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도의 2004년 시사칼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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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5월 28일 

쿠바 공산주의 혁명과 518 광주사태의 닮은꼴

   한미동맹의 균열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김대중은 한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미국이 취임 때 가장 큰 기대를 걸었다가 퇴임 때 가장 큰 실망을 한 대통령이었다. 미국은 김대중이 민주주의 운동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비밀송금한 달러로 김정일이 러시아 전투기를 구입하며 핵개발에 사용하고 있다고 통보해 주어도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가 장악한 언론을 교묘히 이용하여 반미촛불시위를 조장하여 반미주의자 노무현을 당선시키는데 이용하였다. 미국이 그 생명을 구해준 김대중은 놀랍게도 친공산주의자, 반미주의자였다.

   만일 1963년 10월 대한민국 사상 가장 공명선거로서 당선되셨던 박정희 대통령과 "이회창이 당선되면 전쟁난다"는 흑색선전운동, 그리고 서민인척 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절반 이하로 허위 기재하는 문서사기와 희망돼지저금통으로만 선거 치르겠다는 거짓말 등의 부정선거운동으로 당선된 노무현 사이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주국방이었다. 그런데 박정희와 노무현 두 대통령이 자주국방이란 구호를 제창하였지만 자주국방을 실현하는 방법은 극과 극으로 다르다. 한미동맹 강화로 자주국방을 실현하신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노무현은 한미동맹을 해체시키고 있다.

   전쟁은 억지 수단이 있어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신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연합사를 창설하셨으며, 미국에서도 몇 명 안 되는 대장이 사령관을 맡을 정도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고 한미동맹이 견고하여졌으며, 이렇게 보장된 안보의 토대 위에 한국 산업혁명과 눈부신 경제 발전이 있었다. 그런데, 김정일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전쟁을 막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노무현은 어리석게도 전쟁 억지 수단을 내던지며,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고 미국은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대신 피 흘리려는 혈맹의 의지를 굳혔다. 반면 미국의 인내의 한계를 벗어난 노무현의 반미는 한국인의 자유와 생명을 위해 대신 피 흘리려는 마음이 미국인들의 가슴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처음 취임하였을 때 노무현은 박정희 대통령보다 훨씬 더 한미동맹을 발전시키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당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90%를 근 20년간 지원해 주어도 GNP 80불 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기에 한국은 포기의 대상이었으며 대한(對韓) 무상원조도 중단시켰던 최악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대미 외교를 시작하셔야 했다. 그러나, 한미동맹을 발전시키기에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노무현은 자기를 대통령으로 추천한 민주당을 배신하고 와해시키는 속도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한미동맹을 허물어뜨리며 국가 안보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의 한미동맹 강화와 노무현의 한미동맹 해체는 국가와 서민 경제에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자원 없고, 자본 없고, 기술 없고, 시장 경험 없었던 1960년 대의 한국에서 무엇이 자산이었던가? 그것은 신용이었다. 사실 주한미군 철수 위기는 40년전에도 있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에 미국 최강의 부대들을 한국에 붙들어 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파병의 약속을 지킴으로 미국의 신용을 얻었다. 한국 정부의 약속을 미국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었으므로 한미동맹은 강화되었으며, 그 신용 자산으로 한국 경제는 성장하였다. 그런데, 파괴를 개혁으로 여기는 노무현 정부의 국제적 약속은 믿을 수가 없다. 이라크 파병 약속을 해놓고도 언제 그 약속 파괴를 선언할지 모르는 노무현 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국제 사회에서 신용을 잃으면 언제 어디서 그 신용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쩌면 노무현의 이런 어리석은 정책은 그의 비뚤어진 사관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5월 18일 24주년(2004년) 기념행사 식사에서 노무현은 "5.18은 반역적 범죄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5월 18일 광주폭동은 민주주의가 불가능하게 하는 국민수준 때문에 일어났다. 우리는 그 예를 1958년 쿠바 동부 지방의 민주화 민중봉기가 실은 공산주의 혁명이었으며, 1975년 월남 중부 지방에서의 민주화 민중봉기 역시 그 배후 세력은 월맹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본다. 그리고 1958년 쿠바 동부 지방의 민중봉기와 1980년의 광주사태는 너무나도 닮은꼴이라는데 우리의 놀라움이 있다.

   노무현에게는 얼마든지 대미 외교의 기회가 있었다. 부시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미국으로 초청하였을 만큼 노무현에게는 대미 외교의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아는 군사혁명은 쿠바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반공 이념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군부 독재자 카스트로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을 바라보는 케네디 대통령의 시각은 곱지 않았다. 오늘날 남한의 북한 핵무기 개발 지원으로 북핵 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사실 최초의 핵전쟁 위기는 1962년 10월에 있었다. 민주화 이름을 파는 민중봉기와 게릴라전으로 1959년에 집권한 카스트로는 1961년 5월 사회주의 선언과 더불어 쿠바를 완전 공산화하더니 러시아 핵미사일 기지를 쿠바에 건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10월 14일에 확인되었던 것이다.

   1999년 11월 엘리안 소년 가족의 필사적인 쿠바 탈출은 쿠바에 공산주의 독재정권이 들어서게 한 1958년의 민주항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필사의 탈출 과정에서 소년의 어머니는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의 작품 배경인 멕시코 만에서 난파선에서 죽었으며 당시 3살짜리 소년은 미국 선박에 구조되었다. 소년의 부계 친척은 쿠바에 모계 친척은 미국에 있었다. 그리고 양국이 서로 소년은 자기네 시민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미국 친척은 소년의 정치적 망명을 쿠바 친척은 본국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카스트로는 엘리안 소년을 다시 쿠바로 데려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혁명은 유혈 혁명이 아니었다. 단지, 군사혁명을 적극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의 행진이 있었을 뿐이었다. 정권이 바뀌기는커녕 장면 내각이 허수아비 취급하였던 윤보선 대통령의 위상이 강화되었다. 만일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폭리를 취하던 수입상들에게 자발적 국가 헌납과 공장 건설 중 양자 택일을 요구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수입상들이 수입을 중지하고 산업시설을 건설한 바로 이것이 전혀 수출이 없던 나라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출발점이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조국 근대화 운동을 군사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훗날 두고두고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까지 나빠지게 한 1958년 카스트로 게릴라군의 군사혁명은 엄청난 유혈 혁명이었다. 양김씨는 미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독재자라고 말만하면 민주투사로 대접받을 정도로 카스트로가 군부독재의 대명사였다. 그리고, 16년이 채못되는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과 달리 카스트로의 장기집권은 195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1958년 쿠바 민주화운동의 맹점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1958년의 민주화운동 이전에는 쿠바도 자유 민주주의 국가였다. 비록 완전히 성숙되지는 못하였을망정 민주주의 국가였으며 경제력도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속은 민주화운동으로 쿠바 국민은 모든 것을 잃었다.

   1960년대의 러시아 영화 중에 1958년의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을 시대 배경으로 제작된 작품이 있다. 이 영화는 그 제작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그 사실 묘사 기법이 뛰어나 하나의 역사 다큐멘타리로 삼을만한 명작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혁명가 카스트로가 아니다. 그는 당시 미군의 강력한 화력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의 내전에서 자기 병력 대부분을 잃은 패장이었다. 오히려 이 영화의 포커스는 의협심이 강한 한 무명의 청년의 시위 도중의 돌발적인 충동이 빚은 한 발의 발포 사건이 쿠바의 군중 심리를 자극하여 철강의 바티스타(Batista) 정권을 무너뜨리기까지의 일연의 사건들에 있다.

   사실 이데올로기는 이 대학생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과잉 진압에 과잉 반응을 하는 전형적인 중남미 청년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통과 혁명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하던 이 학생이 어느 날 과잉 진압 항거 의사를 표현하려 시위에 참여한다. 본래 의도는 평화 시위였으되 과잉 진압에 격분한 주인공은 순간적인 폭력 충동을 받는다.

   경찰이 소방대 호수로 강하게 내뿜는 물살에 시위대가 밀리고 있을 때 주인공은 큰돌을 들고 홀로 물살을 뚫고 전투 경찰대 지휘관에게 접근한다. 수적으로 열세이나 여러 대의 소방차의 장비를 갖춘 전투경찰대의 호스에서 엄청나게 뿜어 나오는 강한 물살 앞에서 시위대의 대오가 여지없이 흐트러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오기에 찬 청년 주인공은 힘을 다해 물살을 헤쳐나가 곁에 아무도 없는 지휘관을 향해 큰돌을 던지려 한다. 바로 그 순간 문제의 발포 사건이 일어난다.

   아마 그 전투경찰관도 동일한 생존권을 가진 한 인간이요 시위 현장에서 자기 임무를 수행하던 쿠바 국민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과연 이 발포 사건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시위대 진압을 하던 당시의 급박한 정황에서 피치 못할 우발 사건이었는지 행정부 수뇌가 그 발포의 총체적 책임을 져야 했는지의 문제는 후대 사가가 판단해야 할 민감한 사안이다. 그러나 이 대학생을 혁명의 열사로 추대하는 쿠바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정서의 표적은 바티스타(Batista) 대통령이었다. 그는 그의 대통령 첫 임기 중에 쿠바를 일약 잘사는 나라로 만들었었기에 국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1952년에 다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 임기 중 그는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유능하였으나 빈부 격차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능하였다. 두 번째 임기 초부터 내내 공산주의자 정적 카스트로의 게릴라 군의 강력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강한 공권력을 사용하는 동안에 민심은 그를 떠나고 있었다. 이런 시국에서 한 대학생의 목숨을 앗은 문제의 단발의 총성은 군중 심리의 화약고에 기름을 붓는 결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쿠바는 정(情)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국민성을 가진 문화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당시 쿠바는 러시아의 공산주의 팽창 저지를 위한 미국의 중남미 군사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발포 사건 이후 카스트로를 지지하는 반정부 시민군의 수가 계속 불어나자 미국 워싱톤 행정부는 주 쿠바 미군 병력을 철수시킨다. 결국 치안 유지에 실패한 바티스타 친미 정권은 그 해 1958년 가을에 붕괴되고 쿠바는 독재자 카스트로 치하에서 공산화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시위 중 대학생의 죽음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켰으며, 그 틈을 타 카스트로의 공산 게릴라군이 집권하였다면, 광주사태는 한 대학생이 죽었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일어났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0시반부터 전남대 정문 앞에서 7명의 정문 경비병들에게 돌을 던지던 전남대생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돌에 맞아 다치면서도 그 자리에 우뚝 서있을 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11시에 시위장소를 금남로로 옮겼다. 그런데 광주의 혁명가 윤상원이 과격 시위를 선동할 뿐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도, 회장단도, 학생회 임원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재야 운동권 지도부가 폭동을 선동하고 학생운동권 지도부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쿠데타 계획이 5월 17일 서울에서 발각되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김대중 홍위병들이 광주 외곽 산장으로 모두 피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금남로에 모여있어야 했던 것인지 알지 못하던 전남대 학생들이 자진 해산하려고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 학생회장을 죽였다"고 외쳤다. 그리고 파출서를 파괴하자는 말에 선동되어 화염병들을 던지며 광주시의 파출서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폭동주동자 윤상원은 미리 화염병들을 대량으로 준비해 두고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파출서 파괴. 세무서 방화, 방송국 방화, 장갑차와 기관총 등 무기 탈취, 교도소 습격, 광주시에 인공기 계양, 도청에 (공산당) 해방구 설치에 이르기까지 일연의 사건들이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광주사태 기간 내내 박관현은 광주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박관현 학생회장을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 의도적 유혈 폭동을 목적으로 하였든 아니면 단지 우발적 사건이었든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고 그 시점에서는 경찰에 연행된 사실조차 없었던 사람을 죽였다고 소문내었다는 데에 그 유언비어의 악랄함이 있다. 그리고 광주사태 후에 그 유언비어가 거짓이었음이 드러났을진대 그 유언비어의 출처와 신빙성을 확인해 보지 않고 파출서들을 파괴하고 미쳐 도망가지 못한 경관들을 납치하여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함으로서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가 광주사람 정웅장군에게 진압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 것은 잘못이었다는 시인이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과오를 합리화시키려는 자들이 온갖 거짓 이론을 조작해 내었었다.

   이처럼 1958년 쿠바의 유혈 폭동과 1980년 광주사태는 닮은꼴이다. 쿠바의 유혈 폭동은 과격 시위를 경찰이 과잉진압하던 중 한 대학생이 죽었기에 일어났다. 광주사태는 멀쩡히 살아있었으며 경찰에 연행된 사실조차 없었던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을 경찰이 죽였다는 소문 때문에 일어났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쿠바와 한국의 국민성은 비슷하다. 두 민족 모두 정에 강하다. 학생이 죽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또 그 정황이 어떠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카스트로가 유혈 폭동을 쿠바 공산화의 기회로 삼았던 것, 김일성이 광주사태를 남침의 기회로 삼았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나, 만일 차이가 있다면 김일성의 기대와 달리 애국 군인들이 성공적으로 광주사태를 진압하였다는 것이 유혈 폭동의 전국적 확산을 막지 못하여 나라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긴 쿠바 바티스타 정권과의 차이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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