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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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24일 

어째서 518광주폭동이 반미주의의 뿌리가 되었는가?

   중국은 공산당 혁명 50년만에 반미 정권에서 완전히 친미 정권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한미동맹 50주년에 한국이 친미 정권에서 반미 정권으로 비쳐져 미국이 한국을 버릴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었다는 사실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중국이 반미에서 친미로 바뀌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중국이 급속도로 부강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은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지금 김정일의 문제는 만일 북핵 문제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 중국은 김정일 정권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1950년 9월 15일은 김일성은 적화 통일 달성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항구 도시 부산을 지키려고 배수진을 친 미군의 결사 항전의 기세가 한풀 꺽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천상륙작전은 한 달만에 그로 압록강 이북으로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때 김일성은 러시아와 중국에 긴급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러시아는 냉답하였다. 스탈린은 실용주의 계산에 빠른 인물이었다.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가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군대와 전투하였을 때도 모택동의 오합지졸이 결코 혁명에 성공할 리 없다고 생각하였었기에 오히려 국민당을 지지하였던 그였다. 그런 스탈린은 한반도 문제 때문에 미국과 불화가 생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러시아는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김일성의 지원 요청을 받은 중국의 모택동과 주은래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중국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 정부군과 전투할 때 혁명군 중 상당수가 한국인(그들은 조선인이라고 불렀음)이었다. 따라서 의리상 김일성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은래는 바보가 아니었다. 신생국인 중국이 미국과 이일로 외교가 단절되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 타격이 너무나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들은 중립국 인도 정부를 통해서 미국 트무만 정부도 맥아더 장군과는 달리 한국 전쟁이 중국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불똥이 중국으로 튀지 않으면서 김일성의 지원 요청을 들어주는 방법으로 그 수가 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자원 부대를 파병하였다. 일주일분의 미수가루만을 배낭에 넣어주고 전선에 투입한 병력, 즉 살아서 돌아올 기대를 하지 말라고 강압적으로 파병한 병력이지만 그래도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자원병 부대였다.

   한국전 참전으로 중국이 잃은 것은 너무도 많았다. 2차 대전 때는 중국이 미국, 영국과 더불어 카이로 선언을 하였던 삼대 강대국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과의 외교 단절로 국제 사회에서 더 이상 그런 정통성을 인정받기 힘들게 되었다. 조그만 섬나라 자유중국이 미국의 지원으로 급속도로 발전하는 동안 중국은 후진 농업국으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런 중국이 미국과 외교 관계를 다시 수립하는데는 꼭 30년이 걸렸다. 1970년 대초의 핑퐁 외교에서 1980년대 초의 국교 정상화에 이르는데, 이것은 1950년 10월 한국전쟁 참전으로 미국과 외교가 단절된지 꼭 십 년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중국 대학가에서 친미주의 물결이 일어날 무렵 한국 대학가에서는 반미주의 병폐가 생겼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하겠다.

   요즘 한국 국민들은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과 진부한 좌익들의 하는 짓거리를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승미외교했다고 그를 비난하는 그의 지지자들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 저 먼 후진국 촌놈들만 같아 보인다. 그들이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는 동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를 텍사스 별장으로 초청하여 같이 즐기고 한대하며 열시간 동안 회담하였다. 한미정상회담 시간이 15분으로 예정되었던 것을 30분으로 늘리기 위해 우리쪽애서는 얼마나 땀흘리며 외교해야 했던가? 노무현 지지자들에게는 한미 50년 동맹국이 이렇게 냉대받기를 원하는가? 국제사회에서 유일하게 우리 편인 미국과의 외교 단절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왕따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노무현 지지자들은 그것이 국익이라고 판단한다는 말인가!

   만일 노사모는 노무현 대통령이 방미 기간 동안 반미 돌출 발언을 하여야만 성공한 방미였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이처럼 외교에 몰상식한 노사모를 별난 촌놈들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촌놈은 이들에 대한 최고의 경어이다. 때묻지 않고 순수한 분들만 촌놈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데 노사모는 그 수장 문성근 부터가 정치적으로 권모술수군이다. 때묻은 정치 집단 노사모는 결코 촌놈이라는 칭호를 들을 자격이 없지만 이 글에서 그렇게 부른다. 어제 리영희 교수가 노무현 대통령이 무식하다고 했지만 정말로 무식한 자들은 진부하고 퇴보적인 좌익 사상을 가진 자들이라는 뉘앙스로 우리는 그들을 촌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이처럼 진부하고 퇴보적인 반미주의 병폐 징후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5.18 광주폭동 때였다. 1988년 전남대 총학생회 학술부에서 만든 책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이제야 알았다. 우리 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국군이 폭도들로부터 전라도 도청을 광주시민에게 돌려주기 위한 작전을 하던 1950년 5월 27일 새벽에 죽어가며 남긴 말이다. 만일 그가 대한민국 시민일진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는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그토록 기관총 사격을 하였으며, 또 왜 "이제야 알았다. 우리 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이라는 말을 남겼을까?

   당시 윤상원의 폭도 일행은 강제로 선량한 광주 시민들을 징집하여 그의 해방구 군사 훈련을 시켰으며, 야간에도 도청에서 무장 경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몇몇 전과범들과 깡패들을 제외한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무장을 하고 국군과 전투하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무장 해제를 하고 무기를 정부에 반납하자는 온건파들의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선량한 시민들의 의견은 윤상원이 자기가 아는 정보에 따르면 "일주일만 이대로 버티면 우리가 승리한다"는 주장에 묵살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정보는 무엇이었는가? 광주시민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광주의 방송국들을 모두 불태웠던 그는 도대체 광주시민들이 알지 못했던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 시점에서 과학적 입증은 불가능하지만 당시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그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일주일 내에 남침하겠다는 밀약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윤상원 폭도의 주동으로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사실 대다수의 광주 시민들은 무조건적으로 윤상원들에게 선동되지 않고 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편으로 윤상원에게 선동당하는 군중심리가 폭동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 개인 한 개인으로서의 광주 시민들은 다른 지역의 지성인들과 똑같은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지성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해방구 사령부로 삼았던 전라도 도청의 야간 경비대원들 대부분은 고등학생들이었다. 5월 27일 새벽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친히 인솔하시던 계엄군은 폭도들이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무기의 자진 반납을 호소하는 방송에 사격으로 맞섰다. 그리고 조국 대한민국에 충성해야 할 고등학생들이 윤성원 해방구 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하여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사격하여야 했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광주 폭동 주동자로서 해방구 사령관 노릇을 하던 윤상원에게 북한이 일주 내에 남침한다는 정보가 있었다면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도 분명 그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날 새벽이 대한민국 국군으로서는 폭도들로부터 광주시를, 그리고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출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리고 그 작전은 날이 밝기 전에 완료되어야 했다. 그것은 선량한 광주시민들과 폭동 주동세력을 구분하여 소수의 주동세력만을 제거함으로서 광주를 구원하는 유일한 기회가 그날 새벽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윤상원 폭도에게 속은 몇명의 청소년들이 당시 해방구 사령부로 사용되던 도청건물에서 야간에 총가지고 장난하다가 윤상원의 명령에 따라 국군과 시가전을 벌이던 중 쓰러졌다. 그 중 한 명이 "이제야 알았다. 우리 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제야 알았다. 우리 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 이 말은 윤상원이 폭동을 일으킨 책임을 미국에게 전가시키는 말이다. 윤상원 폭도 주동자들이 전라도 도청을 점령하여 해방구 기지로 삼았다는 사실은 전라도 행정이 열흘 동안 마비되었음을, 그리고 그 상태가 열흘만 더 지속되면 전라도의 행정 업무는 물론이요 광주의 경제도 마비됨을 의미하였다. 세상에 어느 나라가 그런 상황에서 진압군을 보내지 아니하겠는가? 그런데 그는 왜 "이제야 알았다. 우리 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이라는 말을 하였을까? 지난 23년간 한국 반미주의의 씨앗이 된 바로 이 말에 5.18 광주폭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단서가 있다.

   최초의 발포가 있었던 시각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8시경이었다. 폭도들의 공격으로부터 도청을 경비하던 소수의 국군 경비병들에게는 경비용 실탄조차 지급되지 않았던데 비해 그 중 다수가 전과범들이요 깡패들이었을 무장 폭도들은 실탄 장비를 하고 있었으니 어느 편이 먼저 발포하였을 것은 과학적으로 명확하다. 당시 희생된 시민들 중 대다수는 폭도들의 예비군용 총기에 쓰러졌다는 사실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시민군이 파출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를 탈취하여 군경을 공격한 이 날이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한 날이기도 하다. 그날 밤 도청을 정복한 폭도들은 광주 해방구를 선포함과 아울러 광주 해방구의 승리를 자축하는 도청 궐기대회를 열었다.

   국군의 진압작전이 있던 5월 27일 전날까지 연일 계속된 이 궐기 대회 기간중 간간이 폭동 지도부의 회의가 있었는데, 그 회의록 어록에 보면 놀라운 사실이 나온다. 하루는 윤상원이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일급 비밀이었다. 남한에서 5월 22일 김대중이 (1975년 월남 중부 지방에서 시작되어 월맹군 남침의 기회를 주어 4월 15일 월남을 패망케 한 민중 봉기와 유사한) 민중 봉기를 전국적으로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 전군을 휴전선 일대에 집결시켜 남침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한 미국은 즉시 항공모함을 한국에 보내 북한의 남침에 대비케 하였다. 당시 일간지들은 이 특종 기사를 보도하고 싶어했으나, 5월 17일 야간 회의 끝에 정부는 국가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항공모함 입항 사실을 특급 비밀로 붙이게 하고, 대신 5.17전국계엄령 확대를 5.18일 0시에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그 신분이 일개 노동자에 불과한 윤상원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특급 비밀을 알아냈을까? 아마도, 그것은 당시 북한 당국과 무선 교신을 하던 그가 북한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 정보의 다른 출처는 없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폭동 지도부 회의에서 그 정보를 공개한 윤상원은 두가지 제안은 내놓는다. 하나는 도청 궐기대회에서 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반미대회를 하자는 제안이요, 다른 하나는 광주 시내의 외국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인질로 삼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폭동 지도부에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몇몇 대학생들도 있었으며, 지금 반미시위를 하면 광주 민심이 그들에게서 돌아설 것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이렇게 하여, 1980년 5월 25일 도청 궐기대회에서 윤상원은 그가 계획하였던 반미시위와는 정반대의 말을 한다. 그는 "미국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하러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이 광주 시민을 모두 죽이러 오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광주시민들이 그 거짓말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에 속는 것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또 한 거짓말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하러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말이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비용을 들이면서 미국이 항공모함을 급파하여야 했을 만큼 윤상원이 광주 폭동을 김일성이 남침 기회로 삼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이 뻔뻔한 광주 혁명가는 "미국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하러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 국민은 아무도 모르고 있던 항공모함 입항 사실을 윤상원이 광주의 방송국들을 모두 불태운 광주 시민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제야 알았다. 우리 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 이 애처로운 말은 윤상원에게 속은 자들이 가졌던 비뚤어진 생각이요. 이 비뚤어진 시국 인식이 반미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요즘 화물연대며 공무원 노조며 전교조 및 각 이권 단체들이 저마다 이권 주장을 하는데 인권운동가 출신 노무현 대통령이 기뻐 뛰어야 할 노릇 아닌가1 그럼에도 왜 그는 국가 긱강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의 말을 하는가? 그것은 이 인권운동가가 보기에도 국가 기강이 흔들리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5.18 폭동 진압을 하고 안하고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다. 만일 폭동을 진압시키지 않았다면 설사 전쟁은 미국 항공모함이 막아준다고 하더라도 당장 광주의 생필품 보급이 위기에 처한다. 따라서, 국민을 재난으로보터 보호할 자주권의 차원에서 정부는 군에 진압 명력을 내렸던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자주권 행사의 문제이지 결코 미국이 간섭할 내정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미국이 긴급 출동하여 항공모함을 부산항에 입항시킨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강탈하려는 북한의 남침 저지를 위한 미국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공산당 자치 구역의 의미인지도 모르고 폭도들의 해방구에 갇혀 있는 광주 신들에게 도청과 광주시를 되돌려 주기 위한 최규한 대통령 정부의 진압 명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진압 작전도 우리의 휼륭한 주권 행사였다. 그럼에도 주권 행사를 거꾸로 이해하는 무리들이 미항공모함이 한국 정부의 5.18광주 폭동 진압을 막지 않은데 대한 불만을 반미주의로 표출하며 주사파를 결성하였다. 이렇듯, 한국의 주사파의 첫 출발점은 반미주의자요 5.18광주폭동 주동자였던 윤상원의 거짓말 "미국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하러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말에 대한 기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광주시민은 북한의 남침을 바랐는가? 아니다. 당시 미국의 항공모함이 북한의 남침 위기로부터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다! 광주시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며 국익을 원하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항공모함이 우리를 지켜주기 위하여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반미주의를 품을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듯, 5월 27일 새벽 누군가가 "이제야 알았다. 우리 정부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 . ."이라고 한 말에 한 가닥의 진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나라가 국방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미국이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우리 정부 뒤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미주의의 이유가 아니라, 우리 한국인이 미국인의 우정에 감사를 느껴야 할 이유일 것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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