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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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8일 

미국은 왜 참전했으며 맥아더는 한국을 왜 구했는가?

   이라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에 대해 미국인들은 놀랄 만치 무관심하다. 이것은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에게 해임당한 맥아더 장군이 귀국하자 뉴욕 연도에 7백만이 넘는 환영 인파가 몰려나와 열렬히 환영하였다는 것에 비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날 맥아더 장군이 귀국하던 날 뉴욕시 고층 아파들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색종이가 휘날리며 전 뉴욕시를 덮었으며, 연도에 미처 나가지 못한 시민들도 모두 옥상과 베란다와 창가로 모여들어 그를 환영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 역사의 명연설문 중 하나로 꼽히는 그의 귀국 연설을 그가 즐겨 부르던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just fade away)라는 말로 마무리하였을 때 전 미국은 함께 울었다.

   그날 뉴욕의 7백만 환영 인파는 물론 전 미국 국민이 방송으로 맥아더 장군이 귀국 연설문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온 미국 국민이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전쟁에서 수만명이 미군 병사들이 전사하였으며, 수만 명이 심하게 부상당하였으며, 무수한 미군 병사들이 북한에 포로로 잡혀갔거나 실종되었다. 바그다드에 사실상 무혈 입성하여 미국의 찬란한 승리를 이끌어낸 토미 R 프랭크스 장군에 대해서 미국민들은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1.4후퇴의 망신을 당함과 더불어 해임된 맥아더 장군에 대하여는 미국 국민들이 그토록 열렬한 성원을 보냈으며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은퇴하는 순간 전 미국이 무엇때문에 그토록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던 것일까?

   오늘날 마치 반미주의를 시대의 유행인 양 생각하는 몰지각한 청소년들을 바라보며 어째서 한국전쟁 때 맥아더 원수가 우리 민족을 구출하였는지 되새겨보자. 흔히 미국이 자기네 국익을 위해서 우리나라를 도왔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한국전쟁 발발하기 두어달 전에 미국 트루만 행정부는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아치슨 독트린을 발표하였었다. 이 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차 대전 이전에는 미국은 외국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 고립정책, 즉 몬로 독트린을 고수하여왔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그 고립 정책의 대상 지역의 하한선이요, 미국 태평양 방위선의 상한선이라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아직 반공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어째서, 미국이 2차대전 중에 엄청난 무기를 소련에 지원하였는가? 어째서, 미국이 1945년 1월의 얄타회담에 스탈린을 참석시켰는가? 미국은 아직 반공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이 소련의 스탈린에게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아치슨 선언을 한지 두어달 만에 그것을 스스로 번복하는 것은 대국의 위상에 맞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아치슨 선언을 스스로 뒤집어엎으면서 한국전쟁 발발 닷새만에 미국의 참전을 선언하였는가? 사실 트루만 대통령에게 한국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국회의 동의조차 받지 않고 참전 선언을 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미국도 소련이나 중국을, 소련과 중국도 미국을 자극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1910년에 일본이 한일합방하였을 때 미국은 모른체하였었다. 그러나 이번에 미국은 모른체하지 않고 참전하였다. 왜?

   정치적 논리를 따진다면 당시 미국이 참전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참전하였다. 왜? 첫째로, 여기에는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에 또 다시 시련이 닥친 것을 가슴아파했다. 일제 시대 때 기독교 탄압을 이겨낸 한국인들이 모처럼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공산당 군대가 쳐들어왔다. 북한에 이어 남한까지 적화되는 것을 미국 선교사들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으며, 미국이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선교사들의 탄원은 미국의 참전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맥아더 장군의 역할이 컸다. 한국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아무 호위병 없이 헬기를 타고와 전쟁이 전개되는 상황과 한강 이남의 지형을 관찰하였다.

   이미 인민군이 장악한 지역에 홀로 들어와 지형을 관찰한다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울 시민들이 쌀이며 이불이며 등에 얹고 황급히 남쪽으로 피난하는 행렬을 보면서 그의 마음이 뜨겁게 움직였다. 그는 그때 단지 전쟁 전문가의 눈으로 이국인을 바라보듯 한국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한국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느꼈으며, 수천년의 역사에서 많은 시련을 가졌던 한국 민족의 시련이 또다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아픔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을 위한 애국심을 강렬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는 참전을 결심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의 참전 결심이 미국 참전의 결정이었다.

   비록 본의는 아니었을지라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인들이 미군과 전쟁을 벌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미국 여론이 최소한 포로수용소 전범은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일본은 미군포로 수용소에서 잔혹한 행위를 한 병력은 일본군이 아니라 한국인 병력이었다고 거짓말하였다. 아직 한국과 일본을 한 통속으로 보던 미국인들에게는 한국은 2차대전 전범국이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땅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가? 때는 바야흐로 미국에서 아메리카 드림이 실현되던 시절이었다. 카우보이의 서부 개척 시대도 지나고 1920~1930년 대의 경제 공황도 끝나고, 2차 대전도 종전되고 미국 경제는 건국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그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밝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징집되어 한국 땅에서 오만 명 이상 전사하고 오만 명 이상 부상당하고 또 많은 이들이 북한에 포로로 끌려가거나 실종되었다. 만일 한국의 젊은이들이 태평양 전쟁 때 일본 군복을 입고 미군과 싸웠던 것이 사실이라면 미국 국민이 한국을 위해 피흘릴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아직 미국인들이 한국 역사를 잘 몰랐으며, 한국인이 일본이 쿠르드 족 정도로 여겨지던 때에 맥아더 장군의 한국 민족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적어도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한 한 그가 미국 트루만 문민 정부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6월 29일 새벽 6시에 맥아더 장군이 그의 전용기 C-54를 타고 와서 한강 남쪽 제방을 순시했던 것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여기서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가 스쳐갔다는 사실이다. 국군 십만 명이 지키던 삼팔선을 인민군 십삼 만명의 병력이 공격하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이 한강까지 후퇴하는데 사흘밖에 안 걸렸다. 이것은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국군이 후퇴하였음을, 그리고 이대로 가면 보름 내에 한국은 공산당 군대에 완전 점령당하게 됨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의 머리에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인민군의 진격이 빠르면 빠를 수록 보급로는 길어지고, 그 보급로와 후방의 퇴로를 차단하면 적은 궤멸하게 된다는 작전이었다.

   정세를 파악한 맥아더 장군은 즉각적으로 트루만 대통령에게 한국전쟁 참전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그 설득에 성공하여 미국의 참전을 얻어내지만 그 때문에 그는 트루만 대통령의 미움을 받아 이듬해 4월 11일에 해임된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맥아더는 그토록 집요하게 트루만 대통령을 설득하였던가? 아직 트루만 문민정부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때에 맥아더 장군은 이미 미국이 반공노선을 분명히 밝혀야 함을 보았던 것이다. 아직 미국인들이 공산주의의 팽창주의 정책을 내다보지 못하던 때에 맥아더 장군은 냉전 시대의 도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남보다 빨리 공산주의의 정체를 간파하게 하였을까? 아마, 그것은 그의 경건한 기독교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쟁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군인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여론이 한국에서 높았다. 누가 다른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싶어하는가? 마찬가지로 당시 한국전쟁 참전은 트루만 행정부가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책이 아니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설득으로 참전 결정이 내려졌으며 미군 용사들은 왜 한국 땅에서 피흘려야 하는 지 그 이유를 몰랐으나 알았다. 그것은 맥아더 장군이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6월 30일 새벽4시 57분에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전쟁개입 결심을 받아낸 맥아더 장군은 7월 1일 새벽 세시에 스미스 부대를 파병하였다. 그러나 전투병 병력이 없는 부대였다. 2차대전 종전 후 평화를 구가하던 때이기에 일본에 주둔한 미국 사령부에는 행정병 등 비전투병과 병력들밖에 없었다. 이들의 역할은 인민군에 대항하기보다 인민군이 부산마저 함락하는 것을 하루라도 저지시키는 것이었으며, 일차 파병 병력 8천명은 한국 도착 후 며칠 만에 전멸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제 25사단이 부산에 속속 들어왔다.

   피난 정부가 있는 부산을 결사적으로 사수하는 근 석달 간의 낙동강 전투에서 십만 명의 미군 병력이 손실되자 미국 워싱턴의 트루만 정부는 한국전에서 손을 떼고자 하는 방침을 세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중국 장개석 총통의 대만 망명정부처럼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와 더불어 십만 명의 한국인을 제주도로 이주시키고, 제주도에서 한국 정부의 명맥을 유지시키는 것을 북한이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미군은 철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있음을 밝히며 오히려 본국으로부터 대규모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 사실, 9월 15일 밀물 때의 월미도의 수심이 너무도 깊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참도들도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하였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이유라는 것이 맥아더 원수의 논리였다. 적의 사령관이 보기에도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하므로 적군은 대비를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한국전에서 손을 떼는 것을 검토하던 미국 국방성 관리들도 당시 태평양의 시저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려는 고집을 꺽지 못하고 그가 요구하는 해병 병력을 추가 파병하여 주었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으며,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국군과 유엔군은 승승장구하며 북진하였다. 압록강까지 이루는 북한 전지역에 태극기가 휘날리며 그토록 그리던 조국 통일의 순간이 목전에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김일성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임으로 한국 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에 외교를 맺고 있던 인도 정부가 중국 정부에 미국 트무만 행정부는 맥아더의 북진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한 정보였으며, 이에 안심한 모택동은 백만 대군으로 알려진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인해전술로 한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였다.

   맥아더 장군 편에서는 두가지 이유 때문에 속수 무책이었다. 첫째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북진이 트루만 대통령의 노여움을 샀다. 맥아더에게는 그때가 냉전의 후환을 없앨 좋은 기회였으나, 트루만 대통령은 전쟁이 장기화되거나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둘째, 중공군은 맥아더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군대와 달랐다. 후대 사가의 시각에서 중공군은 일종의 자살 공격대였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 병력에게는 일주일 분의 미수가루만 지급되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살아서 돌아오라는 파병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꺼운 솜옷을 입고 있었는데, 물에 빠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산 어디에나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그들의 게릴라전 전력은 막강하였다, 미군에게 보급 부대와 보급 도로는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중공군에게는 침대도, 취사병도, PX 사병도, 이발병도, 행정병도 필요없었다. 단지 그들은 일주일분의 미수가루만 배낭에 메고 진격할 뿐이었다. 그들은 가만 있다가 굶어죽느니 공격하다 죽는 군대였다. 그 엄청나게 추운 지역에서 이런 중공군을 막아 싸우려면 미군도 정규전 이외의 전략이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 승인하지 않으므로 맥아더 장군은 병력 철수밖에 대안이 없었다.

   이 와중에서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태평양의 한 작은 섬 웨이크섬으로 호출하며 비밀 회동을 갖는다.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로 유명하다. "둘이 마지 못해 악수하는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은 험악하게 굳어 있었다"고 미국 역사는 기록한다. 이 비밀 회동에서 트루만은 맥아더에게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정인지를 물었다. 자신은 전혀 정치적 야망이 없는 군인임을 맥아더 장군은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대권에 도전할 뜻이 없음을 확인한 트루만은 안심하고 그를 극동 미군총사령관의 직에서 해임하였다. 한국을 구출하려는 그의 그 모든 노력에 대한 댓가는 태평양의 황제라 불리던 자리에서 불명예 해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역사에서 그는 반공 노선의 선각자로서 기억된다. 그리고 그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인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피부색이 다른 우리 민족의 애국자였다. 그는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전쟁이 되게 한 인물이며, 그가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십만 명의 미국인의 피를 흘리는 것을 아끼지 않았기에 한국과 미국은 혈맹의 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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