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 칼럼
오디오 설교 김대령 에세이 황효식 칼럼 학술ㆍ생활 정보 추천 사이트

 

윤상원 혁명가와 5.18 광주 사태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기자 자격을 두번이나 박탈당했던 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가 518 사태 당시 광주에서 직접 목격하고, 사태 증인 및 관련자들과 일일이 면담해서 얻은 결과를 토대로 공정하고 객관성 있게 보도한다. 그의 글 "전두환 구속은 정의를 구현하고 있나?(2)"에서 조갑제 기자는「민간인 사망자 45명 對 군경 사망자 27명」의 사실에 비추어 학살이란 표현은 비과학적임을 지적한다. 오발 사고로 죽은 군경 12명을 빼도 「민간인 사망자 45명 對 군경 사망자 15명」은 민간인 대 군경 피해자 비율이 3:1 임을 나타낸다. 총기를 난사하는 폭도들로부터 광주 시민들을 구하는 작전을 위해 군인들도 무릅쓰고 진압 작전에 나설 수밖에 없다. 무기를 자진 반납할 기회를 일주일이 넘게 주었다. 그리고 당시 상황은 만일 우리 군이 진압 작전을 며칠만 더 늦추어도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당시 시민들이 모르고 있던 사실, 정부가 발표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인민군 병력이 휴전선에 총집결하여 남침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김일성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내항해 있었다. 당시 언론은 이 특종 기사를 무척 보도하고 싶어했었으나 정부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 전쟁 발발 위험 소식이 나라 경제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 보도하지 말자는 것이 신군부의 입장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그때도 전쟁이 나건 말건 운동권 학생들을 선동해서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신군부는 미 항공모함 입항이라는 특종 기사가 나가면 분명 여론이 자기네 편에 설턴데도 나라 경제를 먼저 생각했다.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이 최규하 정권 실세로 등장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장군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보직 해임시겼을 때 정 장군이 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는지 물어보는 것은 합수부장의 임무였다. 국법은 보안사령관의 인사권은 대통령한테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 10월 1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현장 가까이 있었던 정 총장이었기에 그 의혹을 확인하는 것은 더욱 합수부장의 책임이었다. 이 쌍방간의 충돌에서 정승화 장군편 장교들이 자진해서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 것이 12.12 사태였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장군이 제4공화국 실세로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국민의 공복이라는 것이 그의 지도자 스타일이었다. 장성이었을 때 그는 우대받으려 하지 아니하고 항상 맨 앞에서 뛰었다. 그는 국민의 공복으로서의 군인의 자세를 매일 아침 맨앞에서 보여 주었기에 그의 부대에는 새로운 군기, 국가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이 있었다. 그는 결코 김대중 선생처럼 언론 플레이를 할 줄 모르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그를 안다. 그는 권위주의자였는가? 아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명령으로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당선되었을 때 여전히 그의 모습은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쓰는 대통령의 모습이다. 그것이 그의 삶의 철학이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은 그를 존경하고 신뢰한다.

  흔히 정승화 장군을 동정하기 때문에 12.12 사태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는 오류가 있다. 때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계엄 천하이다. 계엄 천하에서는 경제를 비롯한 국정 운영의 실질적 권한이 정부에서 계엄사령관에게로 집중된다. 계엄령이 선포된 국가는 군정(軍政)과 유사한 비상 체제로 운영된다. 이것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라. 해방 후 일본에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군정이, 한국에는 하지 중장이 이끄는 군정이 실시되었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정치 법제와 경제 정책에 밝은 맥아더 장군과 달리 하지 중장은 정치와 경제에 문외한이었다. 하지 중장은 전쟁터에서는 용맹한 장수였지만 군정에 더 중요한 것은 경제 정책이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나라는 해방 후에도 일본보다 불리한 출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승화 장군 역시 좋은 분일지 모르나 그의 학력은 국졸이었다. 1980년 5월 31일 설치된 국보위는 그 난세에도 불구하고 두 달만에 몇년 앞을 내다보는 휼륭한 경제 정책을 세웠다. 둘째로, 이런 경제적 위기 관리 능력 외에도 신군부에는 군 통솔 능력이 있었다. 정승화 장군은 좋은 분일지 모른다. 그러나 12.12 사태 이전의 군대에는 많은 부조리가 있었다. 똑같은 군복무를 하여도 부대마다 사병에게 배식되는 식단이 달랐으며, 많은 구타가 있었다. 그러나 12.12 사태 이후 군의 부조리는 사라지고 구타도 많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사기도 높아졌다.

  12.12 사태에는 전혀 집권 시나리오가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장군이 재4공화국 실세로 떠오른 가장 큰 원인은 양김씨가 제공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1월에 취임하시면서 일년 안에 개헌을 하고 대선을 실시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하셨다. 돌이켜 보면 국부 박정희 대통령을 잃은 슬픔이 온 나라에 얼마나 컸던가! 아직 국민들이 박정희 대통령께 조의를 표하는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양김씨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무조건 3개월 이내 하야하라고 요구하였다. 정권 이양은 이사짐 싸는 것과 다르다. 정권 이양의 근거를 마련할 개헌도 필요했고 대선도 실시하여야 했다. 이점에서 이런 절차도 무시하고 청와대 주인이 되려 했던 양김씨의 행동은 분명 헌법에 위배된다. 그리고, 날마다 학생들을 거리에 몰아 화염병 던지며 데모시키니 지지 기반을 잃은 대통령에게 무슨 실권이 있었겠는가?

  전두환 장군은 전혀 정치적 야망이 있는 어른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국민의 심부름군이었다. 처음에는 최규하 대통령도 양김씨가 후계자가 될 것을 계획하셨으나 광주 사태 현장을 다녀오신 후에 전두환이 새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굳히셨다. 광주 시민과 폭도들이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소리를 들으신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하시면서 전두환 장군께 대통령 취임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하셨다. 언제나 자신을 국민의 머슴으로 생각했던 전두환 장군은 황당해 하였다. 그는 새로운 지도자의 위치로 떠밀려 왔으며, 시대는 새로운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다시 한번 국민의 종복의 역할을 하는 사명에 복종하기로 하였다. 취임 후 너무도 황송해 한동안 청와대 소파에서 취침하였을 정도로 그는 정부 각료와 군부 장교들의 추대에 떠밀려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전혀 변명을 안하는 독특한 분이시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국민의 공복으로서의 진정한 군인 정신을 그에게서 본다. 국민의 심복은 국민을 섬길 뿐 전혀 명예를 구하지 않는다. 욕을 하면 욕을 먹으면서 늘 머슴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전두환 대통령의 철학이다. 우리는 1995년에 감옥에서 17일째 단식하던 전두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는 단식을 이유로 링겔 주사마저 거부하셨다. 이것이 언론 플레이를 하는 김대중 선생과 전두환 대통령의 차이점이다. 그러면 물어보자. 도대체 5.18광주 사태와 전두환 대통령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엉터리 변호사 노무현은 아무리 그가 돌파리 변호사이기로서니 왜 1989년 청문회 때 전두환 대통령께 명패를 집어던지는가?

  엉터리 변호사 노무현은 취임하자마자 한총련 합법화, 양심수 석방, 보안법 철폐 등을 서두르는데 비해 전두환 대통령의 통치 철학은 사회 기강을 요구하였으므로 군사 독재라는 비평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사회를 유지하는 것을 체제라고 한다. 그런데 자유 민주주위 국가도 공산주의 국가도 그 체제가 무너지면 전복된다. 1975년에 월남이 왜 하루 아침에 공산화되었는가? 보안법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에 왜 하루 아침에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이 전복되었는가? 사회주의 국가의 정체성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엉뚱한 짓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넘지 못할 선이 사회적 규범과 정부 법령으로 정해지게 된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보안법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 기강을 분명히 요구하였다. 왜? 무한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보안법을 폐지시키려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 방법으로 남한 체제를 무너뜨리려 하는 김정일에게 속아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청문회 때 노무현이 전두환 전 대통령께 명패를 던졌다. 노무현은 착한 사람이라 던지고 전 대통령은 나쁜 사람이라 맞았는가? 아니다. 미국 사람들의 시각들의 시각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편견을 벗어버리는데 도움이 된다. 1980년 9월 1일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신 전두환 각하를 초청한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그에게 특별 예우하였다. 오히려 오늘날 노무현을 미국 정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본다. 신용은 말장난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의 삶에서 배어나는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기가 말한 바를 분명히 지키는 것을 국민은 보아왔다. 그런데, 그의 행적에도 합수부장 시절에 옥의 티는 있었다.

  물론, 우리가 합수부와 계엄사는 전혀 지휘 계통이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우리는 1980년 7월 4일 계엄사에서 김대중을 학원 소요 및 광주 민중 항쟁 배후 조종과 내란 음모 혐의로 군법 회의에 회부하였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에게 "학원 소요" 혐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오늘날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직업적 데모군을 양성하는 전문가였다. 그러나 "광주 민중 항쟁 배후 조종" 혐의는 절반만 사실이다. 그해 5월 16일 김대중 선생이 배후 조종하는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연석회의가 오후 6시에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렸다가 일부 운동권 학생들은 당국에 검거되었다. 경찰이 덥치는 현장을 용케 빠져나온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은 다른 두 운동권 인사와 더불어 광주의 공산주의 혁명가 윤상원을 찾아가 은신처를 요청했다. 그 자리에서 윤상원은 그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박관현을 유혹하였다.

  그럼 여기서 당시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조갑제 기자의 글 세 단락을 이용해 보자:

  서울지검의 95년 7월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백93명이다. 민간인은 1백66명, 군인23명, 경찰관 4명이다. 이 통계에서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부분은 군경 사망자 27명이다. 요사이 여권과 일부 언론은 「광주학살」이란 표현을 쓰는데 군경사망자 27명이란 숫자는 「학살」이란 단어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학살」이란 용어는 보통 非무장의 사람들을 무장집단이 일방적으로 죽이는 것을 가리키는 데 광주사태에선 <민간인 6 對 군경1>의 비율로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학살」 은 非과학적 표현이다. 군인 사망자 23명중 12명은 상호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자로서 시민측의 공격에 의한 순수 군경 사망자는 15명이다.

  1988년 민화위(民和委) 증언에서 소준열(蘇俊烈) 당시 全南北 계엄 분소장은 『민간인 사망자의 검시 결과 군인이 사용한 M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이었다』고 말했었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민간인 사망자 45명 對 군경 사망자 15명」즉 3대1의 비율이 된다. 기자가 시민측 입장에서 바라보던 광주사태를 공수부대 입장에서 취재하기로 한 것은 1988년에 접어들어 민주화의 물결에 따라 언론자유가 만개하기 시작할 때였다. 광주사태 8년째가 되는 그 해 5월29일 오전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앞에는 30代 청년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광주사태 부상자들이었다.

  20사단 출신 이명규(李明珪)씨는 5월27일 새벽 광주로 진입하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공수11여단 출신인 金東哲·경기만(慶箕萬)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김은철(金殷鐵)·배동환(裵東煥)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동료들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났다.1980년 중반까지는 특전사와 육본에서 신경을 써주고 화환도 보내주곤 했는데 그 뒤로는 참배객도 수백명에서 수십명으로, 다시 수명으로 줄러들었다. 그 열흘 전 광주 망월동 묘역에 모여들었던 수만 인파에 비해서 이곳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국가와 軍이 먼저 그들을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http://column.daum.net/Column-bin/Bbs.cgi/savekorearbs/qry/zka/B2-kB23q/qqatt/^ >>

  그럼 광주의 공산주의 혁명가 윤상원은 왜 시민군을 조직하며 그처럼 군민 양편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는 시가전을 일으킨 것일까? 임낙평(전남 사회문제 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광주 항쟁 기념 윤상원 열사의 삶과 투쟁"(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4.html )은 그의 폭동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씌어진 글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 폭동의 성격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발견한다.

  1. 광주 사태는 순전히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윤상원이라는 공산주의 혁명가가 계획하여 주도한 사태였다.

  2. 이 문건은 윤상원이 시민들에게 화염병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음을 입증한다. 경찰과 군인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것은 과잉 시위이다. 이 문건 외에도 과잉 시위가 먼저였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자료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과잉 진압이 먼저였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자료를 5.18측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3. 윤상원은 수십 만명의 광주 시민을 시위에 동원하기 위하여 19일부터 유인물을 만들었다. 광주 사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윤상원과 그의 좌익 패거리들이 선동한 사태였음을 이 문건은 입증한다. 그 유언비어 전단에‘전두환 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 나가자'는 표어가 있다. 그런데, 전두환은 일반 시민들에게는 미래의 인물이었다. 가장 정통한 군사정권 논객 김동길 박사도 그 당시 아직 듣지 못한 이름이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이 똑똑하고 지도력이 있으므로 지도자로 추대될 것은 아직 미래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시점에서도 합수부가 계엄사 병력을 동원할 수 없음미 분명한데 광주의 윤상원은 어떻게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었으며, 무슨 근거로 그가 살인극을 벌였다고 하는가? 당시 광주에는 이백 명 정도의 계엄군이 있었는데 시민군의 장갑차에 군인들이 무참히 깔려 죽고 수십만 명의 몰려드는 폭도들을 피해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것이 21일이었다. 진압 작전을 위해 20사단이 투입되어 시가전이 일어난 것은 27일이다. 19일은 아직 계엄군에 의한 시민군의 피해자는 없던 시점인데, 무엇을 근거로 "전두환 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인가?

  4. 김대중 선생 추종자들이 민주화 운동이란 미명을 붙였으나 그 본질은 반역 모의인 투쟁 지도부 명단: 윤상원을 필두로 김영철, 정상용(한국회 의원) 이양현(현 한겨레신문 지사장) 박효선 (현 극단 광대 대표) 정해직(현 교사 운동가) 윤강옥(현 오월 동지 회장)김상집.

  5. 민주화 운동을 자처하면서 도청을 점령하였다는 말을 쓰는 것은 스스로 폭도들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21일 이백 명의 계엄군 중 살아남은 자들과 부상병들이 수십 만명의 시민군의 공격을 피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자 폭도들은 광주에 해방구를 선포하였다. 말하자면, 광주가 대한민국 시가 아니라 독립된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었는가? 이것이 시민들의 합의에 의한 민주화 운동인가? 아니면, 남파 공작원들의 사주를 받은 윤상원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는가?

  6. 당시 속칭 온건파로 불리던 시민 수습위나 학생 수습위는 무기 반납을 제안하였는데 윤상원은 묵살하였다. 다수의 의견은 무기 반납인데, 윤상원이 다수의 의견을 무시한 것이 민주화 운동인가? 그는 무슨 베짱으로 다수의 의견을 묵살하였는가? 그의 배후에 북한 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7. 5월 23일에 윤상원의 폭도들이 개최한 "민주 수호 범시민 귈기 대회" 에서 "전두환 처단 계엄 철폐"를 외쳤다. 그런데, 그때 당시 "전두환"은 아직 시민들이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미래의 인물인데, 단지 그가 미래에 한국을 이끌 영도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이유로 "전두환 처단"을 외친다는 말인가? 당시 휴전선 일대에 인민군 병력이 총집결해 있는 상황임에도 김대중 선생이 전국 대학가에 소요를 일으키시니 계엄이 전국 확대된 것이었다. 어떻게 윤상원이 일개 시민으로서 국가를 상대로 "계엄 철폐"를 요구한다는 말인가?

  8. 전남대 정치학과를 중퇴한 노동자 윤상원을 제외하고는 다수가 노동자, 무직자, 십대 청소년들이었던 이 폭도들이 24일 평가 모임에서 향후 투쟁 목표로 최규하 정부의 퇴진을 추가하였는데, 대한민국 헌정 질서에 대한 이 반역 행동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9. 아래 두 인용구는 윤상원 일당의 폭동이 처음부터 반미 운동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것을 드러냄으로 그 배후에 북한 세력이 있었을 의혹이 있다.

  <<이즈음 윤상원을 비롯한 투쟁 지도부는 미국의 개입, 즉 미 항공모함의 내항, 미국의 동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논의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살육 만행을 묵인 방조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지만 한편으로 전두환 일파가 군을 장악하지 못했다고 보고 미국이 살인 군부에 지지를 보낼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인민군 병력이 휴전선 일대에 집결하였으므로 미 항공모함의 내항하였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와 신군부는 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언론 보도의 자제를 요청했었다. 시민들은 커녕 지식인들조차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일개 노동자 윤상원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가? 북한과의 무선 교신으로 알았는가? 아직 시민들이 전두환이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때에 윤상원은 함수부장 전두환 장군에게는 계엄사 병력 통솔권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전두환이 발포 명령자였다는 유언비어를 조작한 것은 모순이지 않는가?

  <<당시의 시민 대중들은 친 미 반공 의식에 젖어 있어 반미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 항공 모함의 입항을 전두환 군부의 견제로 해석해 대자보나 궐기대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이 살인 군부의 만행을 저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었다. 윤상원 등 일부는 광주 주재 미국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때 그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위의 이 인용구는 윤상원의 폭도들이 시민들에게 반미 감정을 심어주기 위해 여론을 조작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 계엄군이 27일 최소한의 희생을 각오하고 용감하고 효과적으로 이 폭동 진압 작전을 펴지 않았으면 이들은 광주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을 인질로 삼으려고 했다. 이들은 나라를 북한에 바치기로 작정하였는가? 그리고 설사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윤상원의 폭도들에 의해 외부와의 교통과 연락이 일년 이상 지속된 광주시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윤상원 폭도 일당이 김대중 골수 추종 세력이었든 아니었든 이들이 광주를 너무 오래 점령하고 있는 것은 결코 광주 시민들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진대, 이 폭도들로부터 광주 시민들을 구해내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 용감히 진압 작전 임무를 완수했던 대한의 장병들에게 우리는 이제라도 고마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광주 시내 여기 저기에 방화한 폭동 주동자 윤상원 일당과 방화범들은 시민들이 사건의 전후 관계를 알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유언비어 삐라로 군중 심리를 선동하기 위해 광주 시내의 모든 방송국들에 불을 질렀다. 폭도들이 광주 MBC 방송국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한 시간은 5월 20일 오후 8시 10분이었다.

윤상원 폭도 일당은 죄수 3,000명이 있는 광주교도소를21일부터 23일까지 습격하였으나 광주 시민을 보호하려는 군인들이 끝까지 용감하게 폭도들을 막아 싸웠다.
시위대 MBC에 화염병 투척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황효식 목사 칼럼 김대령 목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