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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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26일 

김대중의 홍위병 그리고 한 무명 폭도의 5.18 광주 비화

    5.18 광주 사태를 최규하 대통령의 제4공화국 인사들을 비롯하여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과 노태우 대통령의 제6공화국 인사들은 우발절 사태로 규정지었었다. 그렇다. 분명 우발적 사태였다. 그러나 이 우발적 사태는 결코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라 그 뿌리가 있었다. 시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뿌리는 5월 16일 오후 6시에 이화여대 강당에서 민중 봉기 거사를 준비하던 김대중씨의 운동권 학생들이 연행된 사건이었다.

   다음날인 17일은 토요일임에도 그날 운동권 학생들의 자백으로 김대중씨의 내란 음모가 밝혀짐에 따라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된 또 하나의 이유는 북한 인민군의 휴전선에 총집결함에 따라 미 항공모함이 한국을 향해 오고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나라가 전쟁 발발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그 특종기사를 신문사들은 무척이도 싣고 싶어했으나 국무회의는 장시간의 회의 끝에 나라 경제에 미칠 파장을 위해 싣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비록 경제와 수출에 미칠 영향이 크더라도 일간지에 그 기사가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면 5.18 광주 사태의 비극은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전쟁 발발을 막으려면 김대중씨의 민중 봉기 거사 계획을 저지시켜야 하고 따라서 17일 24시(혹은 18일 0시)를 기해 비상 계엄 선포 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하는 것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쟁 발발 위기의 배경을 모르는 전남대 학생들은 계엄 선포 지역 확대를 그저 민주화 운동 탄압으로만 받아들이고 정부를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 5.18 폭동의 원뿌리는 김대중씨의 홍위병들이 대학가 안팎에서 벌이던 시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대학가 내에서 김대중 지지 세력이 아ㅣ닌 자들로 분류되는 총장들과 학장들을 어용 교수로 몰아 퇴진시키려는 시위가 그해 봄에 전국 대학가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김대중씨의 홍위병들인 386 운동권 학생들이 총장실에 난입하여 농성을 벌이는 사태 때문에 총장실과 학장실 주변에 책상으로 바리케이트를 쳐야 하는 사태가 전국 대학가에서 일제히 빌생하였으니 우리는 과연 이것이 민주화 운동이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사람을 잘 속이는 김대중은 그것을 학원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하지만 아마도 우리는 그것은 친공산주의자 김대중의 혁명 방식이었다고 말하여야 함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요즘 각종 이익단체들의 이권 쟁취를 위한 시위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이 어찌나 밀어붙이기로 정부를 압박하는지 인권변호사 출신 노무현 대통령도 과연 이것이 자기가 바라던 민주주의였는지 회의를 느끼고 있다. "대통령 못해 먹을 것 같다"고 한 말의 속뜻은 민주주의에 대한 갈등이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면 민주주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장기적 안목에서 국가에 자살 행위와 같은 이런 고질적인 시위 전통은 1980년 초에 김대중의 홍위병들이 먼저 시작했다.

   그해 봄에 각 도시 거리에서는 김대중 홍위병들이 주동하여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실업자 신분의 김대중이 누구이길래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다는 말인가? 최규하 대통령은 헌법 개정과 대선 관리라는 정치 일정을 통해 양김씨에게 정권을 넘길 의사를 공식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무조건 하야를 요구하였으며, 시내에서 학생들을 시켜 화염병 투척 시위를 벌이게 하였다. 그것이 민주화 운동인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과도 정부의 역할을 위해 취임하신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하라고 하면 무정부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치룬단 말인가? 우리는 법치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절차조차 무시하였던 친공산주의자 김대중이 과연 민주 운동가였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김대중은 제4공화국은 유신 잔당이므로 모두 퇴진하라는 비민주적인 요구를 하였다. 대다수 국민이 유신을 지지하였음에도 자신의 집권 야욕만 앞세웠던 그는 독재적 기질이 다분히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이런 독재적 제왕 스타일은 그가 훗날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여전하였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도 박정희 대통령처럼 4선 대통령이었다. 지병으로 1945년 4월에 서거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임기는 아마 30년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는 박정희 대통령처럼 성공적인 경제 개발을 하는 대통령이었기에 한국 국민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장기 집권을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임 최규하 대통령은 4년 임기를 다 채우시겠다는 것도 아니요 일년만 시간을 달라고 하셨는데도 김대중은 하야를 요구하였다.

   1980년 5월 22일은 김대중의 운동권이 주동하는 거국적 민중 봉기 예정일이었다. 우리에게는 그가 얼마나 큰 규모의 민중 봉기를 일으키려 하였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의 거사와 더불어 남침하기 위해 북한에서는 5월초에 이미 전시사령부를 구성하고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시사령부는 남조선의 데모가 확대되고 광주사태가 다른 도시들로 확산될 경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원병의 기능을 담당할 참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 무력부' 직할 '전시사령부'는 특수게릴라 훈련을 받은 강력한 124군부대 등 10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주력부대가 휴전선과 수도서울에 근접한 황해남도 해주와 개성 부근에 집결했던 것이다.

   주한미군 정보기관은 북괴군의 이런 동태를 인공위성 사진으로 잡았으며, 일본 요꼬스카에 있던 미7함대 항모 미드웨이를 주축으로 한 태스크 포스(함재 폭격기와 함포 및 상륙부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가 구성되어 한반도 해역으로 급파 되었다. 한국에서도 5월 20일 특명을 받은 제20사단 (사단장 박준병소장)이 광주에 특파되어 폭동이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으며, 폭도들이 광주교도소 습격을 저지하고, 5월 27일 새벽에 완전 진압에 성공했다. 이런 국군의 신속한 작전 때문에 북괴 당국은 한발 늦었으며 그들의 제2의 남침기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하여간 북한의 당시 이런 동태로 보아 김대중은 당시 구대데타로 정권을 장악할 기도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비록 북한의 남침은 막을 수 있었을지언정 당시 정부와 국군은 김대중 지지 세력에 의한 5.18 폭동 발발을 막지는 못했다. 사실 이 불행한 사건은 한 무명 인물의 거짓말 때문에 일어났다. 시위란 시위는 다 참가하는 광주의 혁명가 윤상원은 평소 공산주의 서적에 몰두하던 인물이었는데,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헌과 일행이 그를 찾아간 것은 5월 18일 아침이었으며, 김대중의 민중 봉기 거사는 커녕 시위 지도부도 당국의 검거를 피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윤상원은 즉각적으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날 일요일이었던 그날 휴교령이 내린 전남대에 윤상원의 연락을 받은 전남대 학생들이 모여 들었으며, 방금 도착한 계엄군은 휴교했으니 귀가하라고 하였다.

   물론 광주 사태는 처음부터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분더러 아직 전남대 학생들도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어용 교수 퇴진 요구,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申鉉碻) 총리 퇴진 요구 시위를 선동하던 김대중은 5월 22일로 예정된 민중 봉기의 퇴진 요구 대상자 명단에 미래의 인물 전두환의 이름도 포함시키는데, 그 대자보를 대학가 벽보에 붙이기로 예정된 날이 19일이었다. 따라서 18일 아침 현재 시간으로는 전남대 학생들에게 미래의 인물 전두환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처음부터 광주 사태는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전남대 학생들은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인 줄 알고 교문앞으로 모여들었다.

   여기 당시 전남대의 시위 양상에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다. 김대중측의 본래 거사 예정은 19일부터 대학가 시위를 시작하여 22일에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중 봉기를 일으키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유독 전남대만 그 시위가 14일에 시작되었다. 아마 그것은 당시 운동권으로 총학생회장이 된 박관헌의 김대중에 대한 과잉 충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5월 14일 13:00에 만 명도 넘는 전남대 학생들은 가두진출 시도하여 경찰과 치열한 대치하다가 경찰 저지 각개격파로 뚫고 도청앞 광장에 집결하여 '민주화성회'의식을 진행한 다음 전남대에서 철야 농성을 하였다. 다음날인 5월 15일에도 13:00에 경찰의 별다른 저지없이 도청까지 시위하여 '민주화성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시위대 수는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생 등을 합하여 1만 6천 여명이었으며 최규하 대통령의 조속한 하야를 촉구하였다.

   다음 날인 5월 16일 시국성토대회는 오후 세시에 시작되었다. 이날 도청앞에 집결한 시위대 수는 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 조선대공전, 동신실업전문, 송원전문, 성인경상전문,기독병원간호전문,서강전문대 등 9개 대학교 학생 3만여명이었다. 이날 오후 6시에 횃불 행진을 하는데, 아무리 김대중에게 빨갱이 사상이 물들었기로서니 이들은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박정희 대통령은 온 국민이 지지하는 영도자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인민재판을 하고 '5.16 화형식'을 거행하였으니 김대중에 대한 과잉 충성이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애국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는 천인 공노할 일이었다!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여야 할 우리의 대학생들을 김대중 정치군이 허구헌날 거리에서 자기를 지지하는 시위, 자신의 정적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게 하였기에 오늘날 386정치권은 정치적 권모술수만 알고 머리속에 든 것이 없다고 하며, 또 그것이 노무현 정권의 결정적인 취약점이라고 한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5.18 광주 사태는 처음부터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며, 최규하 대통령 빨리 하야하고 김대중 선생을 빨리 대통령 자리에 앉혀달라는 요구로 시작된 시위였다. 김대중의 미래의 정적으로 예상되는 인물들 중 하나로서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을 퇴진 대상 리스트에 포함시킨 대자보는 19일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측에서 운동권에 내려보낸 이 대자보를 보면 모르는 사람들은 속을 만큼 전두환 합수부장에 대해 잔혹한 악평을 하였으며, 실제로 전두환 전 대통령은 휼륭한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늘어놓은 악평이 그에 대한 선입견으로서 여태껏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물론 이 대자보는 전남대 학생들이 그들이 일으킨 광주사태 때문에 볼 기회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대학 중퇴자로 노동자였으며 폭동 주동자였던 윤상원에 의해 그 악평은 엄청난 유언비어로 증폭된다. 분명 윤상원도 5월 18일 폭동 모의를 할 때 비로서 처음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상소설을 쓰는 일도 아니거늘 그는 어떻게 그토록 악랄한 거짓 유언비어들을 대량 제조하여 폭동을 선동하였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5월 18일 시위의 목적은 무엇인지도 모른채 불려나온 500명 여명의 전남대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에 집결한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어떻게든 국군 장병들을 흥분시켜 과잉 진압을 유도하여 폭동 선전용으로 삼으려는 윤상원 폭동 지도부는 흉기로 장병들을 위협하였으나 장병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부동 자세를 유지하였다. 이에 10시 20분에 학생들은 투석전을 시작했으나 돌에 맞아 뼈가 부러지면서도 장병들은 끔쩍하지 않았다. 군인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데 시위대를 자극하지 말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비록 폭동 주동을 시작하였으나 윤상원은 학생 신분도 아니었으며 아직 폭동 지도자라는 직함도 그에게 없던 때였다. 따라서 왜 불려나왔는지 이유를 모르는 전남대 학생들은 지난 주 시위 때의 버릇대로 시위 장소를 광주역 앞으로 옮겼으니 그 때가 10시 50분이었으며, 모인 학생수는 200명이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전남대 학생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무슨 시위 명분으로 불려나왔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은 그냥 흩어져 귀가하려고 했으니 이때가 오전 11시였다. 이때 누군가가 "군경이 전남대 학생회장을 잡아다 죽였다"고 외쳤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단 한마디의 짧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군인과 경찰 등 근 이백 명의 희생자가 생기게 하는 시가전을 야기시키는 거짓말, 한국사에 비극의 얼룩이 지게 하는 거짓말이었다. 당연히 지성인이라면 그 거짓말의 출처를 확인한 다음 행동하여야 하나 그 거짓말에 속고 선동된 전남대 학생들은 그대로 달려가 충장로 파출소에 돌을 던지니 이렇게 대학생 시위대가 폭도의 성격을 차츰 띠기 시작한 때가 오전 11시였다.

   그 거짓말은 누가 하였을까? 아마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200명의 당시 전남대생은 누구의 거짓말인지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한명이라도 진실을 밝히는 양심 선언을 하는 날 5.18 광주 폭동의 수수께끼는 풀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날 예비군 무기고 탈취를 선동했던 윤상원이, 그리고 훗날 폭동 열기가 식어갈 때마다 악성 유언비어들을 제조하였던 윤상원이 모처럼의 폭동 발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그런 거짓말을 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이 광주 파출서들에 투석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광주 사태는 단순 시위가 아니라 폭동의 성격을 띠게 된다. 과격 행동은 과잉 반응을, 과잉 반응을 또 다른 과격 행동을 유발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동안 폭동을 선동한 자들이 주장하는 대로만 광주 사태를 바라보았던 광주 시민들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사건 전개가 있다. 대낮에 학생들이 폭도로 변하여 광주의 파출서들에 투석하는 동안에도 계엄군은 전혀 진압 작전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 시점까지 만일 과잉 진압이 있었다면 그것은 광주 경찰의 과잉 진압이었다. 여기서 계엄군의 진압과 광주 경찰의 진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시점까지는 시위 진압은 광주 경찰의 역할이었으며, 계엄군은 단지 대학교 정문 경비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날 몇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시위에 참석하는 폭도 수는 오후 2시 42분에는 그 수가 삼천 명도 넘게 불어나 경찰차를 불태우고 파출서들을 닥치는 대로 부스자 전라도 도지사와 광주 경찰서의 지원 요청으로 마침내 계엄군이 진압 작전을 시작한 때는 정확하게 오후 4시 40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9일 오전까지 계엄군의 진압은 폭도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소극적 진압이었다.

   19일 오전부터 폭도들은 화공약품점, 제재소, 철근 등의 건자재상, 공사장 등에서 각목 철근, 쇠파이프, 화염병 등으로 무장하였으며, 따라서 시위대와 군경의 충돌은 구체적 무장 투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광주시의 치안과 질서 회복을 위한 계엄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폭동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을 본 정부 당국은 이날 밤 가급적 시위대의 공격에 계엄군은 맞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5월 20일 오후 3시 40분경 금남로위 시위에는 폭도 윤상원이 선동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더욱 격렬한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의 투쟁 구호가 "계엄군을 죽이자"였던 것으로 보아 배후 선동 세력이 북괴였던 것으로 관측된다. 그리고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이날 투쟁 구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생전 처음 들은 이들이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고 외쳤다는 사실은 빨갱이들의 선동 방식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계엄군은 되도록 폭동 진압에 나서지 말라는 정부 당국의 전날 밤의 방침에 따라 20일의 폭동 진압도 광주 경찰이 했다. 그러나 폭도들이 대형트럭 4대, 시내버스 11대, 택시 200여 대를 몰고 선두에서 무서운 속도로 금남로의 군경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진하였기에 군경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밤9시 경에 시청을 접수한 폭도들은 파출서에 화염병을 던져 방화하였다. 더욱 폭동의 군중심리가 거세어진 폭도들은 시위군중은 가장 먼저 도심에서 가까운 세무서를 습격, 방화하는 한편 예비군용 무기고에서 칼빈 총을 탈취해 냈다. 비로소 시위군중의 무장화가 시작되면서 시위는 무장 투쟁의 형태로 치닫게 된 것이다. 폭동 지도부는 차량을 통해 시외곽 지역을 돌며 선량한 시민들을 속여 동원하였기에 시위참가 인원은 25만을 넘고 있었다.

   밤 11시경에는 MBC건물이 시위군중에 의해 불타올랐다. 폭동 지도부가 신문사, 방송국들에 방화한 이유는 시민들이 사실을 알지 못하여 폭동 선동을 더욱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날 밤 폭도들은 MBC, KBS 등의 방송국들 외에도 관공서는 광주세무서, 도청차고, 16개의 파출소와 노동청 등에 방화하였다. 무장 폭도들은 21일 오전에 도청, 전남대, 조선대, 교도소를 제외한 시내를 거의 장악하였다. 이에 기세가 더욱 동등해진 폭도들은 아세아 자동차 회사로 가서, 장갑차를 비롯한 차량 200여대를 인수받아 이를 몰고 금남로 쪽으로 밀고 들어 왔다. 이들은 장갑차 위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도청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이날 도청을 경비 중이던 국군 장병들이 시민군의 장갑차에 무참하게 압사당하면서 당시 수십만의 폭도들에게 포위되어 있던 병력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비로서 계엄군에게 경비용 실탄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오후에 화순 방면으로 간 폭도들의 차량은 광산의 TNT를 탈취하였으며, 나주방면으로 간 차랑은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M1 200정, 칼빈소총 500여정, 탄알 5만발을 탈취하여 왔다. 이즈음 100∼150여명의 폭동 주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폭동지도부(그들은 투쟁지도부라 부름)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10대 후반과 20대가 주류를 이루었고, 직업별로는 노동자, 종업원, 구두닦이, 근로대중이 대부분이었고, 교련복 차림의 고등학생과 예비군복 차림의 30·40대도 눈에 띄었다. 빨갱이 단체 들불야학이 주축이 된 폭동지도부는 목포, 영암, 장성, 나주 등 17개 지역으로 진격시켜 민중봉기를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북한에 남침 기회를 주려는 듯 폭도들은 정치범과 흉악범 삼천 명이 수용되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이때부터 끈질기게 공격하였으나 용맹한 국군 장병들이 막아냈다. 그러나 저녁 7시쯤 폭도들의 총공세에 밀려 국군 경비대가 전멸의 위기에 처하자 전남도청과 전라남도 경찰국을 버리고 도심에서 철수했다. 광주시가 폭도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 순간이었다.

   폭도들이 광주시민들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방송국들을 불태우고 유언비어 삐라를 뿌려 폭동을 선동하였으나 결코 광주 시민 전체를 기만하지는 못하였다. 5월 22일 낮 목사 신부 학생 변호사 관료 교사 등 광주시내의 지도급 인사 15인으로 '5.18 사태 수습대책위원회(혹은 시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온건파의 의견을 속칭 과격파는 폭동 지도부는 묵살하였다. 폭도들의 무기 자진 반납을 인내하며 기다리던 정부가 더이상 방관할 수 없어서 마침내 폭동 진압 방침을 정한 것도 이날이었다.

   그러나 5월 24일 폭도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는 정부는 폭도들이 지금이라도 무기를 자진 반납하면 무기 탈취죄, 군경 살해죄, 관공서 방화죄 등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겠다고 하였다. 온건파도 정부의 의견에 찬성하였으나 무기와 폭력으로 온건파를 위협하던 폭동 지도부는 끝내 온건파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온건파 시민들은 폭도들의 감시망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무기를 버리고 도청을 빠져나왔다.

   5월 26일에도 수습위는 투항파와 투쟁파가 논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폭동 지도부 청년 200여명이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YWCA에서 농성했는데, 이들 중 주류는 무직자, 단순 노동자, 가게 종업원, 구두닦이, 고아, 빈민층이었다. 5월 27일 새벽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외곽 진입로를 봉쇄하고 마침내 폭동진압작전을 시작하자 윤상원의 폭동 사령부도 즉시 시가전 작전에 착수하였다.

   한편, YWCA에서 농성 중이던 청년들은 무장을 한 후 전일빌딩 옥상, YWCA, 계림국교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박영순(송원전문 2)이 가두방송으로 시민들을 동원하여 시민들이 도청으로 집결하는 중 계엄군과 시가전이 벌어져 양편에 10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새벽 4시 10분 경, 도청을 포위한 계엄군 중 도청 후문 쪽의 공수부대가 가장 먼저 도청에 진입하여 시작된 군에 의한 도청탈환작전은 양편에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며 진행되다가 4시 55분 도청 내에 남은 몇 몇 시민군의 투항으로 막을 내렸다. 폭도들의 사격이 더욱 격렬하였던 전일빌딩 시가전에서도 20명의 사상자를 내며 오후 2시에 종결되었다. 광주를 폭도들의 손에서 되찾아 광주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우리 국군의 폭동진압 작전은 이렇게 성공하였다.

   사실 이 유혈 폭동 발생에 대한 박관현 회장의 책임은 크다. 5월 18일 11시에 광주역앞 시위장소에서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군경이 그를 잡아다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림으로 단순 시위는 폭동으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그리고, 혹 김대중 선생의 민중 봉기 거사 계획에 차질이 생겨도 전남대 학생들은 시위장소에 집결하라고 지난 16일에 당부했던 자도 박관현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5월 18일 11시에 그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서울의 거사 계획이 이화여대에 모였던 주동학생들이 연행되므로 수포가 돠고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연락을 받자 마자 박관현은 잠시 윤상원 자취방에 들러 그의 폭동 제의에 동의한 후 바로 무등산장으로 피신하였던 바 함께 피신한 일행 중에 양강섭 총무부장과 김영후, 차명석, 문옥희 등이 있었다.

   5.18 광주 폭동 왜 일어났는가? 그 뿌리는 어용교수 퇴진 요구 시위, 최규하 대통령 하야 요구 시위, 5월 22일 민중 봉기 거사 일정 등 속칭 386 운동권인 김대중의 홍위병들의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김대중이 의도적으로 주동하였다고 말하기에는 5.18 광주 사태는 너무도 우발적으로 일어났다. 전남대 학생회자의 신변에 대하여 누군가가 사실 무근의 악성 루머를 퍼뜨려 군중 심리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미확인 유언비어에 선동되어 경찰차에 불지르고, 파출소를 때려부수고, 방송사들을 불태우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아세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탈취하여 선량한 국군 장병들을 압사시키고, 심지어 어제의 학생이요 내일의 시민인 대한의 용사들에게 마구 사격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인가? 물론 젊은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 그러나 머리마저 뜨거운 것이 민주화 운동인가?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의 폭동진압 관련 유언비어들도 모두 사실 무근이다. 합수부장에게는 휘하에 통솔할 병력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째서 그 어른에게 그토록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가? 거짓이 진실을 누르며 유언비어가 사실을 지배하는 것이 정상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제는 유언비어는 유언비어라고 말할 때이며 우리 모두 진실 편에 서야 할 때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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