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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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7월 21일 

안병무의 민중 메시야론의 문제점/ 몰트만의 견해

   민중신학의 세 대표적인 신학자가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문익환 목사는 실은 신학자는 아니다. 신학자로 인정받으려면 저서나 자신이 집필한 글이 있어야 하는데 문익환은 학문적인 글을 남긴 것이 없다. 북한 여행 수필집 몇권 내놓았으면 신학자인가? 아니다. 민중신학자로 알려진 그는 실은 신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실제로 민중신학을 창시한 이들은 한국신학대학의 안병무와 서남동 교수이다.

   요즘 희대의 사기군 윤창열의 굿모닝시티 상가 사기분양에 속은 피해자들이 갖가지 사연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윤창열 못지 않은 사기군들이 바로 안병무 서남동이다. 상가분양 피해자들은 직접적이요 가시적인 피해자들이지다. 그러나 학문의 사기에 의한 간접적이요 불가시적인 피해자들이 있다. 종교 지도자들의 학문적인 거짓 또한 상업적 사기 못지 않은 사기이다. 그리고 퇴보를 진보라고 주장한 이 종교 사기군들의 학문적 사기의 피해는 한국 사회 전반에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에 몇몇 유명한 종교적 사기군들이 있다.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은 자기가 예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거짓말에 속은 자들이 얼마나 많든 그는 예수가 아니다. 그는 영의 양식에 굶주린 자에게 독이 든 음식을 주는 자이다. 그가 주는 음식은 독이 든 음식인 줄도 모르고 받아먹는 자들의 수가 많다. 사람은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기에 거짓 종교 교주에게도 추종자들은 있다. 그러나 문선명은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자신도 자기가 한 거짓말에 속은 종교적 사기군일 뿐이다.

   그런데 민중신학자들은 보통 사람이 좀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신학 용어를 써가며 거짓을 말한다. 마르크스 사상과 천도교 교리를 혼합한 사상의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그들은 한국의 민중이 메시야라고 주장한다. 비록 그들은 문선명처럼 자기네가 메시야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한국 민중이 메시야라고 주장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으로 세계 만민을 구원하였듯이 고난당하는 한국 민중이 세계 만민을 구원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중신학의 논리이다. 즉,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에서 피지배 계급이 한국의 민중이며, 천도교 교리에서 사람이 곧 하나님이기에 헌국 민중이 곧 해방의 메시야라는 논리를 그들은 전개한다.

   혹자는 다른 나라 민중이 아니라 한국 민중이 해방의 메시야라는 그들의 주장이, 그리고 한국 민중을 구세주로 승격시키는 그들의 이론을 대단히 민족주의적이고 애국적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민중신학의 이름으로 이런 주장을 할 때 기독교의 구원론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지난 목요일(2003년 7월 17일) 평소 카드빚 독촉에 시달리던 인천 서구의 손 여인이 세 자녀를 아파트 14층 계단밖으로 내던지며 동반 자살하였을 때, 그리고 휴일인 같은 날 비슷한 시각 서울 잠실의 한 상가건물 지하 2층 공사장에서 막노동 아버지 돕던 고교생이 아버지와 함께 질식 사망하였을 때 그들은 분명 고통당하는 민중이었다. 안병무의 주장대로 그들이 고통당하는 한국 민중이기에 세계 만민을 구원한다면 그들은 누가 구원하는가?

   안병무를 포함한 민중신학자들이 범한 학문적 왜곡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그들의 이런 엉터리 주장이 한국적 신학이라고 주장하며 독일과 미국에서 그 받기 어려운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그들은 학위 취득을 위해 한국 이름을 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목사 직함과 신학박사 학위를 퇴보가 진보라고 선전하는 그들의 좌익 활동을 위해 사용하였을 때 그들은 기독교의 이름을 헛되이 판 것이다. 그들은 한국 이름과 기독교 이름을 팔아 쉽게 출세하고 유명 인물이 되었으나 실상 그들의 민중신학 이론은 거짓이요 학문적 왜곡 투성이다. 그리고 그들의 학문적 사기의 피해가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윤창열 못지 않은 사기군들이다.

   외국에서 박사 학위 받은 한국 학자들이 학위 논문은 읽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아무런 학문성도 없으면서 한국 상황을 왜곡 기술하여 박사 학위 받은 이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인문사회학 계열에서는 탈근대 좌파 혹은 탈식민지 이론을 논하는 논문들이 그 예이요, 신학 계열에서는 민중신학 논문이 그 예이다. 특히 민중신학자들이 마치 한국 정부가 나치 파쇼 정권 혹은 필립핀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 정권이라도 되는 듯이 기술한 것은 한국 상황을 왜곡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기독교가 탄압을 받은 적이 있었는가? 없었다. 서설사 문익환 같은 빨갱이에게 무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독교 탄압이라고 외국 학자들에게 광고한 것은 신학자의 양심마저 속인 거짓말이었다.

   범대위 구성원이 누구인가? 빨갱이 한상렬과 홍근수 목사 등 바로 이 민중신학파 목사들이다. 누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배후에 숨어서 집단이기주의를 조장하는가? 바로 이 이 민중신학파 목사들이다. 과연 그들은 김정일 공산 정권의 남파 간첩이 하는 일을 도맡아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기독교의 이름을 팔아도 되는가? 왜 민중신학파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대신 한국 사회에 좌익의 집단이기주의를 조장하는가? 그 한 이유를 우리는 세계적인 석학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박사가 지적하는 안병무의 민중 메시야론의 문제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일 튀빙겐(Tuebingen) 대학의 몰트만 박사는 본래 안병무와 서남동 등 한국의 대표적 민중신학자와 절친한 학자이다. 그가 2차대전 중 3년간 연합군 포로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형성된 그의 정치 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형성에 영항을 미쳤다.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경제 개발 정책에 힘입어 30년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었던 한국의 상황은 지주들이 소작농을 착취하는 중남미의 상황과는 크게 다름에도 민중신학자들은 같은 것처럼 몰트만 박사에게 말하였기에 몰트만 박사의 한국 상황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의 왜곡된 한국 정보를 받아왔던 몰트만 박사도 "안병무의 민중 메시야론과 문제점"이라는 제목의 그의 최근의 글에서 한국 민중신학자들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낱낱이 밝혀낸다.

   안병무가 독일에서 신약성서학 박사 논문을 쓸 때 한국에서 도시산업선교가 선동하던 파업 시위가 그에게 학위 논문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그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 위해 거리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이 바로 예수의 가족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그의 신약 성서 해석에 적용하였다. 안병무가 사람들의 무리라는 뜻의 그리스어 ochlos를 한국어로 민중이라 번역하였을 때 여기에 오역의 소지가 있다. 신약성서의 ochlos에는 전혀 좌익 정치집단의 뜻이 없는데 비해 안병무의 민중에는 좌익 정치집단의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병무가 한국 사회에서는 수 백년 전부터 저항의 전통들이 이어져 왔다고, 즉 한(恨)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을 때 동학혁명 같은 반란이 반복해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도 한국사를 외국에 잘못 알리는 왜곡이다.

   오늘날 문성근 일당이 그들의 위험한 생각을 민주화 운동으로 착각하는 것은 민중신학자들의 위험한 성경 해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좌익 성향의 종교인들인 민중신학자들은 좌익 민중은 누구나 예수가 될 수 있다는 그들의 엉터리 논리를 이렇게 전개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현재적 실재이며, 세례를 받은 사람은 물론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은유적인 언어가 아니다. 이는 때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때로는 "민중"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실재이다. 요컨대, 안병무와 문익환 일당은 예수가 곧 민중이요, 민중이 곧 예수리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 박사는 안병무 일당이 이렇게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이 남북 분단 상황과 관련 있음을 이렇게 관찰한다:

   예수가 이러한 방법으로 민중의 운명과 동일화 될 경우, 민중이 예수와 동일화되고 또 그의 사명(mission)과 동일화되며, 결국 민중이 메시야가 되는 것인가? 메시야가 민중에 속할 경우, 민중이 메시야가 되는가?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에는 사실상의 메시야니즘이 유행하고 있으며, 이 메시야니즘은 동학운동으로 소급된다. 널리 확산되어 있는 미륵(Maitreya) 불교도 "미래의" 세계를 "깨우치는 부처"로서의 메시야적 모습을 띄고 있다. 주체사상을 가진 북한의 "김일성 주의"는 하나의 명백한 지배 메시야니즘(Herrschaftsmessianismus)이었으며, 아직까지도 그러하다. 김일성은 자기가 맑스주의자라고 주장하였으나, 그 자신을 종교적 구원자와 인민의 아버지로 자칭하였다.

이미 안병무의 학위 논문이 오래 전에 통과되고 그가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한창 활동하고 있을 때 이런 사실이 밝혀짐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안병무의 주장은 이단 사설로 빠져들고 있음을 몰트만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러나 민중에 대한 성서의 원형을 갈릴리 사람들(ochlos) 안에서 찾아 볼 때, 우리는 그렇게 고무적인 인상을 얻지 못한다. 성서에서 사람들(ochlos: 본래 무리라는 뜻의 이 단어를 안병무는 이 단어를 민중이라고 오역함)은 이상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민중은 양면적이며 유혹 당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홀로 내 버려 두었다. 그러나 이것도 민중의 약점에 속할 뿐, 이것이 민중에 대한 도덕적 비판과 신학적 비판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민중은 단지 민중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낭만적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와 인권을 위한 민중의 투쟁을 메시야적으로 과장하는 문제이다.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메시야의 해방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안에 있는 구원으로 이끌어간다. 민중의 필연적 해방은 이 백성을 그들 자신의 역사의 주체로 만든다. 이 역사적 해방 속에서 민중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그의 미래를 발견한다. 그러나 민중은 아직 거기에 있지 않다. 민중이 자유를 얻었을 때,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형성할지는 아직 미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하는 한국의 통일은 미래의 세계의 생명으로의 부활이 아직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부활에 상응하며 부활을 가리킨다. 반면에 민중과 이산 가족들의 고통은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에 모순된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변증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궁극적인 것에 우리의 에너지를 쏟기 위하여, 우리는 궁극적인 것을 잠정적인 것과 동일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는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엄청난 실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모든 해방신학이 끝까지 주장해야 하는 "오늘-여기서-우리가"는 잠정적인 것 안에 있는 궁극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 안에 있는 잠정적인 것의 이중의 현존(Presenz)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해방신학의 현재적 종말론은 현실주의적 종말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몰트만 박사는 2000년 봄에 학술 행사차 한국에 방문하였을 때 비로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이단성이 있음을 알아차린듯하다. 그는 그 충격을 이렇게 표현한다:

"서광선의 집에서 있었던 대화에서 안병무가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면서 요한복음 1:29의 '하나님의 어린 양'과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의 종이 한국 민중임을 시사하였을 때 나는 상당히 놀랐다." "당신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십니다" 라고 찬송가를 부를 때, 우리는 현실적인 의미에서 민중을 눈 앞에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안병무는 말하였다. 이사야 53장의 상에 따라, 그리고 이 상을 통하여 나중에 형성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이야기에 따라 우리는 우리를 대리하여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말미암은 죄를 "짊어짐,"죄를 "도말하심"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지닌 구원의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원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의지에 역행하는 가운데서 당하는 억압과 착취의 수동적 고난이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민중이 고난 당하는 백성일 뿐 아니라, 그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스도론에 관한 질문들이 제기되며, 그 민중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것을 민중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안병무의 이단성이 드러난 이 날 대화에서 몰트만 박사는 안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하나님의 고난 당하는 종과 같이 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 민중이 그의 고난을 통하여 스스로를 구원한다면, 이 고난 자체를 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민중은 어떻게 투쟁할 수 있는가? 민중이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자 하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누가 민중에게 질문한 일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안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쓴 것처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 개인과 집단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사야 53장의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개인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인가? 서구의 신학자들은 그를 개인으로 이해하고자 항상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며, 고난 당하는 종을 개인으로서의 예수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타당하지 않다......아시아에는 '개인'(Pers nlichkeit)이란 단어가 없다. '인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집단적인 것을 의미한다......예를 들어 '붓다'는 한 개인으로서의 사람 '싣다르타'(Siddharta)로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보편적인, 다시 말하여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집단적인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안 박사는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의 삶의 이야기를 항상 오클로스의 "사회-전기"(Sozio-Biographie)로 해석하였다. 예수의 수난의 이야기는 "민중이 당하는 고난의 운명의 응축"이다: "마가는 예수의 수난사를 근거로 그 당시 민중의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거꾸로 예수의 고난은 마가 당시 민중의 운명 속에서 현재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석학적 통찰은, 서남동 교수가 말하였듯이, "예수"가 "민중에 대한 상징"임을 뜻하는가?

   이와 같이 예수를 한국 민중에 대한 상징으로 축소시키는(reduction) 것이 적절하다고 몰트만 박사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집단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지 않는다. 고난의 종은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가 고침을 받은"(53:5) "하나님의 고난 당하는 종"은 신적인 존재(divine figure)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 "개인"도 아니고, 그 자신 속에 머물러 있는 개체적 "인격성"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백성으로부터, 백성과 함께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의 인격이다. 이에 대한 근거를 우리는 "우리-그"의 대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53:6). "그들의 죄를 지심으로써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그 의로운 분은(53:11),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죄를 "짊어지고" 백성들의 짐을 제거함으로써 속죄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다. "하나님의 고난 당하는 종"을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상으로 파악할 때, 이사야 53장과 예수의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집단적으로" 해석할 것인가의 양자 택일의 문제는 불필요하게 된다. 그 대신 연대(Solidarit t)와 대리행위의 관계가 등장한다. 연대와 대리행위는 너무도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타자와 함께 하는 현존(Mit-anderen-Dasein) 속에 있는 연대는, 타자를 위한 현존(F r-andere-Dasein) 속에 있는 대리행위에 대한 전제가 된다. 그 자신의 대리행위 없는 단순한 연대는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다.

   민중신학자들은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당하는 하나님의 고난"의 장소를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민중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민중교회들이 고통 속에 있는 민중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그의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 곁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의 화해를 위한 죄를 짊어지기 위하여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정의로운 세계의 자유를 위하여 민중과 함께 일어나기 위하여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속죄의 고난과, 극복되어야 할 백성의 고난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몰트만 박사는 한국의 민중이 "새 이스라엘"로서 이스라엘의 자리에 등장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리스도인들의 성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성서에 대한 "소유" 논쟁은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신앙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성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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