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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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2월 13일 

두 한국인 대통령의 대조적인 전용 비행기

   1960년 4.19 혁명에 그 어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든 4.19 혁명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 엄청난 경제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를 독재자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의 역할을 휼륭히 해내신 분이었다. 해방 후 남로당의 빨갱이들의 사회를 혼란케 하던 시대 상황에서 그는 뚜렷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구축하시고 한국 사회 그 어느 곳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발 붙일 곳이 없게 하신 것이 그의 정치적 업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외교가였다. 거제도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강수를 쓰시면서 미국에서 받아내신 한미동맹도 그의 대미 외교의 커다란 업적이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시고 윤보선을 대통령,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장면내각이 들어섰다. 그러나 4.19 혁명을 통한 정권 교체를 기점으로 미국의 대한 원조 정책에 큰 변화가 온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으로 필리핀 국민소득 170여불, 태국 220 여불이었던 데 비해 한국은 겨우 76불이었다. 다행히 우리 밑에 인도가 있었기에 그나마 꼴찌는 면하였다. 세계 120여 개국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 가 바로 우리나라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꼴찌 인도보다도 경제력이 훨씬 약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인도는 좀 가난하게 살아서 그렇지 외국의 원조 없이도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명색이 농업국이면서 식량 자급자족도 못해 보리고개를 넘어야 하는 나라였다. 당시 우리의 GNP 76불 중 미국의 원조가 무려 90%를 차지하였었다. 국가 재정 중 70%는 미국이 제공하는 무상 원조였으며,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지출하는 달러가 일종의 관광수입원으로 무상원조를 제외한 한국 외화벌이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아직 우리나라에 수출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대였다. 오로지 일년에 3억불씩 제공하는 미국의 무상원조와 주한미군 병사들이 한국에서 쓰는 달러가 우리의 외화벌이의 전부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을 강제로 축출한 1960년 4.19 혁명은 이런 경제적 여건을 망각한 측면이 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미국 워싱턴에서는 왜 자기네가 한국에 무상 원조를 무한정 계속해야 하느냐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리고 자립 경제의 전망이 전혀 없는 한국에, 즉 밑빠진 독에 더 이상의 지원은 의미가 없다는 판단 하에 해마다 1억불씩 단계적 무상 원조 삭감 조치를 실시한다. 이렇게 한국 경제가 풍화 등전의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장면내각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소장이던 박정희 대통령께서 1961년 5월 16일에 조국을 경제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5.16혁명이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본래 5.16혁명은 정치 혁명이라기보다 경제 혁명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우리나라 해방 이후 년 3억불씩 지원하던 무상원조 중 해마다 1억불씩 삭감함으로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가 1억불도 채 안되었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던 것이니 만일 5.16혁명이 조금만 늦었어도 한국 경제는 부도날 뻔하였었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서 전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 서구의 경제학의 논리에서 본다면 자원 없고, 자본 없고, 기술 없고, 시장 경제의 경험조차 없는 농업국이 불과 몇년 만에 경쟁력 있는 수출 산업국으로 변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불가능이 가능케 한 우리 민족의 저력이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평소 박정희 대통령을 정적으로 여겼던 김대중 대통령의 꿈은 민족 증흥의 사명감을 가지셨던 박 대통령의 비전과 사뭇 달라 보인다. 김 대통령의 두 아들이 구속된 직후 장남 김홍일 의원이 신동아 기자와 대담하면서 그가 부친의 대통령 꿈을 도우면서 평생에 "세 가지 소원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 첫번째가 아버지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민족을 위한 대통령이 되고 그 결과로 노벨상이 따르는 것과 김대중 일가가 노벨상을 첫번째 목적으로 삼고 대통령직을 그 노벨상 수상을 위해 이용하는 소인배적 행위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기에 유리한 날자에 맞추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국민 몰래 북한 김정일의 비밀 계좌에 국민 몰래 5억불을 송금하도록 시키는 식의 국정 운영은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결코 떳떳한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의 노벨 평화상은 얼마 못가 외국인들로부터도 비난과 빈축을 살 뿐더라 자국인에게도 그가 무엇때문에 그 상을 받아야 하느냐는 의문을 살 성질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국가적 행사로 자국내 하객을 동원하여 대통령 전세기에 많은 사람을 태워 그의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 참여시켰다. 요컨대, 노벨상 수상은 김대중 일가의 꿈의 성취였음에도 마치 국가적 행사인 양 노르웨이까지 대통령 전용기를 동원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전용기와 전혀 다른 전용 비행기의 이야기를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예에서 본다. 1961년에 5.16군사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하기 위해 외국 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의 국가 신용도를 인정해 줄 근거가 전혀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그 어느 나라가 차관을 제공하려 하였겠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처럼 분단국으로 공산주의 동독과 대치하고 있는 서독에 돈을 빌리기 위해 대사를 파견해서 1억4000 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가 필요하다기에 그들을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서독에 파견할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 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눈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서독 언론은 근면한 우리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보고 대단한 민족이라며 한국인에 찬사를 보냈다. 이때부터 한국인에게는 "코리안 엔젤" 즉 한국의 천사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유럽에 처음 진출한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의 이런 모범적 근면성은 휼륭한 민간 외교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독 우호 관계가 맺어지면서 서독 뤼브케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타고갈 전용기가 없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사와 계약을 체결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것이 경제 후진국 대통령이 겪어야 했던 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를 눈치라도 채었는지 다행히 서독 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연도의 독일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전용기도 없이 서독에 방문하셔야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국민에게 근검 절약의 모범이셨다. 1979년 10월 26일에 서거하신지 며칠 지나서 당시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는 자기가 돌본 응급환자가 대통령 각하이신지를 까맣게 몰랐던 이유를 합수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 처지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좌익 집단이 원수처럼 욕을 퍼붓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은 '평범한 세이코, 멕기가 벗겨진 넥타이 핀, 해진 혁대'를 차림으로 지내셨다. 그리고 그의 거주 환경을 살펴보자. 지어진지 40년째가 되었던 청와대 본관은 대통령이 욕실에 들어가 물 트는 소리 조차 아래층에서 다 들을 수 있었다. 침실 옆 욕실 변기의 물통속에는 대통령이 아무도 모르게 넣어 둔 빨간 벽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일과시간에 사용하는 1층 집무실 옆 대통령 전용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집무실에는 선풍기와 파리채가 있었다. 기름 절약을 위해서 한여름에도 에어컨 사용을 통제했던 그는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면서 더위를 견뎠다. 벌레가 들어오면 파리채로 잡았다.

   그리고, 이런 박 대통령의 거주 환경은 한국의 좌익 집단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김대중 대통령의 주거환경과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김대중 4부자의 아방궁은 100억대 이른다고 하는데, 김 대통령 퇴임 후를 위해 마포구 동교동에 대지 177평 연건편 199평으로 지은 저택은 엘리베이터와 실내 정원 시설까지 갖춘 호화 저택이다. 이 양옥주택에는 방 8개,욕실 7개,거실 3개,창고 5개로 지하층엔 경호접견실을 마련하고 60평 규모의 1층은 방문자를 위한 객실 용도로 꾸며지고 있다. 물론, 그분의 몸이 불편하니깐 엘리베이터는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뚜렷한 직업이 없는 세 아들도 수십 억대의 호화 저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청렴 결백의 모범이셨으며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으셨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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