었다. 7.8일부터 15일 사이에 제 25사단이 부산에 속속 들어왔다. 그리고 미국의 신속한 행동만큼이나 UN도 신속하게 한국전 참전을 가결하였으며 7월 14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 지휘를 UN군사령관에게 위임했다. 미군은 이렇게 해서 56,000명이나 죽은 것이다. 그들 중 대다수는 한국인의 생명을 지키는 인민군 총알받이가 되기 위해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으니 그들이 부산을 사수하는 동안 맥아더 장군은 9.15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속전 속결의 승리를 거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명장이다. 그러나 수만 명이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하며 미국의 반전 여론이 높은 가운데도 끗끗이 그의 인천상륙작전을 밀고나가 한국의 국토를 되찾아준 맥아더 장군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언제까지나 명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미군 병사를 환영하는 이라크 국민들

2003년 이라크 전쟁의 특징은 여군의 전투 참가였다.
8일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에서 동쪽 거리를 순찰하던 영국군 제2 탱크연대 소속 여군이
한 이라크 인이 건넨 꽃을 받아들고 있다.【바그다드=로이터 뉴시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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