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도의 2004년 시사칼럼 모음
오디오 설교 김대령 에세이 황효식 칼럼 학술ㆍ생활 정보 추천 사이트

    2004년 5월 12일 

이승만의 항일운동과 노무현의 친일운동

   열우당이 친일파 명단을 만들 때 전대협과 한총련과 전교조와 노사모와 명계남 부정선거운동단(일명 국민의 힘)과 열우당의 원조격인 일진회(一進會)는 쏙 빼놓는 우를 범한다. 그들의 원조인 일진회가 범한 과오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한세기가 지난 오늘날 일본 최고의 지식인들이 한일합방은 국제적으로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할 근거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겉으로만 본다면 백년 전 송병준이 주도했던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청원서를 대한제국 정부가 수용해서 한일합방 정서에 당시의 이완용 총리가 서명했으니 형식상으로는 한국국민이 원해서 한 모양세가 되었고 국제법상으로도 합법적이라고 주장할 구실을 주고 말았다.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이 카이로 선언은 한국을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국제 사회의 의지를 처음으로 공약한 의의가 크다. 그러나 당시 이것은 국제사회에서 몹시 힘든 결정이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인에게 독립국가를 경영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어려워했는데 아마 그 이유는 백만인 서명으로 한일합방 청원을 하던 일진회의 행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여성이 바깥출입을 좀처럼 안 하던 구한말 인구 오백 만에서 어린이를 제외한 백만 명이 한일합방 청원을 하였다는 것은 사실상 전 국민이 한일합방 청원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1904년 8월에 결성된 일진회(一進會)는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면서 을사보호조약의 조기체결을 촉구했다. 한일합방을 청원하던 1909년에는 그 회원수가 1백만에 육박했다고 하니 당시 이 매국적인 단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름할 수 있다. 마치 오늘날의 전교조와 노사모와 명계남 부정선거운동단과 열우당처럼 구한말의 이들은 당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러나 그들의 여론 지배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일본에 바치라는 그들의 정치적 요구는 타당하였는가? 아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큰 종이에 붓글씨로 서명하던 시절에 백만 명의 서명을 받아낸 이들이야말로 친일파요 매국노들이었다.

   일진회(一進會)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여 일본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송병준(宋秉畯)이 1904년(고종 41) 8월 20일에 조직한 친일정치단체였다. 전교조와 노사모와 열우당과 민노당 등 오늘날의 친북정치단체들처럼 이들은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 회원은 모두 단발과 양복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던 면은 있다. 그들의 개혁 의지는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개혁 논리였다. 오늘날 노무현과 열우당처럼 그들이 개혁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들의 개혁 실천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한일합방청원서에 백만 명이 서명하기 운동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의 개혁 논리의 문제였기에 이토록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일까?

   첫째로, 일진회는 그 논리의 출발점에 문제가 있었다 지금 열우당에는 전대협과 한총련 출신의 의원들이 많이 있는데, 무엇이 한국 좌파운동권이 출발점이던가? 주체사상이 그 출발점이었다. 무엇이 주체사상이던가? 그것은 북한 공산주의의 팽창주의에 한국은 흡수당하라는 적화통일 논리였다. 지금 그런 논리를 주장하던 자들이 개혁하겠다고 한다. 꼭 백년 전에도 이런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일진회였다. 무엇이 일진회 논리의 출발점이던가? 일본의 정한론이 그 출발점이었다. 무엇이 정한론이던가? 조선은 일본의 진보된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본에 흡수당하라는 한일합방 논리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총련, 전교조, 범대위, 노사모, 열우당, 민노당 등의 통일 논리와 일진회의 통일 논리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한총련, 전교조, 범대위, 노사모, 열우당, 민노당 등이 통일을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통일이란 무엇이던가? 북한 공산주의와의, 김정일 수령 숭배주의와의 통일을 말한다. 백년 전 일진회 역시 일본과 조선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통일 논리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친공산주의 좌파와 백년 전의 일진회의 공통점은 나라의 주권에 대한 소홀함이다. 노무현이 통일을 말한다. 김정일도 통일을 말하지만 한국 주권은 김정일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노무현은 통일만 하면 되니깐 나라의 주권을 북한 정권에 뺏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일진회의 논리가 그러했다. 일본과 합방만 하면 되니깐 나라의 주권을 일본 정권에 뺏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둘째로, 일진회는 민중운동 논리에 문제가 있었다. 오늘날 전교조 교육의 문제가 무엇이던가? 모든 것을 민중논리로 풀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백년 전의 주관주의로 후퇴하는 것이다. 민중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시절 그들에게 노무현은 민중운동의 전사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노무현이, 그리고 열우당에서 금뱃지를 단 자들이 여전히 민중인가? 아니다. 지금 그들은 지배 계급이다. 그럼에도 전교조는 모든 것을 민중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하기에 신세대 사고능력의 퇴보를 초래하고 있다. 백년 전 일진회가 그러했다. 그들은 민중논리로 정치하였다.

   1904년 송병준(宋秉畯)이 시작한 일진회는 오늘날의 친북좌파가 적화통일(赤化統一)론을 가지고 있듯이 정한론(征韓論)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친북좌파가 민중운동 논리로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듯이 백년 전의 일진회 역시 민중운동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일진회는 송병준의 친일 개혁파와 동학운동의 후신인 진보회(進步會)가 연합한 단체였다. 당시 진보회는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민중단체였다. 그런데, 친일 개혁파의 한일합방 논리가 이 민중단체를 정복하였다. 전교조는 민중운동 무조건 옳은 것이라고 학생들을 세뇌시키지만 과연 그들의 한일합방 논리는 옳았는가? “일본인과 똑같이 살게 해달라는 청원서니까 서명해 달라”는 그들의 백만 명 서명 운동은 과연 옳았는가?

   전교조가 그토록 옹호하는 민중운동이 백만 명 서명을 하여 1909년 순종에게 청원한 한일합방안이 오늘날 다시 한국의 주권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즉, 일본의 최고지식인들이 한일합방은 한국 민중이 청원하고 대한제국 정부가 수용하여 이완용 총리가 서명하였으니 국제적으로 합법적인 문서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한일합방문서는 합법적이므로 한국의 주권을 인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때 노무현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무현은 한미동맹 해체의 방향으로 자기 정책이 나아가고 있다고 자랑한다. 노무현이 말하는 자주란 한미동맹 해체로 방향타를 잡은 정책이다. 자, 한국 주권은 미국이 세계각국에 한국 주권을 승인하도록 우리를 대신하여 외교하여 주어서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다. 그런데, 노무현이 한미동맹 해체로 방향타를 잡을 때 그것은 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근거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틈을 놓칠세라 일본 지식인들이 한일합방 문서의 국제적 합법성을 주장하고 있다.

   노무현이 시민혁명을 하겠다고 한다. 김희선 의원을 앞세운 노무현이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아 척결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국민이 말려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겠다고 것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주권을 인정받을 근거를 없애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3년 12월에 국제사회가 한일합방 문서의 불법성을 인정할 유일한 근거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이승만 박사의 항일 운동이었다. 당시 일진회의 한일합방 청원이 여론의 대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외롭게 합방반대운동을 한 지도자들이 있었으니 곧 박영효, 이승만, 안창호, 이승훈 등이었다. 이중에서도 이승만은 합방반대운동하다가 투옥된 유일한 지도자였다.

   2차대전 말기에 국제사회가 우리 민족을 독립시켜 주려해도 항일운동의 근거가 없었다. 일제시대에 독립군이 있었는가? 없었다. 혹자는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이 독립군이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볼 때 그들을 중국 영토의 일부였던 만주 독립군으로 인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소속은 중국공산당이었다. 상해임정의 광복군? 단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없던 군대를 누가 독립군으로 인정하여 주겠는가? 그러나 다행히 이승만의 항일운동,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그 증인이었듯이 합방반대운동하다가 투옥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항일투쟁은 한일합방이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었다는 분명한 증거였으며, 따라서 국제사회가 우리 민족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할 근거였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처럼 일제의 압박과 싸우며 항일운동해본 적 없는 노무현은, 전대협과 한총련과 전교조와 노사모와 범대위와 명계남 부정선거운동단 등의 원조인 일진회의 대세에 굴하지 아니하고 꿋꿋이 합방반대운동하다가 투옥된 경험이 없는 노무현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김희선 의원과 열우당을 앞세워 이승만 대통령 같은 진정한 항일운동가를 친일파로 몰아세워 척결하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들의 눈에는 한일합방 청원을 위해 백만인 서명 운동을 하였던 일진회의 거짓 개혁논리야말로 친일의 본질이었음을 보지 못하는가? 그리고 노무현과 열우당의 개혁 논리는 왜 항일운동가를 친일파로 몰아 척결하는 것이며, 주권을 인정해 주는 우방 국가들과 외교적 단절을 하고 주권을 뺐으려는 북한 정권 밑으로 비굴하게 기어 들어가는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우방과의 외교 단절을 자주요 독립인양 여기는 노무현과 달리 이승만 박사는 주권 회복의 길은 한일합방 문서가 무효임을 국제사회에서 입증하는 외교에 있음을 보았다. 1910년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상실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독립선언의 중요성은 그것이 단지 거리 시위에 끝나지 않고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작년(2003년)에 KBS취재팀은 3.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프랑스 빠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한국대표단이 제출한 청원서를 발견하였다. 불어로 작성된 이 청원서는 한국이 1882년에 체결된 한미 수호 통상조약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과 맺은 조약으로 국제사회에서 자주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던 사실을 논증하였다. 또, 1919년 8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선언서의 사본을 각국정부에 보낸 외교문서도 발견되었다. 영문으로 된 이 문서에는 임시정부의 철인이 찍혀 있고, 유럽지역 외교를 담당한 빠리위원부의 대표 김규식 선생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서명이 담겨있다.

   이승만 박사는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면서 파리의 파리 위원부와 필라델피아의 한국 통신부를 구미 위원부 산하에 흡수시킨 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 노력은 마침내 1943년 삼개국 정상회담에서 한국 독립의 약속하는 카이로 선언을 얻어낸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다시 한국을 독립시키는 방법이 토론된 데 이어, 세 번째 회담은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포츠담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는 미국의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과 소련의 죠셉 스탈린(Joseph Stalin) 등 3개국 정상이 참석하여 한국 독립을 약속하였다. 일본은 8월 14일에 포츠담 선언을 준수할 것을, 즉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국제사회에 약속한 후에야 그 다음날 비로소 일본천황이 항복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국제사회의 지지로 한일합방 문서를 무효화시키고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이승만 박사의 36년 간의 끈질긴 외교의 결과였다. 외교는 국력이요, 주권의 원천이다. 일본은 한반도가 일본 영토로 표시된 세계 지도를 내밀었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영토 없는 상해 임시정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연약한 정부였던 상해 임시정부는 외교전에서 일본제국을 이겼다. 이토록 우리 민족이 주체가 된 외교는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과 열우당은 자기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위대한 항일 운동가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려고 한다. 그들의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가? 백년 전 일진회가 일본 제국주의와의 합방을 통일논리로 주장하였듯이 노무현과 열우당은 북한 공산주의와의 야합을 그 통일논리로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반공 논리를 제거하기 위해 이승만, 박정희 같은 반공주의자 대통령들을 친일파로 매도한다.

   송병준의 일진회는 왜 한일합방을 청원하는 백만 명 서명 운동을 하였을까? 그들 노무현과 열우당처럼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문제는 한일합방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고집과 민중운동 논리였다. 그런데 무엇이 민중운동 논리의 문제인가? 그것은 주관주의에서 출발하며 객관적인 판단을 거부한다. 한번 민중운동 논리가 대세가 되면 걷잡을 수 없으며 아무도 막지 못한다. 이 민족의 민중운동 논리가 여론을 한일합방 청원으로 몰고갔을 때 이승만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해방 후 귀국하니 다시 민중운동을 이용한 좌익이 우리나라를 빨갱이 세상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보았을 때 이승만 박사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오늘날 주사파와 전교조의 민중운동 논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주의에서 출발하며 객관적 견해와 합리적 판단을 거부하는 옹고집이다. 그래서 좌파 운동권이 득세할 때 국가의 경제주권과 정치주권이 또 다시 시련을 당하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 제2의 남로당 세력이 다시 민중운동 논리를 이용하여 이승만 대통령 같은 진정한 항일운동가들을 친일파로 매도하여 척결하려 할 때 그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백년 전 일진회가 범했던 친일 운동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일합방문서는 국제적으로 합법적이라는 일본 지식인들의 역사왜곡을 우뚝 막아서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합방 반대운동 경력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의 친일청산법이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하는데 악용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우리 민족은 합방 반대운동을 한 적이 없다고 국제사회에서 주장하는 꼴이 된다. 결국 그것은 한일합방문서는 국제법상 합범적이라는 일본 지식인들의 주장에 노무현이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노무현과 열우당의 역사왜곡은 일본에 한국사 왜곡의 빌미를 준다. 만일 이것이 친일행동이 아니면 그 무엇이 친일행동이란 말인가?

역사학도    
www.study21.org   

황효식 목사 칼럼 김대령 목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