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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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2일 

1963년 세 한국인 지도자의 미래한국을 위한 비전

   최근 인사 청문회(2003년 4월 하순) 후에 국회가 고영구(高泳耉) 국정원장과 서동만(徐東晩) 기조실장 임명을 반대하자 노무현씨는 "지금의 어느 때인데 색깔 논쟁이냐"라는 말을 하였다. 정말로 바보 노무현씨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모른다는 말인가? 지금은 한국 전쟁 이래 적화통일의 위협이 가장 고조되고 있는 때이다. 북한이 한국의 인명과 경제를 북핵 인질로 붙잡아 놓고 미국에 일괄 타결안을 제출하면서 북미불가침조약을 요구하는 것도 적화통일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는 것이요, 삼자회담에서 한국의 참여를 배제시키려는 것도 한국 정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상징적 의미를 깔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한국전쟁 이래 이토록 적화통일의 위협이 고조된 적이 없었다. 6.25 동란 때는 우리를 위하여 수만 명의 피를 흘릴 미국이 있었지만 지난 연말의 반미촛불시위 이후 이제는 더 이상 미국이 그럴 의미를 찾기 어려운 때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적화통일의 위기는 1950년대보다 더욱 크다.

   지금 한국은 북의 이런 적화통일의 야욕과 마수에서 우리나라를 지켜줄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선거 유세 때는 북핵 위기가 없다 하고 대선 바로 전날 저녁 후보 단일화가 결렬되자 조선일보에서 대량의 무가지를 유포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등 거짓에 바탕을 두고 판단을 하는 노무현씨의 논리는 참으로 이상하다. 그는 정말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몰라서 "지금의 어느 때인데 색깔 논쟁이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다양한 경로와 매체를 통해 대한민국에 침투하고 있는 적화통일 공작 세력들을 물리쳐야 할 의무를 가진 국정원 책임자로서 친북 성향의 인물(북한 김정일 정권을 두둔하는 자)를 임명하는 그의 저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토록 지금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맡기에는 노무현씨는 너무도 바보스럽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때가 아니던가! 실로 지금은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 저항권 발동이 필요한 시국이 아니던가!

   일부 잘못된 민주화 운동 때문에 한국 국민이 이런 바보 정권을 탄생시킨 우를 범한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임을 바라보면서 그러나 미래 한국을 위해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두 중요한 연대는 1963년과 1978년이다. 소위 30년의 한강의 기적의 절정이 이 15년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처럼 천막교회들이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로 성장한 것도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지금도 많은 독일 목회자들은 1978년에 한국에서 개최던 세미나에 참석하여 받은 감명으로 한국을 기억한다. 우리나라 대졸자들이 서독에 광부와 간호보조원으로 파견되었던 것이 1963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1963년과 1978년의 한국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으로 달랐다. 수정교회로 유명한 미국의 대형 교회 목회자 로버트 슐러 목사가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에 설교하러 왔다가 그 엄청난 성전의 크기에 압도되었던 것도 그 해의 일이다. 이 시점에서 교세의 숫적 증가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1963년부터 1978년 사이의 뻗어나는 국력의 한 단면으로서 1978년에 그 교회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대단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각기 다른 위치에서 한반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한국인 지도자들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과 조용기 목사와 김일성 주석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각기 다른 위치에서 미래 한국을 위한 원대한 비전을 품었다. 정치적 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원대한 비전이, 종교 지도자로서 조용기 목사에게 세계 선교의 원대한 꿈이, 그리고 우리의 적으로서 김일성 주석이 끊임없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화통일의 야욕이 있었다.

   김일성은 우리의 적으로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시대의 요청과 국민의 지지로 그 임기가 두번 연장되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16간의 재임을 장기 집권이라고 일컫는다면 김일성은 무려 50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위기는 늘 그의 적화통일 야욕 때문에 있었다. 동독과 서독의 분단 상황은 남한과 북한의 분단 상황과 달랐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김일성의 눈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려보고 있었다. 북한은 본래 천연자원이 풍부한 땅이며 일제 시대 때 산업시설을 남한이 아닌 북한에만 설치하였었기 때문에 본래 산업 기술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 동구에서 복구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복구도 빨랐다. 그리고 1963년부터 김일성은 군사산업 증강에 막대한 예산을 퍼부었다. 오늘날 무기 수출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자체 생산할 능력을 가지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서구의 공산주의가 한(恨)이라는 민족 서민 정서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작업도 이때부터 하였다. 김일성은 우리의 적이되 나름대로 민족주의자였으며 그의 민족주의는 무력의 우위에 위한 적화통일의 야욕을 그의 가슴에 품게 하였다.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이 우리 민족에 늘 어둠의 요소였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꿈은 미래 한국에 빛을 주었다. 그가 취임하신던 1963년 새해 아침에 그는 "민족은 생명체와 같아서 꿈이 있는 민족은 번영한다"는 붓글씨를 쓰셨다. 그리고 그는 늘 꿈이 있는 지도자였다. 아직 연탄이라는 새 연료가 보편화되지 않아 서민들의 재래식 주택에서는 장작이 주연료였던 시절이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밥을 지으려면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생활 풍경이었다. 그리고 며칠씩 굶고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서민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당시 나라 경제는 부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 예산의 90%를 지원하던 미국이 무상지원액을 해마다 1억불씩 삭감하기 시작하였으므로 국고의 달러 보유고가 1억불도 채 못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와는 비교도 안되는 국가 부도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미래 한국을 위한 꿈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하였겠는가? 미국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도 먀샬 플랜에 따라 미국의 경제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가 받은 원조와 맞먹는 원조를 받은 한국의 경제 발전은 전혀 없었다. 한국은 그저 미국에서 국가 예산의 90%를 지원받으면서도 세계 최빈국들 중 하나였으며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였기에 미국도 포기하려 하였으며, 그 포기의 표시로서 무상원조액을 해마다 1억불씩 삭감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래 한국을 위한 꿈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하였겠는가? 국가의 외화 보유고는 바닥을 쳤으며, 아직 국산품 수출로는 1불의 수출 능력도 없었다. 기술도 기술 인력도, 자본도 시장 경험도, 자원도 산업시설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 한국을 위한 꿈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하였겠는가? 그러나 애국자들에게조차 한국은 약소국과 동의어였던 시대에 미래 한국의 원대한 꿈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박정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래 한국을 위한 최고의 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최상의 경제 계획을, 그리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꺽지 못할 강인한 실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꿈과 계획과 실전 의지 중 어느 하나만 결여되어 있었어도 한국은 여전히 빈농국으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농업은 식량 자급자족이 안되는 거의 불가능한 농업이기에 미국의 무상 지원마저 끊긴 한국의 운명은 지금과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꿈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꿈이요, 또 한국 경제의 발전은 그의 탁월한 영도력의 덕을 보았다. 그러나 1963년부터 1978년 사이에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도 있었다. 물론, 백년, 천년에 한번 태어날가 말가하는 이런 위대한 지도자를 괴롭힌 문익환 목사처럼 못된 종교인들도 있었지만 우리 민족에 꿈을 주는 종교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다.

   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시각에서도 볼 수도 있다. 로마 제국 시대 때 야만인들로 분류되던 유럽인들의 문명과 생활 수준이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급격히 향상되었다. 백인을 원수로 여기는 아프리카인들은 거의 없으며, 영국 여왕은 그녀의 옛 식민지에서 여전히 열렬히 받들어진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아프리카는 이제 더 이상 18세기의 아프리카가 아니다. 그리고, 미국은 기독교 신앙으로 출발한 만큼이나 위대한 나라이다. 역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축복받음을 실증한다. 성겨경이 그렇게 말하며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 민족의 1953~78년의 역사에서 가장 잘 보여진다. 영락교회는 본래 북한에서 월남한 속칭 이북 따라지들의 교회였다. 그리고 그 교회 교인들이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재계 인사들이 되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그 예이듯이,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에 국민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설교자들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경제 환경이 어려울 때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는 좌절과 비관이다. 세간에 민주화운동으로 잘못 알려진 5.18광주사태는 본래 윤상원이라는 폭도가 충동적으로 주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과 일행 두 사람이 5월 18일 아침에 윤상원의 광천동 자취방에서 폭동을 모의하였던 데에는 충동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그가 노동자 사상 교육을 위해 운영하였던 들불 야학이며 폭동 주동자들이 북한 방송을 청취하였으며 북한과 무선 교신을 하였다는 증언들은 간과되어서는 아니된다. 그가 북한에 남침의 기회를 제공하려 하였었다는 추정이 가능함과는 별도로 그가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과 더불어 김대중 선생의 집권을 원거리 지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이 그의 폭동 주동의 일차적 동기였는가? 그는 본래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생이었으나 집안 환경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막노동을 하게 되자 세상을 뒤엎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듯하다. 그러나 똑같은 경제적 역경 속에서 가난에 찌들거나 파괴적 행동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강하여져 위대하게 성장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 중 한 인물이 바로 조용기 목사이다.

   광주 폭동 주범 윤상원은 가정 환경 때문에 전남대학교 4학년 중퇴였지만 조용기 목사님은 가정 환경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중퇴였다. 그리고 그는 폐병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환자로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몸이 약해 병주머니였던 그는 위장병의 고통과 싸워가며 땅바닥에 숯으로 영어 단어를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며 독학하였다. 광주 시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유언비어 삐라를 제작하여 광주시 전역에 뿌렸던 윤상원과 달리 청년 조용기에게는 종이살 돈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졸의 학력으로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였던 조용기 목사는 지금의 학력 기준으로 따진다면 무인가 신학교 출신이었다. 그는 그러나 그는 1978년에 이미 세계적인 지도자였으며, 우리나라처럼 학력 차별이 심한 나라에서 뭇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들었다.

   신앙 생활의 목적이 물질 축복도 경제 발전도 아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정치자의 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신앙의 비전이다. 오늘날 카드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면서 각종 범죄 또한 늘고 있다. 1960년~70년대에도 경제적 실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 문제 해결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며, 조용기 목사는 그렇다고 설교하였다. 죽을 병에 걸렸으나 병원에 입원할 여력이 없는 자들이 그 문제 해결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며, 조용기 목사는 그렇게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의 장모 최자실 목사가 원장이었던 순복음금식기도원에는 사형 선고받은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믿음이 좋아서 온 이들도 있었고, 그것이 그들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직막 지푸라기였기 때문에 온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의료 보험 혜택이 없었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불치의 병 치유를 받았다.

   결코 경제 발전이 신앙 생활의 목적일 수는 없으나 신앙이 경제 발전의 큰 원동력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위대한 경제학자는 사업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으며,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업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경제학자는 그 용기를 가지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안다. 좀 무식해도 성공을 바라보고 밀고 나가는 자는 성공한다. 그러나 실패의 복병을 미리 내다보는 경제학자는 좀처럼 성공의 꿈을 품지 못한다. 이것이 경제학자가 사업가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믿음은 지식에 비례하지 않는다. 오늘의 한국 경제의 문제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설비 투자를 하기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30년 전의 사업가들에 비해 엄청난 지식도 자본도 가지고 있으나 투자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조용기 목사를 경제 이론가로서 알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 것이 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만큼 채워주셨으며 현 여의도중앙교회 부지도 그렇게 마련되었다. 물론 조용기 목사에게도 비판받을 점들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살아있는 믿음의 교훈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가난한 나라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믿음의 보화가 있었을 때 그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미래 한국의 희망이 없었던 시절에 미래 한국을 위해 기도하였던 자들의 기도는 응답되었으며, 그 가슴에 믿음의 보화를 소유한 자는 참으로 부요한 자들이었다. 만일 GNP의 기준으로만 따진다면 30년 40년 전의 한국인들은 몹시 가난하였다. 그러나 그 가난 ㅎ속에서도 그때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꿈이 있었다. 만일 지금은 200배의 고소득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꿈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시절보다 별로 부요하지 않다.

   조용기 목사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오늘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의 당회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40년 천막교회에서 미래 한국의 축복과 부요를 바라보는 설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축복의 비결은 요한삼서 3장 2절을 인용하는 삼박자의 축복이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나." 그리고 그 진리를 영접하는 자는 상대적 빈곤 문제 때문에 좌익이 될 이유가 없었다. 1632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한 청교도들의 첫 겨울은 삼분의 일이 죽을 만큼 춥고 배고픈 겨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첫 추수감사절이 시작되었으며, 미래 아메리카의 꿈과 세계 선교의 비전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미래 한국을 위한 새로운 꿈이 필요하다. 비록 박정희 대통령처럼 위대한 꿈을 가진 지도자의 재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나 조용기 목사가 품었던 신앙의 비전을 품을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나라와 미래를 위해 꿈과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원천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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