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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2월 21일 

김대중과 전두환과 김영삼 세 대통령의 이상한 인연

   역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에 오르게 한 이는 김대중 선생이었다. 기록을 따른다면 전두환 장군에게 대통령직 인수 준비를 명령한 이는 최규하 대통령이요, 최 대통령 정부 각료들이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런 환경을 조성한 이는 김대중 선생이었다.

   518측에 의해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광주사태는 본래 김대중 대 전두환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김대중 대 최규하 대통령이었다. 1980년 봄 내내 김대중이 선동한 대학가 시위는 최규하 대통령 하야 요구였다. 5월 18일 이전에는 전두환이라는 이름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 신현학 등 김대중 홍위병들이 유신잔당이라고 부르며 퇴진을 요구하던 정치 인사들의 명단에 김대중이 전두환을 추가시킨 것은 518직전이었다. 광주시민들에게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라는 구호를 외치게 하였던 윤상원조차도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5월 18일 아침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은 윤상원에게서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최규하 대통령 하야 요구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최대통령은 광주시민에게 하야를 약속하였다. 그러면 본래 양김씨 중 하나에게 대통령직은 인계하려던 최규하 대통령이 왜 광주사태 이후 마음이 바뀌어 전두환 장군에게 대통령직 인수 명령을 내렸을까? 그것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환경을 김대중 선생이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22일은 김대중 선생이 강제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기 위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이 계획은 김대중 홍위병들이 극비에 추진하고 있었으며, 5월 16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그 모의를 하던 홍위병들 중 몇명이 경찰에 검거되고 나서야 우리 정부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 정부보다 훨씬 먼저 김대중이 민중봉기 계획을 알고 있던 북한의 김일성은 북한군 총병력을 휴전선에 집결시키고, 김대중의 거사가 성공하여 전국적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날 시각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군의 남침 작전을 인공위성으로 포착한 미국은 급히 항공모함을 부산으로 보내면서 우리 정부에도 북한군의 동향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 비상시국에 부랴 부랴 소집된 것이 5.17임시국무회의였으며, 밤샘 회의 끝에 정부는 5.18 자정을 기해 야간통행금지를 전국으로 학대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하였다. 그러나 행여 국민이 불안해 할까 보아 정부는 언론사들에게 북한군 동향과 미 항공모함의 입항 사실을 보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커뮤니케이션이 한 나라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만일 북한군이 휴전선에 총집결하였기 때문에 5.18 긴급조치가 불가피하였다는 상황이 보도되었더라면 광주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간통행을 금지하는 등의 5.18조치를 광주 운동권은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오해하였다. 그리고 이에 항거하여 경찰서를 파괴하고 경찰에게 폭행을 가하는 폭도들을 정부가 불순 세력이라고 부른 것이 광주 시민을 더 자극하였다. 그러나, 정부로서는 당시가 북한군의 남침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말할 수 없었다. 만일 그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 한국 경제는 회복될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왜 광주사태 직후 왜 최규하 대통령은 양김씨가 아닌 전두환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인수할 결심을 하였는가? 김대중이 민중봉기를 일으킨 것은 김영삼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집권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연일연야 과격시위가 끊이지 않던 당시 남한의 이런 상황이 남침을 위한 호기라고 여겼다. 그리고, 북한군을 휴전선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최규하 대통령은 세가지 도전에 부딪쳤다. 당시 정부가 국민에게 알릴 수 없었지만 석유 수입이 어려웠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로 달려가서 석유 외교를 하던 최규하 대통령은 한국이 전쟁 발발 일보 직전이라는 비상 시국 때문에 귀국 예정일을 앞당겨 귀국하여야 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대통령이 작전 지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엎친데 덥친격으로 광주사태가 터졌다. 그리고 시위군중의 구호는 최규하 대통령 하야였다.

   그처럼 국가 안보가 최우선인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감은 누구인가? 북한군의 남침을 억제할 지도력을 가진 자였으며, 그런 지도력은 양김씨에게 없음을 최대통령은 내다 보셨다. 그리고 그런 공감대는 국무위원들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비록 정부는 북한군의 동태를 보도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전쟁 위기감을 국민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전두환 장군이 당시 상황에서는 대통령직 적임자라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었으며, 그 환경은 전쟁 위기를 자초한 김대중 선생이 제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의 후임인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씨를 후임으로 내정하여 문민정부가 출발하였다. 그런데, 김대중에게 대통령이 될 기회를 열어준 이는 바로 김영삼씨였다. 실로, 이것은 이상한 악연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에서 가장 얄미워하는 사람은 김대중이다. IMF 사태는 1986년에 당시 국민회의 의장이던 김대중이 노동법 통과를 온갖 수단으로 방해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1997년 가을에 기아자동차 노조를 선동하여 파업을 장기화시켰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IMF 사태의 책임을 김영삼씨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기는 IMF 사태 해결사라고 자처하니 분통이 터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그토록 얄미워하는 김대중에게 대통령이 될 길을 열어준 이는 김영삼씨 자신이었다. 요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 법치의 형평성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정치자금으로 따진다면 김대중이 전두환 전 대통령보다 몇갑절 더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김대중의 부정한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떳떳한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수사를 하는가?

   전두환 전 대톨령의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는 처음 김영삼씨가 지시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김영삼씨가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한밤중에 체포하게 하였다. 그때가 언제였는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여전히 지도자로 모시는 정치인들이 신당 창당을 발표하기 전날이었다. 이런 김영삼씨의 꼼수 때문에 신당 창당은 무산되고, 신당 창당을 위해 보관되었던 정치자금을 강제로 빼았았으며, 대통령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사용했던 모든 정치 자금도 벌금으로 때렸다.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김대중이 개인의 부를 늘리며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한 정치자금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한 정치자금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김대중의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 수사를 하는 노무현 정권은 법의 형평성을 모독하는가.

   처음 김영삼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사태 진압작전과 관련이 있다는 누명을 씌웠다. (북한군의 님침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사태를 진압한 것이 공인지 죄인지는 역사가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자.) 여하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광주사태 진압 작전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사실이 자기 검찰 수사로 명확하게 입증되자, 당황한 김영삼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과거에 받았던 모든 정치자금을 소급하여 회수하도록 조종하였다. (본래 민주주의에서는 사법이 행정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는데, 김영삼씨는 민주주의의 ABC 도 몰랐던 듯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다시는 신당을 창당하지 못하도록 정치자금원을 뿌리채 뽑은 김영삼씨는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그리고, 그가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한 그 과오가 그의 정치적 숙적 김대중에게 대통령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양김씨의 관계는 참으로 이상한 악연이었다. 이렇듯 김대중과 전두환과 김영삼 세 분의 전직 대통령은 서로 이상한 인연으로 얽혀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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