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찬반 토론을 위한 시사칼럼
오디오 설교 김대령 에세이 황효식 칼럼 학술ㆍ생활 정보 추천 사이트

    2004년 4월 25일 

친일 선봉에 선 김희선 의원의 친일청산법

   독립군 딸임을 자처하는 열우당 김희선 의원이 친일청산법 제정과 개정의 총대를 메었다. 그러나, 그녀가 독립군 딸임을 자처할 근거는 있는가? 아직 그녀의 부친 소속에 대하여 명확히 공개된 것은 없어 보인다. 다만 김희선이 2001년에 만주독립군 위령탑을 국립묘지에 설치하려 했던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만주독립군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는 부대의 정체는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들을 말한다. 그러면,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이 독립에 기여하였는가? 아니다. 오히려 독립을 방해하였을 뿐이다.

   여기서 모택동과 조선의용군의 관계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2차대전 후에 모택동의 공산군이 중국 장개석 총통의 정부군보다 유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첫째로, 모택동은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당시 중국 인구 대다수가 농민들이었기에 그런 반쪽 거짓말이 잘 먹혀 들어갔다. 둘째, 모택동의 공산군은 정부군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싸웠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런데, 모택동의 공산당 팔로군에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이처럼 모택동이 1949년 10월 중국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12월에 장개석 총통의 중국 정부가 대만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 조선의용군의 역할이 있었다. 지금도 중국 건국 기념일에 부르는 공산군 군가도 조선인이 작곡하였을 만큼 조선의용군은 모택동에게 이용가치가 높았다. 군자금을 본토 조선인에게서 뜯어오는 의용군이니 봉급을 줄 필요도 없었으나, 팔로군 소속이니 모택동이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던 거처럼 선전할 근거도 생겼다.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지 일년만에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았을 때 모택동이 비록 그것이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할 위험이 있더라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과거에 조선의용군에 진 신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중국에서 조선의용군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막기 위해서 일본군과 싸웠는가? 아니다. 일본군의 중국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따라서, 모택동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의용군은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독립군이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항하여 싸웠기에 중국 독립군이었으나, 신분이 조선의용군이었기에 우대를 받을 수 없었던 중공군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모택동을 도와 중국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무기를 들었던 아니면 중국에 일본이 침략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든 간에 그들을 우리 민족의 독립군이라고 부르기는 좀 애매 모호하다.

   그런데, 모택동에게는 항일 투쟁의 명분으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던 조선의용군이 실제로 일본군에게 입힌 타격은 지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일본의 패망 당시에도 일본 지상군은 건재하였었다. 단지 해전에서 미국에 패하였고 원자폭탄 투하에 굴복하였을 뿐이었다. 1945년 8월에도 미군과 러시아군이 협공하여도 일본 지상군과의 전투에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판단을 미국과 러시아가 모두 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쪽으로부터 일본군을 공격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에 스탈린은 들을 듯 말 듯 미국을 애타게 하여 엄청난 군수원조를 챙기면서도 선뜻 참전하지 않다가 일본이 항복하기 한 주전에야 일본에 선전포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후에도 우리 독립군에게는 일본군을 해산시킬 힘이 없었다. 미군이 1945년 9월에 입국하여 조선총독부를 해체하고 일본군을 해산시킨 후에야 우리 민족은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희선 의원이 독립군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영영 독립하지 못할 뻔하였다. 우리 민족의 해방은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 의거한다. 그 날 삼상회담에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과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차 대전 후 독립시킬 수십 개 국가들의 명단을 심사하고 있었다. 만일 그때 삼개국 정상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였더라면 한국 독립안은 부결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장개석 총통이 조선의용군이 모택동의 공산군 편에 붙어 있었다는 사실만 감안하였더라면 십중팔구 카이로 삼상회담에서 반대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상해임정의 광복군이 있었다. 사실 광복군은 유명무실하였다. 1940년에 비로소 광복군총사령부가 창설되었으나 창군 1년 후 병력수가 겨우 300명이었다. 그나마 그 병력을 유지할 군자금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본토에서 모금된 독립군 군자금을 중국 공산당군과 러시아군 소속 의용군들이 독점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여하간, 유명무실했던 광복군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적은 한번도 없었으나 중국 장개석 총통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았다는 데에 큰 퓽품?있다. 즉, 광복군을 봐서라도 장개석 총통은 한국의 독립을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희선 의원이 중국 공산당 소속 조선의용군이 독립군이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 조선의용군 때문에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독립안이 부결될 뻔한 위험을 초래하게 한 것이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사실, 독립군이 우리 민족 독립에 기여한 것은 미미하다. 러시아 붉은군대 소속 조선인 부대도 해방 후 러시아군이 북한을 점령할 명분을 주었을 뿐 독립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우리 민족은 항일운동가 이승만의 외교로 독립하였다. 해방 후 미국이 이승만씨를 후원했던 것도 카이로 회담 성사에서 그의 외교가 큰 몫을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다른 식민지 국가와 달리 한국은 한일합방 문서 때문에 일본식민지로부터 해방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우리 민족은 전쟁에 패배하여 일본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한일합방 문서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은 불가능하였다. 카이로 회담 이전까지는 국제사회는 한반도가 일본 영토라는 일본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세계지도에서 한반도는 일본 영토로 표시되어 있었으며, 서구인들에게 한국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나, 상해임정 시절의 이승만씨의 외교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억지 논리를 무너뜨렸다. 즉, 독립군의 승리가 아니라 외교적 승리로 우리 민족이 독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외교적 승리로 우리 민족이 해방과 독립을 안겨준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 가려는 김희선 의원의 주장과 열우당의 꼼수는 정당한 것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일파 선봉에 누가 서있는가? 바로 김희선 의원이 아니던가? 열우당이 구한말 조정 대신들을 친일파 명단에 포함시킬 때 그 모순은 그분들이 열우당 의원들보다는 훨씬 더 애국자였을 가능성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민영환처럼 을사보호조약 후 자결한 신하들도 있었다. 그리고, 누가 신하였든 1894년 동학혁명으로 인해 군부 지휘권이 일본군에 넘어가기 시작하고 국가 채무로 경제 주권마저 넘어간 상황에서 그 누가 조정 신하였다 하더라도 정치주권을 지켜낼 뾰족한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100년전에 우리민족이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는가? 바로 김희선 의원과 노무현과 열우당의 친일 정신 때문이었다. 그들은 경제적 친일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을 일본의 경제 속국으로 만들려는 일본인의 전략에 충성하고 있다. 동학혁명으로 인해 1894~1895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예상을 깨고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였을 때 세계는 깜짝 놀랐다. 그 이후 지금껏 중국 대국은 섬나라 일본에 겁을 먹고 있다. 덩치로는 일본이 중국의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붙어보니 중국은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을 연구한 중국이 장쩌민과 후진타오 등 이공계 출신들을 국가 지도자들로 내세우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중국은 본래 유학의 나라였다. 그런데, 유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손으로 하는 일은 천대를 받는다. 그래서 공장 기술을 천대하였던 중국은 일찍 서양 문물에 접하면서도 산업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교 문명 후진국이었던 일본에서는 공장 기술자를 천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 산업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공업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래서 일본을 얕보던 청나라는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도올 김용옥은 유학이 대단한 것처럼 떠들지만 중국에서는 유학을 배격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실용주의 정책을 본받는다. 유학이 왕성하다는 것은 이공계에 대한 멸시를 의미하며, 이공계에 대한 멸시는 중국 발전의 원동력을 상실하게 됨을 그들은 이제나마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유학자의 긴소매를 벗어버리고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전사 정신을 배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이 한국 식민지 정책이 무엇이었던가? 청일전쟁에서 그들이 승리했던 원인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일제 시대 때 조선인에게 동양학이나 문학 등의 학문 분야에는 얼마든지 진출할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과학을 공부하거나 전문 기술을 익힐 기회는 닫아버렸다.

   우리나라는 김희선 의원과 노무현과 열우당의 당파싸움 정신 때문에 백 년 전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 유학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였을 때 그 문제는 국가건설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선비 문화는 예로부터 군인과 기술을 천대하는 문화였다. 그들은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관념론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자기네와 관념론이 다른 당파를 권모술수로 척결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국가건설에 아무 관심이 없이 각자의 유교적 관념론을 위해서만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 것이 당시 선비들의 정치였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오늘날 열우당의 모습이 아니던가.

   한국의 사이비 민주화 운동은 유교적 선비 문화와 관계가 있다. 김영삼씨 집권을 가능케 한 어록에 "군인은 정치를 하면 안된다"가 있다. 한국전쟁 때 요리 저리 병역 의무를 피해 다녔던 김영삼씨가 군인이 아닌 것 못지 않게 1963년 여름 박정희도 전역하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분명히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이었으며, 미국에서도 장성 출신 대통령이 많이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은 정치를 하면 안된다"라고 김영삼씨가 말하였을 때 그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선비 문화의 가치관을 말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조선시대에 살면서 민주주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왕적 권위가 한국 경제를 무너뜨렸다. 여전히 농경시대 경제관에 머물러있던 그는 수십 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예산을 농업개발에 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계획 없는 지출은 농가를 손해보는 사업에 끌어들여 부채더미에 앉게 하였다.

   사람들은 1987년 6월에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이 조선시대의 선비 문화로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산업전사로 불리던 이들이 바로 그 무렵부터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리기 시작하며 무시당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화이트칼러를 선호하였으며, 푸른 제복은 괄시받았다. 그래서 이공계 학문은 쇠퇴하고 인문계가 팽창하였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혁명이 일어난지 꼭 10년만에 IMF 환난이 닥쳤다. 무엇이 IMF 환난이 요구한 구조조정이던가? 그것은 기업에서 인문계의 과잉 인원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구조조정을 거꾸로 하였다. 대우 김우중씨가 동구 여러나라에 자동차 생산회사들을 설립하였던 것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술 자립이었다. 현 생산 구조에서는 자동차 부품을 영구적으로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구에 자동차 생산회사들을 설립하면 한국이 부품 기술 자립을 할 수 있다. 동구는 제품 생산을 못할 뿐이지 순수과학과 공업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인 나라들이다. 애석하게도 그 공장들을 다 지어놓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을 때 IMF 환난의 타격을 받았다. 당시 대우는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비밀송금한 외화이면 일시적 유동성 위기로부터 회생시킬 수 있었는데, 김대중은 김우중씨가 동구에서 이룩한 기술 자립의 천문학적 가치에 무지하였던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일본의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드는 정책은 영구적으로 기술을 일본에 의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만일 일제시대 때 조선인에게도 동등한 과학 탐구의 길을 열어놓았더라면 해방 후 일본과 한국은 동등한 산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책적으로 일본은 조선인이 과학을 탐구하는 길을 막았다. 그래서 지금도 부품의 일본 기술 의존도가 높은 한국 수출이 결국 일본을 대신해서 일본 상품을 수출해 주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한국 과학 수준이 높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가 일본 육사 시절 포병 병과를 선택하여 화학과 물리학 등 분야의 과학 연구에 정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 박정희는 일본 기술 의존으로부터의 완전 자립 목표를 세웠던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무엇이 유신 경제의 목표였던가? 그것은 지속적인 산업 발전으로 1990년까지 한국이 완전기술자립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만일 조선시대의 유고적 선비문화가 여전히 한국 정치를 지배한다면 한국은 발전할 수 없다. 박정희 시절에는 이공계 대학은 물론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산업전사가 되어 국가건설에 이바지하는 꿈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배가 고파도 선비는 기술직 종사는 안 한다는 조선시대 사고가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한국 사회에 재현되었다. 그러나 실업자는 늘어나는데, 수출산업들은 일손이 없어 문을 닫거나 해외로 이전해야 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인가?

   무엇이 일본이 한국을 영구적으로 식민지 만드는 전략이었던가? 그것은 영구적으로 일본에 기술 의존을 하는 나라를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미국이 해방시켜주었더니 미국에서 원조해준 외화를 한국은 일본 기술에 의존하기 위하여 일본에 지불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경제적 친일인가? 바로 김희선 의원처럼 한국을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로 만드는 전략에 충성하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건설에, 그리고 우리 민족의 기술 자립에 충성하였다. 그리고, 김희선과 열우당은 이렇게 우리 민족의 경제적 주권을 보존하신 어른들을 친일파로매도하여 척결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일파는 과연 누구인가?

역사학도    
www.study21.org   

황효식 목사 칼럼 김대령 목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