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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2월 28일 

종교적 좌익 사상으로서의 민중신학 분석

   근래에 리영희 교수처럼 북한 공산주의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미주의자들이 주류 지성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이런 친공산주의 좌익에게 활개를 칠 기회를 제공한 것은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민중신학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민중신학이 광주 사태에도 최소한 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광주 사태는 유언비어의 사태였다. 무엇이 광주사태가 일어나게 하였는가? 어떤 거짓말 제조기가 대량 생산한 유언비어였다. 무엇이 한국인들이 광주 사태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인가? 그 거짓말 제조기가 대량 생산한 유언비어이다. 그러나 유언비어는 결코 광주사태 발발 원인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광주 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오히려 민중신학파 인사들이 광주 사태 발생에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75년 3월에 월남 중부 지방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4월 5일에 수도 사이공에 공산 게릴라군이 입성하고 월남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980년 봄에 한국에 두가지 시각이 있었다. 애국 인사들은 물론 우리나라에서 그런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 같은 민중신학파 인사들은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과 같은 제2의 민중봉기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0년 5월 21일은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일이었다. 그리고 남한의 민중봉기 거사일정에 때를 맞추어 북한군이 휴전선 일대에 총집결하여 총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분석한 미국이 항공모함을 부산항으로 급파하였다는 사실이 한국 정부에도 전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당국이 5뤌 18일 자정을 기해 야간 통행금지를 전국적으로 확대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록 이런 긴급조치로 민중봉기의 전국적 확산은 다행히 막을 수 있었지만 윤상원이라는 혁명가가 광주에서 점화하여 일어난 것이 518 광주사태였다. 윤상원의 배후 세력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우리는 그가 북한에서 출판된 이념 서적들을 탐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당시 광주의 좌익 이념 서점이었던 녹두서점이 어떤 괴인물이 윤상원과 접선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사람들은 계엄군과 시민군간의 충돌로 광주사태가 발생하였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나무는 뿌리는 없고 줄기만 있다는 주장과 똑같다. 5.18측은 당시 폭동 진압차 출동하였던 계엄군 사진들만 전시하면서 그것이 사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5월 18일 아침 10시경에 전남대 교문에서 경비 근무를 하던 일곱 명의 계엄군에게 오백 명의 전남대 학생들이 삼십 분간 돌을 던진 것이 광주사태의 첫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당시 대부분의 전남대 학생들은 왜 그들이 국군한테 돌을 던져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돌을 던지라고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발행된 광주신문 기사에 의하면 계엄군들은 돌을 맞아 몸이 다치면서도 부동 자세로 서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군인은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은 교문 경비 명령은 받았어도 시위 진압 명령은 받은 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맞으면서 그 자리에 서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현재 시간대에는 시위 진압 명령도 시위 진압 사실도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러면 왜 광주사태가 발생하였는가? 그것이 윤상원 단독 소행이었든 아니면 배후에 북한 세력이 있었든 그날 오전 계엄군 자극에 실패한 그들은 11시부터 광주 경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분명 그것은 광주 경찰과 광주 시민간의 충돌이었으며, 결코 계엄군과 시민군의 충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중대한 사실은 생략한 채 광주 사태 발발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시민 편에서는 광주 경찰이 여대생을 연행하는 등 과잉 진압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광주의 경찰서가 모두 화염병에 파괴되고, 경찰들이 수십 명씩 고립되어 폭도들에게 몰매를 맞고, 심지어 집까지 수색하여 경찰을 붙잡아간 사실에 대하여는 왜 침묵하는가?

   그랬다. 다행히 아직 폭도들에게 붙잡히지 않은 경찰들은 광주 외곽으로 피해 달아나고 광주의 경찰서들과 파출서들이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된 사태가 그날 오후에 있었다. 호남 인사 정웅 장군이 공수 부대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과잉 진압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 그런 치안 공백 상태에서 광주 시장과 전남도지사는 정웅 장군에게 시위를 진압해 달라는 간곡한 청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경찰서만이라도 폭도들로부터 되찾기 위해 시위 진압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과잉 진압인가? 그리고 누가 경찰서를 부수고 경찰들에게 폭행을 가하였는가? 그들이 모두 광주 시민이었는가? 북한 세력이 광주 시민으로 위장하여 침투해 있었는데도 당국이 팔짱 끼고 있어야 했겠는가? (그 시민군 중에는 대한민국 시민이 아닌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정웅 장군 역시 광주 사람이며, 또 그가 공수 부대에 시위 진압 명령을 내릴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만일 문제가 있었다면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그의 명령이었다. 그의 명령은 일관성 없이 이랬다 저랬다 날마다 바뀌었다. 그의 부하들이 그의 명령에 복종하면 그 다음날은 그 때문에 책망을 받는다. 결국 육군본부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5월 27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직접 진압 작전을 지휘하였다. 그런데 그 진압작전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관련시키는 유언비어와는 달리 그는 그 진압 작전에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었으며,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이희성 장군은 언제나 전두환 장군의 엄한 선임자였으며, 전두환 장군은 병력 통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보안사령관이었을 뿐이었다.

   만일 윤상원이라는 노동운동가가 광주사태를 점화하였다면 그 연료 제공은 5월 21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전국적 민중봉기였다. 당시 김대중씨에게 내란죄의 혐의가 있었던 것도 그런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 계획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사 주동 인물 중에 문익환 목사가 있었다. 아마 문익환 등 그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던 민중신학파는 예비군 무기고 약탈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5월 21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전국 규모의 시위가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의 도화선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980년은 한국 사회에서 목사의 위상이 대단하던 시기였다. 아직 강남에 대형교회들이 많지 않았던 그 당시 목사는 재력가로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회는 목사를 존경하였다. 1970년대에 사람들은 아직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는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존경 대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등장한 민중신학파는 이런 목사의 사회적 위상을 그들의 좌익 사상을 퍼뜨리는데 활용하였다. 여기에 한국 기독교의 두 다른 모습이 있었다. 한편에서 복음주의 신앙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요, 구원의 도를 전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문익환, 한상렬, 홍근수 등의 민중신학파가 매스컴의 전면에 나서서 김일성, 김정일 하수인으로, 좌익 정치군으로 활동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목사는 누구인가?

   그런데, 민중신학에는 4대 원조가 있다. 오늘날 그들이 자유주의 대신 진보라는 명칭을 붙이는 자유주의 신학과 남미의 해방신학과 공산주의의 유물론 등 그 원조가 외국 것인 3대 원조가 있으며, 한국적 원조로 동학 사상이 있다. 한때 세계 신학계가 민중신학을 환영한 적이 있었다. 한국 사람 스스로 한국 상황에 맞는 신학 체계를 발전시킨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 있었다. 아직 정통 신학의 뿌리가 없는 이들이 그 속 내용은 천도교 교리에서 따오고 간판만 기독교 신학이라고 붙이면 기독교 신학일 수 있는가? 아니다. 거짓 주장이 있을 뿐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본주의 신학이기에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의 본질은 상당히 상실한 신학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신학연구 방법론의 문제일지언정 민중신학처럼 종교혼합주의는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의 정도를 벗어났으되 민중신학처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최제우의 동학 사상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 동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민중신학에서는 노동 파업을 일으키다가 탄압을 받는 것은 해방의 메시야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공산주의 유물론을 해석학 모체로 삼는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은 영혼 구원이 아니라 해방이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든 노동 파업에 동참하는 것은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수난당하는 일이요,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수난당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인가? 아니다. 성경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만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스스로 한국의 정치 신학임을 자처하는 민중신학의 한 원조는 남미의 해방신학이다. 그런데, 여기에 정치에 대한 그들의 무지가 폭로된다. 외국에서 베껴왔으며 다 진보인가? 아니다. 중남미의 경제난 해결을 위해 미국이 너희 나라는 한국처럼 경제 개발할 용의는 없는지를 물었다. 정권과 재력을 동시에 움켜쥐고 있는 중남미 권력자들은 그럴 의향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국토의 대부분의 자기네 소유인데, 경제 개발을 하려면 토지 개혁을 해야 하고, 토지 개혁을 하려면 자기네 농장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중남미 경제의 문제인가? 권력 실세가 대지주이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커피 등 농산물만 팔아도 대부호이다. 반면, 서민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으며,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하여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저임금에 혹사당한다.

   사실, 중남미에는 해방신학이 발생할 이유가 있다. 성직자들은 정부를 향하여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처럼 경제 개발을 하여 달라고 하여도 정부는 그럴 의사가 없다고 대답한다. 즉, 그대로 농업국으로 머물러 있으며 정부 고관들에게 농장에서 고소득이 보장되는데, 무엇하러 자기네 땅을 내놓는 토지 개혁을 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느냐는 것이다. 이렇듯, 중남미 상황은 한국 상황과 정반대이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기 땅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에게는 땅은 커녕 후손에게 물려줄 재산도 없었다. 과학기술연구원 직원의 봉급보다도 그의 봉급이 훨씬 작았을 정도로 그는 서민적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 헌신적 봉사를 하였기에 한국 경제에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 상황은 중남미의 상황과 정반대이다. 그런데 민중신학파는 중남미에서 투쟁하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민중봉기를 일으켜 계급 투쟁하자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에서 정치와 경제에 대한 그들의 무지가 여실히 폭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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