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도의 2004년 시사칼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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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5월 11일 

한국의 민주운동가들은 반미주의자들인가?

   우리 민족사에서 지금처럼 공산화의 위기가 고조된 적은 없었다. 지금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의 수순으로 적화통일을 추진하려는 세력이 있다. 그들은 시대가 변했다고 말한다. 1973년의 월남도 시대가 변했다면 보안법 철폐에 이어 주월미군까지 철수시킨 통일론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대로 1975년 4월에 적화통일되자 제일 먼저 학살되었다. "민주주의를 배신한 자는 언젠가는 공산주의도 배신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논리 때문이었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대는 변했다. 어떻게 변했는가? 북한이 한국전쟁 때의 소총보다 훨씬 위력이 강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또 무엇이 변했는가? 한국 사상 지금처럼 간첩이 남한에 많이 우글거린 적이 없었다. 또 무엇이 변했는가? 지금처럼 북한이 사상 심리전과 군사력 양면에서 적화통일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적이 없다.

   또 무엇이 변하였는가?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미국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었고, 3년간의 전쟁 동안 한국군에 무기를 지원하며 우리 민족을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시 북한이 남침할 때 국제사회가 우리 민족을 도울지 불투명하다. 그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는 공산주의를 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노무현이 적화통일론자는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좌파 정치인들의 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 시도 등이 국제사회의 시각에서는 한국인 스스로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으로 비쳐진다. 남한이 핵무기를 손에 쥔 북한의 공갈에 굴복하면 굴복할수록 남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다. 그리고, 이렇게 남한을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국가들로부터 떨어져나간 외톨이가 되게 하는 것이 북한의 적화통일 전략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 변하였는가? 국가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의 수순으로 적화통일될 경우 그것은 남한의 신세대에게는 최악의 고통이 될 것이다. 그들은 1975년 월남의 통일론자들처럼 국가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에 찬성하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화통일될 때 가장 못 견디게 괴로워할 것이 또한 남한의 신세대이기도 하다. 노랑머리 친미문화 세대가 불법 집회와 반미 촛불시위를 하는 이유는 무한 자유를 즐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원화 문화와 무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들이 진보로 여기는 김정일 숭배주의는 다원화 문화와 무한 자유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남한의 노랑머리 친미문화 세대는 북한이 반미 시위 선동에 이용하면서도 적으로 삼는 세대이다. 그렇다. 이점이 변하였다.

   북한에는 북한 나름 대로의 문화 정책이 있다. 따라서 노랑머리 신세대의 친미문화 혹은 다원화문화와 북한의 획일 문화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상극이다. 민주화 운동의 완성이라고 자처하는 노무현 정권이 첫날 시작한 일이 문성근과 명계남을 내세운 언론탄압단 결성이었으며, 지금은 정간법이라는 악법을 제정하여 정론 언론지들을 탄압하려는 시도가 있다. 헌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에서도 이러할진대, 히물며 적화통일 후 김정일 공산정권이 이질문화권인 남한에 김정일 우상화를 강요하려면 노랑머리 친미 문화 세대에 대한 얼마나 더국 강력한 통제를 하겠는가? 입에서 록음악 소리만 나도 그 날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서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신세대는 무한 자유를 요구하기에 보안법 철폐 주장에 속기 쉽다. 그들은 무한 자유를 즐기면 주한미군 철수를 외쳐댄다. 그러나 그 다음은 무엇인가? 나라를 빼앗기고 조국이 공산화된 후에 그들이 더 이상 무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겠ㄲ는가? 아니다. 신세대 친미 문화와 김정일 우상화 정책은 공존할 수 없기에 신세대가 받는 탄압은 북한 주민이 받는 탄압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혹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위「진보」세력이라는 김정일 똘마니의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가장 감상적인 자유주의자들이다. 이들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공산주의와는 서로 상극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한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인권 탄압에 민감하다. 이 사실을 아는 빨갱이들은 적화 통일되면 학살 명단 첫 줄에 오르는 이 자유주의자들과 연합 전선을 편다. 남파공작원들은 자신들을 인권 운동가라고 위장하고 좌익 인사들이 공안 당국에서 구금된 사실을 얘기한다. 이 자유주의자들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 반체제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이제 이들에게 인권 운동이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소리를 낼 건수가 생겼다. 이렇게 해서 자유주의자들을 이용하는 빨갱이와 차츰 좌경화되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자들은 지상에서 가장 악랄한 인권 탄압자 김정일을 위해 충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남한 다원화 사회에서 무한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김정일의 공산 정권 사이에, 즉 공존이 전혀 불가능한 두 집단 사이에 이데올로기 고리가 형성되는 것일까? 오십 년 전에 남한 빨갱이는 순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학살하던 이북 빨갱이들의 주장이 오늘에 와서는 바로 들어맞는다. 1990년대 동구 공산주의 정권들의 급속한 몰락은 자유 사회의 우월성에 대한 도취감을 돋구었다. 빛과 어두움이 대조되듯이 다원론(pluralism)이 전체주의 (totalitarianism)와 대조되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개인의 무한 자유를 요구하는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이다. 냉전 시대는 지나갔으니 더 이상 정부는 아무런 단속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절대적 다원론 사상을 가진 이들은 국가보안법도 인권 탄압이니 폐지시켜야 한다는 빨갱이의 말에 넘어가기 쉽다.

   북한 전체주의 (totalitarianism) 사회에서는 한 개인에게 무한 자유를 허용하자는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기에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이 좌익 사상의 출발점인 남한의 잡종 빨갱이들을 이북 빨갱이들은 학살할 수밖에 없다. 남한 잡종 빨갱이와 이북 빨갱이는 사상 구조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그 차이는 극단적 주관주의와 극단적 객관주의의 차이다.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은, 즉 극단적 주관주의는 사회의 법 체제와 공권력 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은 저항을 위한 저항을 한다. 이에 비해 극단적 객관주의인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권력을 주장한다. 북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수령의 명령은 역사적 필연성이다. 김정일을 숭배하며 사느냐 아니면 죽임을 당하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반체제주의자들인 남한의 신세대는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만일 누가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자처하면서 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사상의 뿌리는 빨갱이가 아니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화 운동과 공산화 운동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민주화 운동이란 말로 위장하였으니 실제로 하는 일은 김정일 똘마니 짓뿐이라면 우리는 그의 사상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점은 이것이다. 민주주의는 미국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한국의 자칭 민주화 운동가 집단의 특징은 한결같이 그들이 반미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반미주의는 곧 자유 민주주의를 적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민주주의를 적으로 삼는 자들이 어떻게 뻔뻔스럽게도 민주화 운동가를 자칭하는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일제 시대 때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는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당시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 신자가 많았고, 서울에는 별로 기독교 신자가 없었다. 서울은 빨갱이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남한은 사상적으로 공산화가 되어있었다. 일제 시대에 조선인 지식인들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부터 이미 여운형이 러시아어를 번역한 공산주의 서적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은 부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주겠다는 선전에 언제든지 현혹될 수 있었기에 남한은 겉모습은 일본 식민지였으나 속모습은 사상적 공산화 작업이 완료되어 있는 사회였다. 그리고 1943년 카이로 선언으로 독립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자 태평양전쟁 말기에 공산주의는 더욱 급속도로 퍼져나갔던 듯하다. 그들에게 공산당에 입당한다는 것은 해방 후 정권을 거머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였다.

   김대중이 자기를 민주화 운동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민주주의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다. 일제시대 때 목포상고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쳤는가? 아니다. 그가 배운 것은 해방 정국 때 몽양 여운형의 공산당 조직에 가입하여 공산주의를 배운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는 여운형에게서 배운 공산주의 사상을 밑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민주화운동가로서 선전하였으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였다. 그의 정치 사상의 틀은 해방 정국 때 여운형에게서 배운 공산주의에서 형성되었다. 그것을 왜 김대중이 민주주의라고 불렀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나, 공산화 운동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르는 이미지 조작 수법의 원조는 김대중인 듯하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해방되자마자 러시아군이 압록강을 넘어 계속 남하하므로 러시아군이 삼팔선 이남으로 남하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하여 미군이 8월 22일에 급히 입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북한 점령과 미군의 입국으로 여운형의 공산주의 국가 건설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북한에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대권을 주었으며, 남한에서도 미군정이 여운형의 불법 공산정권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여운형의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 1945년 9월 5일에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공산주의 국가 수립을 발표하였으나, 이미 김일성을 꼭둑각시로 내세운 소련도 인정해 주지 않고 9월 16일에 38선 이북에 러시아 군정 수립을 공포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0월 10일에 미군정 군정장관이 "조선인민공화국" 공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만약 여운형의 공산주의 국가 수립을 미국이 막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래 갔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여운형은 러시아식 공산주의보다는 유고슬라비아식 사회주의에 가까왔는데, 스탈린이 그대로 내버려둘리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미국이 러시아군의 38선 이남 남하를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스탈린은 한반도를 몽고와 같은 위성국으로 삼았을 것이다. 스탈린이 북한을 원조해 준 이유는 남한을 지원하는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만일 미국과의 경쟁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약탈의 대상이지 원조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일제 시대 직후에 바로 몽고처럼 소련 영토로 흡수되었을 경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존속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8월 25일에 미군이 소련군의 38선 이남 침략을 저지하였기에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의 입장에서는 미군의 입국 때문에 그의 공산주의 국가 건국의 야망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여운형의 시각에서는 미국은 공산주의의 적이다. 그리고 여운형을 추종한다는 것은 곧 반미주의자가 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국의 반미주의의 뿌리는 공산주의 국가 수립 목표였다. 그리고 본래 공산주의의 깊은 뿌리는 남한에 있었지 북한이 아니었다. 그래서 1945년 10월 10일에 김일성이 북한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였을 때 스스로 한반도 공산주의의 주류는 서울에 있음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남한에 있었으며, 김일성은 하나씩 배워가며 북한 공산화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좌익 학생들의 반란이 그칠줄 모르던 남한과 정반대로 북한 학생들은 반공학생들이었다. 기독교 신앙부흥운동이 뜨겁게 일어나던 북한 사회는 반공 사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45년 11월 5일 공산당이 조직되기 시작하자 이틀 후인 7일에 함흥서 반공학생 궐기대회가 열렸으며, 23일에는 신의주서 반공학생 궐기대회가 열렸다(사상자 50명, 피검 80여명). 한경직 목사님처럼 이때 러시아군이 검거를 피해 월남하신 분들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 국민이 되었으나, 미처 월남하지 못한 학생들이 무력에 의해 공산화된 1세대이다.

   천만다행으로 한반도 공산주의의 본고장인 남한은 오히려 공산화를 면하였는데, 사실 우리나라가 1945년 9월 5일에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데는 맥아더 장군의 역할이 컸다. 당시 미국 워싱턴에서는 한국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북한에 이어 남한마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주일군정 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은 여운형이 공산주의 국가 수립을 발표한지 이틀 후인 9월 7일에 재빨리 남한에 군정을 선포하고, 이승만 박사를 귀국 초청하였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우리나라를 공산주의자들의 손에서 구해내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지도자로서 적임자라는 맥아더 장군의 판단은 옳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는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 박사의 귀국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아직 한국인 중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가 없었으되 프린스턴 정치학 박사 이승만의 귀국과 더불어 비로소 이 땅에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민주주의 이름을 파는 자들이 반미주의자들, 친김정일 세력인 까닭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보자.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아직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본제국 총독부 통치와 공산주의가 당시 한국인들이 알고 있던 정치의 전부였다. 물론 사람들은 조선인이 이씨조선의 후예라는 말을 들었으나 지금처럼 조선왕조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왕조에 대해 제대로 가르쳤을 리 만무하며, 또 지금처럼 TV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조선왕조의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단, 널뛰기나 그네 타기 그리고 판소리 등의 민속 풍속이 일제 시대에도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기에 조선시대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마자 우리나라는 100 퍼센트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그런 주장을 좌익이 많이 하는데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좌익은 해방 정국 때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방해하던 자들이었다. 일제시대 한국인들은 해방되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꿈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다. 극히 일부가 조선왕조 시대로의 복고를 기대했을 뿐 그 외에는 박헌영과 여운형 등이 이끄는 공산주의가 당시 지식인들 사상의 주류였다. 그리고 상해임정의 김구는 군대가 없는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인의용군 부대가 정권을 잡을 것으로 예상하고 그들과 손을 잡으려는 실수를 범하기까지 하였다. 러시아파 김일성도 공산군 소속이었기에 이처럼 안팎으로 공산주의가 대세였으며, 비록 김구 선생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공산주의자들의 대세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현실론을 주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1945년의 한국인의 세계는 좁았다. 국민 대다수는 문맹자들이었으며, 농업 인구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무식하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것은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을 통해서, 그리고 한국 전쟁을 경험함으로 알았다. 그러나 1945년에는 공산주의가 악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기에 해방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들의 마수에 넘어갈 뻔했던 한반도에서 남한에서나마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된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이 있었는가? 만일 있었다면 이승만씨의 독립운동이 있었을 뿐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김구 선생은 울었다. 왜 울었는가?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부대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상해임정의 광복군은 단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본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김구 선생은 해방 후 건설되는 새 국가의 정부 구성은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부대가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재빠르게 그들과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부대를 독립군으로 인정해 줄 수 없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 소속이었으며, 만주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몇 차례 전투를 벌인 적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한국 독립 운동으로 보기는 어려운 까닭이었다. 결국 국제사회는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의 흔적을 이승만 박사에게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

   아마 한국 사람들은 1945년 10월 16일에 이승만 박사가 귀국한 후에야 비로소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어보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 국가 건국은 실로 외로운 행진이었다. 자, 공산주의자 박헌영씨와 사회주의자 여운형 씨는 국내 지지 세력이 많았고, 이승만씨는 국내 지지자가 없었다. 그의 독립운동은 외국에 잘 알려져 있었으나, 오히려 국내에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해방 당시 쟁쟁했던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이승만을 냉랭히 외면한 채, 박헌영과 김일성의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1945년 당시 한반도는 온통 빨갱이들의 나라였다. 이승만이 외로이 들었던 "남한 민주기지론"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온갖 반대와 욕설을 무릅쓰고, 반공노선-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로 신생 대한민국의 방향을 힘껏 틀었다.

   그러면 이렇게 어렵게 건설한 민주주의 국가를 와해시키고 나라를 김정일에게 갖다 바치려는 자들이 재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좌익의 생리는 배신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집권하기 위하여 이용한 자들의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숙청한다. 스탈린이 그랬고, 김일성이 그랬고, 호지명이 그랬고, 노무현이 그랬다. 아마 노무현은 자기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해 준 정당을 가장 빨리 배신하고 와해시킨 정치인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좌파는 김동길 교수 같은 진정한 민주주의 인사들을 이용하면서 세력을 키워왔다. 김영삼 대통령도 이회창씨도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다. 단지 그들은 민주화 운동가로 위장한 세력에 속아넘어갔을 뿐이다. 그리고 김대중의 이미지 혼란 전술에 김종필씨와 이인제 의원도 속아 이용당하였다. 그런데,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배신하고 숙청하는 것이 좌익의 생리이다.

   친김정일 세력의 이미지 혼란 전술의 또 하나는 반공이 곧 친일이라는 논리이다. 일본 역시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고 있었다는 데서 그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럼에도 반공이 곧 친일이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애국자는 반공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항일운동가를 자처하지만 만일 그 속내용이 빨갱이라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애국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국가보안법 개정이나 폐지는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진영 국가들에 등을 돌리고 북한 공산주의 국가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공산화 논리는 결국 주한미군 철수론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는 안보의 방위선과 버팀 돌을 무너뜨린다. 월남은 월맹보다 10배의 군사력과 20배의 경제력을 ≠냅슴〉?불구하고 보안법 폐지와 주월미군이 철수 후 맥없이 패망하고 말았다. 왜 김정일 정권은 국가보안법이 "반통일적이며, 팟쇼악법"(4.30「노동신문」논평)이라고 강변하는가? 국가보안법 폐지의 목적은 그것이 합법적 공산화이든 아니면 제2의 한국전쟁에 의해서이든 적화통일이기 때문이다.

   왜 한국의 민주운동가들은 반미주의자들인가? 그것은 한국의 민주운동가들 중 다수가 가짜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본성은 팽창주의이며 산불처럼 퍼져나간다. 본래 공산주의의 본거지였던 남한에서 이승만 박사의 노력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되었으나, 전쟁과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혁명을 거치는 동안 민주주의 철학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승만, 박정희 등 위대한 대통령들이 아직 건국기에 있던 우리나라에서 국가 건설을 하는 동안 공산주의 뿌리는 여전히 자라고 있었으며 민주운동으로 위장한 빨갱이들이 그 세를 키우고 있었다. 무엇을 그들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했는가? 바로 미국문화원에 방화하는 것, 미국 대사관을 공격하며, 성조기를 찢는 것을 그들은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그들이 국민을 속이고 정권을 잡더니 보안법마저 철폐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는데 수백 년이 걸렸으며, 미국에서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는데만 120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빨갱이 터밭이었던 한반도에서 어떻게 해방 후 하루 아침에 완전 무결한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빨갱이들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되어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첫걸을 내딛었다는데 그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같은 위대한 대통령들의 선정으로 힘차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렇듯 건국기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였다. 그런데, 공산주의 잡초들이 위장 전술과 이미지 조작으로 국민을 속이며 공산화 운동을 해왔다. 그리고, 김근태 등 국민을 기만하여 의원이 된 자들이 보안법 철폐를 주장할 때 우리 민족은 다시 한번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게 되었다.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해방정국의 공산주의 망령에 합법적 공산화의 길을 열어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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