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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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월 19일 

반미시위에 이용한 자들을 사형시키는 공산주의자들의 생리

   여기 두 여중생 과실 사고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소파 개정 요구는 실은 처음부터 북한 김정일 정권이 주도하였거나 개입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보도 자료가 있다. "N. Koreans demand SOFA termination following girls' deaths"이란 제목의 영자 기사를 읽어 보라. 남한의 동포를 핵인질로 삼아 위협하며 미국에게 원조를 요구하는 파렴치한 김정일 정권이 언제부터 남한의 동포들을 그토톡 사랑하여 지난해 6월 19일부터 남한의 주한미군 소파 개정 요구를 해왔다는 말인가? 이후 북한 공산당 정권은 그 수가 무려 오만명에 달한다는 남파 공작원들에게 두 여중생 과실 사고를 빌미로 소파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선동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아무리 김정일이 무식하며 돌대가리라도 주둔군 병사가 공무 중 범한 과실 사고는 파병국 관할이라는 사실을, 따라서 전세계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 국제 협약을 한국에서만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함을 모를리 있겠는가? 오히려, 업무상 과실의 관할은 주둔군에 있다는 국제 협약 때문에 이 조항의 소파 개정이 불가능함을 이용하여 미국과 한국을 이간시키는데 최대한 이용하고 남한에서 친북 세력을 키운 다음 핵무기로 위협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 시키려는 것이 김정일의 꼼수였다.

   그런데 김정일의 이 비열한 꼼수는 그의 아버지 김일성의 음흉한 꼼수와 비슷한 점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김정일이 아무리 이런 꼼수를 써도 대한민국 국민은 일치 단합하여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할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민족의 원흉 김정일에게 충성하는 한총련, 통일 연대, 범대연 등 남한 내의 좌익 친북 세력에 어떤 일이 닥칠까? 여기 그들이 당하게 될 일들을 암시하는 역사 실화가 있다.

   일제 시대의 공산주의 지도자는 실은 박헌영 씨였다. 공산주의를 자자손손 권력의 대를 잇는 세습 왕조로 착각하는 김일성과 달리 박헌영은 정통 공산주의 이론가였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자 러시아군 중위라는 것 외에는 공산주의 이론에 생판 무식인 김일성을 데리고 러시아군이 한반에 들어온다.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기 일주인 전에 일본에 선전포고한 것 외에는 한국 민족을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러시아 군이 국경을 넘어 계속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CCA로부터 보고 받은 워싱턴 행정부는 항의하며 삼팔선 이남까지 남하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2차대전 종전 후 맥아더 장군의 일본 주둔군 외에 전 병력을 제대시키던 미국도 부동항에 욕심이 있는 러시아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되어 러시아군의 남쪽 행군을 저지하려 황급히 병력을 남한에 파병한다. 해방 한달 후 이렇게 하여 우리 민족의 손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헌법을 제정하며 대통령 선거를 하는 민주주의 정부 수립 준비 작업이 미군 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이행된다.

   이렇게 하여 해방 후 남한은 미군 군정 하에서 일본 총독부의 정권 인계를 받고 북한 역시 러시아 군정 하에 공산 정권 수립 작업이 시작되자 공산당은 김일성의 북로당과 박헌영의 남로당으로 갈라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삼년간의 군정 기간 동안 북한에서는 러시아 군의 지원 하에 김정일이 주석의 자리에 오르나, 남한미군정 하에서는 미국이 공산주의 사상가 박헌영이 아닌 이승만 씨를 대통령 후보로 후원하였다. 1945년 8월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월에 북에서도 인민공화국이 건설되자 박헌영은 활동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럼에도 그의 남로당은 꾸준히 주한미군 철수의 구호를 외치면 반미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1950년 봄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회동하여 요즘 한총련이 김정일과 주고 받는 대화와 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한다. 다음은 주한미군 철수의 기미가 보일 무렵 남과 북의 두 공산당 지도자가 주고 받은 어록의 일부이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만들고 정권을 잡았으나 전국은 남로당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럼 남쪽까지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만들 방법은 없습니까?"

   "내가 그걸 말하려고 수령 동지를 만나러 왔습니다. 이승만 일당은 한 방이면 날아 갑니다. 스타린 동지와 상의해 주시지요."

   "네 알겠습네다. 박헌영 동지."

   6.25 동란은 이렇게 하여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승승장구하며 열흘 만에 부산을 제외한 전 지역을 정복한다. 인민군의 남침 일주일 후 일본 주둔 미군 병력이 파병되나 비전투병력이 대부분이었던데다 미처 지형도 익힐 틈도 없고 M-1소총밖에 무기가 없던 터라 인민군 기갑 부대의 포화와 러시아제 아까보 소총의 맹렬한 공격 앞에서 미군도 연전 연패하며 퇴각하였다. 부산을 유일하게 후방으로 남긴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이 석달간 필사의 저항을 하나 십만 명의 미군 병력이 희생되었으며 이 끝없는 소모전을 위해 더 병력을 파병하기에는 미국 내의 반전 여론이 너무 거세었다. 워싱톤 행정부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소모전을 중지하고 한국 전쟁에서 손을 영영 떼기로 결정한다. 그 대안은 한국인 십만 명을 제주도로 이주 시켜 대만과 같은 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유지시키는 조건으로 인미군과 정전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련의 역사를 거친 한국이 완전 공산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 행정부의 이 결정에 따르기를 완강히 거부하며 자기에게 한번의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다. 그 판국에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공격을 받으면 큰 병력 손실이 있을 것이 우려되어 미국 국방성은 허락을 머뭇거린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인천 월미도 앞 바다의 수심이 워낙 깊어 적의 사령관은 방심하고 방어 병력을 배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워싱턴의 군사참도들을 설득한다. 혹 맥아더 장군이 미친 것은 아니기를 바라며 작전 허락을 해주자 맥아더 장군은 적의 시선을 낙동간 전선에 집중시키면서 극비리에 미해병대의 상륙작전 준비에 착수한다.

   이리하여 1950년에 9월 15일에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저 유명한 인천 상륙 작전이 실시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 장갑차 부대의 양동 작전으로 뜻밖의 허를 찔리고 후방 보급로가 완전 끊긴 인민군 병력은 고립되어 지리멸렬하게 되고 9월 18일 서울이 수복되자 박헌영은 그가 더 이상 서울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는 후퇴하는 인민군 병력을 따라 평양에 도달한다. 그러나 평양에 오자 마자 기다린 것은 김일성 주석의 환영 대회가 아니라 인민 재판이었다. 죄목은 그가 친미주의자, 즉 미국 스파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남한의 반미 시위 주동 세력이었던 남로당 지도자가 친미주의자, 미국의 스파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 오늘날 두 여중생 시신 사진만 가지고 두 미군 병사를 살인마로 규정하는 범대위의 인민재판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김일성이 바로 그 수법으로 자신보다 똑똑한 인재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였다는 사실이 박헌영 씨가 남로당 지도자를 가장한 친미주의자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말이 안된다. 그러나 그들은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한다. 지금도 김정일의 하수인 집단인 범대위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문인이자 "김일성과 박헌영" 연구가인 송우 씨는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된 박헌영 씨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그러면 민족을 피비린내 나는 살륙장(殺戮場)으로 내 몬 박헌영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던가. 공산주의자들은 거짓과 뒤짚어씌우기의 선수들이다. 박헌영은 미제국주의자의 스파이로 암약하였다는 거짓 반역죄(反逆罪)를 뒤짚어 쓰고 황천지객이 되었다. 박헌영은 통일 조국이라는 꾀를 내었으나, 결국은 민족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을 꾀를 내었던 것이다. 그것도 총살(銃殺)! 말이다.

   이어 김일성은 남로당의 공산당 간부들을 모두 같은 방법으로 사형시키고, 그 다음 숙청 대상은 중국 팔로군으로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애국지사들이었다. 그들 모두 역시 인민재판을 받아 반동죄로 사형되었다. 오늘날 범대위의 돌대가리 아저씨들이 그렇게 하듯 돌대가리 빨갱이들에게는 처벌의 목적만 있으면 죄의 증거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헌영 씨와 남로당의 공산당원들 및 공산당 지지 좌익 인사들과 팔로군 출신 독립지사들을 모두 인민재판으로 처형한 공산당의 그 테러의 한 단면이 범대위의 이번 촛불 시위에서 그대로 보여진다. 군인으로서 수도권 방어 훈련 업무 중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윤화 사고를 당한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을 그들은 살인마라고 부르며 살인죄를 적용하는 처벌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빨갱이 세계에서 사람을 증거 없이 처형하는 인민재판은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른다. 마치 범대위 아저씨들을 따라 청소년들이 "처벌하라"고 고래고래 악을 썼던 것처럼, 남로당 간부들을 처형하라는 선창 구호를 따라 복창하였던 팔로군 출신 공산당원들 역시 인민재판의 형틀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정복하면 제일 먼저 좌익을 사형대에 세우는 빨갱이의 생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유세계를 배신한 자들이 공산주의의 폭정을 제일 먼저 배반할 자들이라는 것이 저들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네가 반미시위에 이용한 자들에게 친미주의자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사형시키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생리이다. 이북 빨갱이는 남한 빨갱이들 혹은 남한 좌익에게 밥그릇을 나누어주기는 커녕 사형시킨다. 저들은 한국전쟁 때도 그렇게 하더니 1975년 월남을 적화통일한 후에도 그런 논리로 구백 만명을 학살하였음을 우리는 보지 않았던가.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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