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교회 황효식 목사님 시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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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15일 

위대한 스승, C.S 루이스

어린아이의 직관과 감수성으로 하나님을 해석한 아마추어 신학자

   1 오스 기네스,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의 책을 읽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들은 글과 삶이 거의 일치하는데서 오는 안정감이 있어서 좋다. 그런가하면 스콧 펙이나 필립 얀시는 예리하고 재치있지만 안정감이 결여된다. 뭐, 그것도 한편으론 위안이 되기는 한다.

   필립 얀시는 성경 외에 단 한권의 책만을 소유해야 한다면 자신은 체스터톤의 "진정한 기독교" 라는 책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책이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몇 몇 유명 출판사 편집부에 전화를 걸어 번역을 종용했는데, 그분들은 체스터톤이 누군지도 몰랐다. 하긴 20세기 최고의 신학적 성과라는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이 아직도 번역이 안된 상태이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란시스 쉐퍼 전집이 출간된 것과 C.S 루이스의 책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번역된 칼 바르트의 저작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나고 심오한 신학자인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군계일학, 가장 빼어난 신학자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뜨거운 가슴과 논리적 지성을 갖춘 차세대의 가장 주목받는 신학자이지만, 재능이라는 측면으로만 본다면 칼 바르트에 비하면 훨씬 처지는 느낌이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러나 나는 칼 바르트보다 더 탁월하고 위대한 아마추어 신학자를 한 분 알고 있다. 바로 C.S 루이스이다. 그의 책들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 를 두 번, 세 번 보면서 나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다. 진정한 교회 개혁을 원하는가? 먼저 C.S 루이스 의 책들을 섭렵하라!

   C.S 루이스 는 기독교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위대한 신앙인일 뿐 아니라, 가장 정통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의 지성을 능가하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그를 탁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어린아이같은 감수성이다. 그는 어린아이의 직관으로 하나님을 해석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지성이 그 모든 것을 받쳐준다. 아무도 시비걸 수 없게끔... 짭짤하게...

   성실한 천재를 당할 재간이 있는가? 칼 바르트와 C.S 루이스는 성실한 천재였다. 블레즈 파스칼도 성실한 천재였지만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들에 내려주신 큰 축복이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을 쾌락주의자라고 명쾌하게 주장했는데, 맞다. 우리는 그들의 글을 읽으며 그 어떤 쾌락 못잖은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칼 바르트와 C.S 루이스는 동시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문헌에서도 두 사람이 만났다든지, 혹은 토론을 했다든지, 서로에 글에 대한 논평을 썼다든지 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소가 닭 보듯 했다. 왜 그랬을까? 김두한과 시라소니처럼 서로의 내공을 견주기가 두려웠던 것일까?

   칼 바르트는 인격적인 악을 부정했고 만인구원론을 주장했다. C.S 루이스는 타락한 천사를 사단으로, 그리고 지옥의 실존을 주장했다. 둘이 만나면 필경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와 부처의 대화라는 책이 있는데, 칼 바르트와 C.S 루이스의 대화라는 책이 나온다면 굉장한 관심을 끌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칼 바르트나 C.S 루이스의 글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그들의 글을 읽고 하나님을 즐거워했으면 싶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만약 하나님이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의 글만 읽을 것을 허용하신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C.S 루이스를 택할 것이다.

   C.S 루이스, 라는 이름만 들어도 나는 웬지 가슴이 설렌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나의 진정한 스승이요, 가장 격의없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과 신학, 문학 분야에서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늘 자신을 아마추어로 낮추었지만- 단순히 박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정확하고 통찰력있는 지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괴팍함이나 오만함, 또는 권위의식이 정말 털끝만큼도 없었던 사람이다. 바르트도 그런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바르트에게서는 웬지 현학적인 기품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반해서 루이스에게서는 단순한 심오함, 또는 순수함이 느껴진다.

   나는 토렌스가 쓴 바르트 평전을 읽으면서 바르트의 성품과 우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니면 그에게 가까이 가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루이스는 그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도 다정한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다. 천성적인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처절한 각성을 통해서 훈련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허세를 부리거나 사람을 무시하는 것에 대하여 몹시 분개했다.

   모든 사람에게 관대한 척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주님이 자신에게 몰려든 군중들을 바라 볼 때,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낀 것이 아니라 마치 목자 잃은 양떼처럼 불쌍히 여기셨듯이 루이스도 그랬다.

   루이스의 가장 큰 매력은 자신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똑같은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는 사랑은 주는 것이며,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최고의 애정이 상대의 자존심이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은 것이며 상대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철저하게 상대의 개성과 기질을 존중했고, 그것을 즐겼고 때때로 감탄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타인을 관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관찰한다. 만약 보통 사람이 그가 보는 것처럼 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소문난 점쟁이가 될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타인의 외모와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그것을 혐오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동정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속에도 그와 똑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악을 감지하고 그것에 분노한다.

   악의 교활함과 잔인함을 그처럼 예리하게 꿰뚫어보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로이드 죤스의 에베소서 6장 강해가 사단에 대한 치밀한 논증이지만 루이스의 스크류테입의 편지에 비교하면 격이 훨씬 떨어진다. 루이스는 사람의 속에 있는 누추하고 어두운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거기에 분노했지만 그러나 절대로 사람 자체를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에게는 무척 엄격하면서도 타인에게는 무척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종교적인 뻔뻔스러움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고 루이스에게 피신했다가 암으로 죽은 여인- 죽었을 때, 그것을 위로한답시고 루이스에게 상투적인 위로를 보냈던 국교회 성직자는 무섭게 화를 내는 루이스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마치 창녀와 세리에게 관대했던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무섭게 책망한 것처럼 말이다.

   바르트의 가장 큰 업적은 아마 계몽주의의 태풍으로 말미암아 훼손된 정통주의 신학을 다시 새롭게 일으켜 세운 점일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무기로-그들의 언어와 사유하는 방식- 자유주의 신학을 무장 해제시켰다는 것은 바르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르트의 쾌거는 학문적인 쾌거다.

   그러나 루이스는 성경을 학문적인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놀라웁게도 신화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았고, 어린아이의 동심으로 그 위대한 신화를 해석하였다. 신화가 실제적인 역사의 상징이라는 그의 확고한 신념은 단순히 성경을 변증하려는 억지가 아니라, 신화에 대한 그의 전문적인 학식이 뒷받침된 것이었다. 옥스퍼드의 중세 문학사 교수로서 그 방면에 대한 그의 전문성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영혼에 엄습했던 알 수 없는 그리움, 혹은 기쁨을- 황혼, 기러기 떼, 배의 기적소리,- 느끼면서 그것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는 결국 자기의 영혼이 가장 갈급해 하는 그 어떤 것,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그리움의 실체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그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식욕과 성욕이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듯이 영원을 사모하는 갈망도 반드시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대상이 이 세상에는 없었던 것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분명히 대상이 있으면서도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 또 분명히 존재하는 역사이면서도 잊혀지고 사라진 역사들이 다양한 신화의 형태로 전승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이야말로 신화중의 신화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성경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화들은 모조품이거?불량품인 셈이다. 글세, 내가 이거 잘못 짚은 게 아닌가 싶어 슬며시 걱정이 된다. 만약에 뭔가 잘못됐다면 그건 순전히 내 잘못이지 루이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신화를 즐겨 읽었고 자신이 직접 신화를 쓰기도 했다. 가장 위대한 동화라 격찬받는 나니아 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과 루이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들은 몇 몇 친구들과 함께 선술집에 들어가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온갖 형태의 철학적, 문학적 담론을 기탄없이 주고받았다. 아, 그 자리에 내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바르트는 천국에 가면 모차르트를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천국에 가면 탁월한 변증가이며 위대한 스승인 루이스를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다.

   (*  시온교회 황효식 목사님 칼럼은 인터넷신문 뉴스파워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황효식 목사님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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