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토론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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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3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독재자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1963년부터 1992년까지의 30년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30년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30년이었으며, 이 30년 때문에 국제 무대에서 한국인의 위상은 치솟아 올랐다. 1963년 한국의 청소년들은 "헬로우, 헬로우 먹던 것도 좋아요"라는 노래를 불렀을 만치 미국인, 특히 미군 병사들에게서 초콜릿을 얻어먹고 싶어했다. 그 시절 한국의 청소년들은 러시아를 거대한 제국으로 바라보았다. 1992년에 러시아 청소년들은 한국을 잘 사는 나라,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성한 선진국으로 바라보며 선망하였다. 이토록 이 30년 간에 한국인의 위상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이 한강의 기적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30년이었다. 해방 후 1960년대 초까지 미국은 마샬 플랜으로 전 유럽에 지원한 무상지원의 두배가 넘는 지원을 한국에 해 주었다. 유럽에서의 마샬 플랜이 단기간 지원이었던데 비해 한국국가 재정의 70%를 미국이 부담하는 무상지원이 어느덧 20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서독 등 유럽의 국가들은 빠르게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가고 있던데 비해, 한국 정부는 전혀 경제적 자구책을 세울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한 무상지원이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는 없기에 미국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였다. 전후 일본은 발빠르게 발전하였는데 한국은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만일 한국인 스스로 한국 경제를 일으키지 못하면 미국이 대신 도와주든가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그래서 국제 사회의 경제 전문가들이 한국 상황을 진단한 결과 한국은 일본과 상황이 아주 다름을 발견하였다.

   사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후 일본과 한국은 빈손에서 일어서야 하는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크게 다른 것이 있었다. 비록 일본은 전쟁에는 패하였으나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정책적으로 조선인에게는 전문적인 과학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더러 전문 기술자도 양성하지 않았다. 여기에 일본과 한국은 기술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었다. 단지, 일본에 자본이 없었는데 한국 전쟁이 일본 경제가 일어날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국전쟁 중 미국이 한국군에 지원하는 무기 등 군수물자를 미국 본토에서 수송할 수 없으므로 일본에 생산 의뢰를 하였는데, 이 시절에 일본은 경제를 재건할 자본을 마련하였다.

   1960년 초의 한국은 기술과 자본만 없는 것이 아니라, 자원도 없었다. 대부분의 영세 후진국들에는 얼마든지 수출할 수 있는 무진장한 지하자원, 천연자원이 있었다. 어떤 나라에는 원유가 있으며,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는 얼마든지 목재 수출을 할 수 있는 삼림자원이 있었다. 한국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식량 자급자족조차 못하는 영세 농업국이었다. 한국에서는 겨우 5백만 명을 위한 쌀 생산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경제 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또 한가지 요소는 시장 경험이다. 이것은 수출을 위한 경제적 전략의 문제이다. 그런데, 전혀 수출 경험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수출 노하우가 없었다. 설사 자원과 자본과 기술이 없는 한국에서 생산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국제 시장에서 경쟁하여 외화벌이를 할 수 있겠는가? 서구 국가들이 수백 년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시장경제의 노하우를 어떻게 한국인이 단시일 내에 소유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유럽에서의 마샬 플랜의 성과는 한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럴진대, 밑 빠진 독에 무한정 무상지원을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미국은 한국 경제 지원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한국 정부에 미국이 단계적으로 무상지원액을 삭감하여 1960년대 중반부터 완전 중지할 것이라는 통보를 하였다.

   그런데, 실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국이 한국 국가 예산의 70%를 무상 지원하였어도 GNP가 80불 미만이던 나라가 미국의 무상지원이 중지된 지 30년 만에 GNP 일 만 불 시대를 여는 국가가 된 것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와 같은 기적이 없었다. 1950년대에 한국을 원조하였던 방글라데시와 필립핀 같은 나라의 국민들이 이제는 한국에 하급 노동자로 취업하기 위해 줄은 선다. 한강의 기적 이전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메이드인코리아(Made-in-Korea)가 이제는 뉴욕과 워싱턴 번화가에서 당당히 상표를 내거는 유명 브랜드가 되었으며 오대양 육대주에 한국산 제품이 진출하였다.

   이 한강의 기적은 세계 경제학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이전까지는 후진국의 경제 발전에는 별 대책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기술 격차와 시장경험의 격차 때문에 후진국이 선진국과 경쟁한다는 것은 거?불가능하다. 그래서 후진국은 값싼 원자재를 수출하고, 값비싼 가공품을 수입하는 순환이 영구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런데, 내다 팔 원자재마저 없는 한국(South Korea)에서 그 일을 해내었기에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졌으며,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한국의 경제 모델을 배워갔다.

   그럼에도 전세계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1963년부터 1992년까지의 30년에 한국인은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많은 한국인들이 1963년부터 1992년까지의 30년을 군사독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정치학적 근거는 박약하다. 우선 박정희 대통령의 1963년부터 1979년까지의 선정이 군사 독재였는가? 아니다. 일부 사이비 민주화운동가들의 감상적 주장과는 달리 정치학적 논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결코 군사독재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단지 군부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군부 독재설을 주장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는 자기당착에 빠진다. 제4공화국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권은 군사독재라는 논리가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일으켰다. 그러나 만일 그런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조선왕조는 군사독재 정권이 되어버린다. 태조 이성계는 군부 출신, 즉 고려왕조의 장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최규하 대통령 정권이 군사독재 정권이었다는 한국 사이비 민주화운동가들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모두 군사독재자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본래 영국 왕실의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단지 16년 장기 집권하였다는 이유로 군부 독재설을 주장하는 자는 스스로 민주주의의 목적을 부정하는 자기당착에 빠진다. 민주주의의 목적이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을 몰아내는 것인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노무현 같은 독재자를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지, 결코 세종대왕 같은 성군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표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제 개발 능력이 뛰어난 대통령이나 수상들이 16년 혹은 그 이상 장기 집권하였던 예는 수두룩하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 그리고 싱가폴의 리 수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우에는 헌법까지 개정하여 종신 집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국민 투표로 재출마를 합법화하였으며, 국민이 다시 그를 대통령에 선출하였다.

   독재자의 두 가지 특징은 부정 축재와 독재인데, 그 둘 중 어느 것도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거 후에 아무 것도 후손에게 남겨줄 것이 없었다. 검소를 몸소 실천하던 그의 집무실에는 에어콘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었으며, 그의 시신을 처음 맞이한 의사들은 헤진 혁대와 낡은 넥타이 핀 때문에 그가 대통령인 줄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정 축재와 독재, 이 모두는 사이비 민주화운동가 김대중에게서 보여지는 것들이다. 평생 실업자였던 김대중은 재벌 못지 않은 재산가이며, 그는 천하에 둘도 없는 독재자였다. 사소한 일까지도 전문가들의 견해를 충분히 경청한 다음 결정하던 박정희 대통령과달리 김대중은 국민 허락 없이 10억불을 김정일 호주머니 꽂아주었으며, 국회 동의 없이 6.15 공동선언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가 결코 군사정권일 수 없었던 분명한 이유는 예산 집행에서도 나타난다. 만일 나라의 경제 자원이 군부로 집중하면 군사독재라는 말에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통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이전에는 국방비가 30%를 넘게 차지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일을 제일 먼저 하였던가? 국방비를 20% 이하로, 다시 10% 이하로 낮추면서 상당한 액수의 잉여 국방비가 경제 개발을 위해 전용되게 하였다. 물론,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면서도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국가 보안법이 강화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최선의 정책 그 자체는 결코 군사독재의 요소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16년 간의 선정이 군사독재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 노무현처럼 민주주의가 거리 정치인 줄로 착각하는 자들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모르는 자가 민주주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북한 공산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가 아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그 후손에게 정권이 이양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말고는 지구상에 없다. 그리고 북한에서 요구하는 체제 보장은 김정일 왕조의 체제 보장을 의미한다. 만일 북한에서 러시아와 동구의 구공산권 국가들처럼 정통 공산주의를 실시하게 할 수만 있다면 북한은 당장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이것은 수천 년간 왕정의 통치를 받던 북한 동포들이 새로운 체제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민주주의 발전에도 역사적 경험과 시대 환경의 변수가 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정말로 민주주의를 아는 사람은 하루아침에 한국에서 완전한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서구에서 수 백 년 간을 걸쳐 점차적으로 발전한 민주주의를 한국에서 단 하루만에 성취할 수 있는가? 아니다. 더욱이, 한국에는 서구와 다른 역사적 환경이 있다. 수백년간 왕정 통치를 받았으며, 왕정 통치말고는 일본 총독부 정치가 전부였다. 민주주의를 배운 적도, 민주주의 철학을 연구한 적도 없었으며, 더더구나 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완전한 민주주의가 달성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북괴가 호시탐탐 남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남한에는 남로당 빨갱이들이 득실거리며 반란을 일으키던 상황에서 어떻게 완전한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정착될 수 있었단 말인가? 남로당 빨갱이들 같은 거리 정치의 선동가들에게 나라를 내맡기는 것이 민주주의였을까?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테러범들의 위협이 있을 때는 안보가 정책의 우선 순위가 된다. 참 민주주의는 걸음마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발전한다. 그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역대 대통령들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무현식 거리 선동정치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보다 민주적이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물어보자. 1960년대의 한국에는 다리 밑에서 가마니 덮고 자다가 굶어죽는 거지들이 많았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70%를 무상지원 해주었어도 한국이 세계 최빈국이었다면 그나마 미국의 무상지원이 중단된 1960년대 중반부터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었다는 말인가? 겨우 500만명분의 쌀만 생산할 수 있는 나라에서 완전 민주주의는커녕 독립이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조선 시대에는 석유 수입이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는 외화벌이가 한푼도 없는 상황에서 석유를 계속 수입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국가 부도가 바로 눈앞에 있었음을 의미하였다. 국가 부도와 경제적 난리로 국가 존속이 위태롭게 된 국가에서 완전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던 자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 미친 자였거나 아주 무식한 자였을 것이다.

   정치학적, 그리고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을 깔아놓은 대통령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중산층이 없이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가능하겠는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대지주와 빈민으로 양분된 사회였다. 몇몇 대부호와 찢어지게 가난한 서민 두 계층만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꽃이 피려면 먼저 중산층이 있어야 함을 내다보시고 경제를 발전시키셨다. 그 이전에 아직 유일한 물류 수단이 지게와 리어카이던 시절에 서민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고작 지게꾼 노릇이었으나 그나마 일거리가 날마다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통치가 시작된 이래로 직업은 다양해졌으며 대부분의 국민이 자신을 중류층으로 여기게 되었다.

   만일 국가 경제를 후퇴시키는 대통령을 민주화운동의 기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일 것이다. 여전히 우리나라 식량 자급자족율은 30% 이하이며, 우리나라는 수출길이 막혔을 때 내다팔 수 있는 천연자원이 없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거리 선동가일수록 국가 경제를 후퇴시키는 대통령들을 민주화 대통령으로 꼽는 이상한 판단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렇게 외치고 싶어할 것이다: "거리 선동정치는 법치주의의 후퇴이며, 법치주의의 후퇴는 민주주의의 후퇴이다."

   정부의 구성 요원이 누구였느냐를 묻는 정치학적 견지에서도 박정희 대통령 정권은 군사정권이 아니었다. 거리의 선동군들이 지난 3월 21일(2004년) 탄핵 반대 촛불시위에 백만 명을 동원할 목표로(실제로는 이십 만 명밖에 동원하지 못하였음) 청소년들까지 선동한 일이있었다. 그러나 정치학에서 청소년 정치 이익 단체로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리의 선동군들이 청소년들까지 동원하려 하는 이유는 선동 정치는 사람 머릿수에 호소하는 까닭이다. 열 명으로 구성된 한 사회는 한 명의 현자와 두 명의 어리석은 자들과 그 중간에 있는 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자. 그 7명이 한 명의 현자를 지도자로 선택하면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다. 그러나 두 명의 어리석은 자들이 그 7명을 선동하여 표를 독식할 때 민주주의 제도에 약점이 있다. 바로 이 약점을 거리의 선동군들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역학 구조에서 군부의 실력은 대학생, 공무원, 경찰, 시민단체 등의 실력과 아울러 정치적 요소에 포함된다. 미국에서도 군부 출신 조지 워싱턴 장군이 가장 뛰어난 민주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초대 대통령과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1950~1960년대에 한국에서는 군부가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 구성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일부 장성들은 미국 국방성의 초청으로 정치, 경제, 역사, 행정 등을 일년간 단기 유학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엘리트 장교들에게 미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당시 세계 정세를 읽을 수 있는, 그리고 서구의 선진 기술을 이전해 올 수 있는 엘리트 지성인들이 군부에 포진하고 있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미국 정부 초청으로 한국 장교들에게 주어지는 미국 유학 특전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민간 지성인들이 군 장교들보다 높은 학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군부의 학식이 민간인들에 비해 뒤쳐질 때는 군인의 정계 진출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된다. 그러나, 1960년~1970년대는 국제 정세를 읽을 수 있는 인재들이 양김씨같은 민간인들보다 군부 엘리트들 중에 훨씬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일부 엘리트 장교들이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대다수 요직에 민간인들이 고루 등용되어 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군부 출신을 차별하지 않고 누가 지도자적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도 군부 출신이 많이 있다.

   이렇듯,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독재자"였다는 양김씨의 억지 주장을 뒷받침할 정치학적 논거도 없다. 더구나, 양김씨는 1963년에서 1992년까지의 30년의 한강의 기적 이후의 그들의 십 년 간의 연이은 실정으로, 그리고 문민 독재와 국민의 정부 독재로 정말 독재자는 누구인지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기아산업 노조를 거리로 내몰아 장기 파업을 선동함으로서 IMF 환난의 도화선을 당겼던 김대중의 거리 정치는 한국의 법치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지금 노무현의 거리 정치는 한국의 법치주의를 더 한층 후퇴시키고 있다. 그리고, 법치주의의 실종은 곧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학문적, 지성적 실력에 호소하지 않고 머릿수를 채우는 선동으로 일당 독재를 꿈꾸는 이들이 민주화운동가인가? 아니다. 사람 머릿수가 아니라 알찬 실력과 바른 정책에 호소하였으며, 공산화를 억제하였으며, 법치주의를 정착시켰던 박정희 대통령이 훨씬 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역사가는 평가하고 싶어할 것이다.

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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