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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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7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의 시범 투구와 손 여인의 동반 자살

   제헌절날(2003년 7월 17일) 노무현 대통령이 무슨 일로 대전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시범 투구를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공을 던지던 바로 그날 그 시각에 한 30대 주부가 세 자녀를 던지고 있었다. 15츨 고층 건물이라면 가장 용감한 사나이도 뛰어내리기를 주저하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건장한 남자 슈퍼맨도 몇년 전 영화 촬영 중 그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뛰어내리다 평생 전신마비 환자로 지내게 된 이래 미국 영화계에서 남자 액션스타는 사라졌다. 그런데 14층 아파트 계단 창밖으로 그녀는 자기 세 자녀를 차례 차례 던진 후에 자신의 몸도 내던졌다. 가장 가벼운 세살짜리 막내는 자기 품에 꼭 껴안고 뛰어내린 것은 모성애 때문이었을까.

   이 아이들은 자기 엄마가 자기네를 죽이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한다. 그 중“엄마, 나 죽기 싫어” 하며 울부짖던 여자애는 좋은 옷은 입지 못했했지만 표정이 밝은 아이였다고 한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는 어른들의 문제이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눈동자에는 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 그날 사고 일어나기 불과 한두시간 전만 해도 이 아이들은 사고 현장에서 십분 거리인 자기네 아파트 놀이터에서 마냥 즐겁게 놀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가난했으며 아직 놀이터 시설이 없던 시절에도 가난이 가난한 어린이들로부터 빼앗을 수 없엇던 것은 딱지치기며 팽이돌리기며 소꼽장난이며 줄넘기며 하며 노는 즐거움이었다.

   인생에는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 그렇다고 성경이 말한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는 말한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듯이 언제나 우리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부터 배울 교훈이 있다. 새해가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여자아이는 "엄마, 나 죽기 싫어. 나 살래!" 하고 외쳤다. 엄마, 나에게는 미래가 있으며, 꿈이 있어요. 어둔 밤이 지나면 밝은 태양이 떠오르며 광명의 아침이 오는 기적이 누구에게나 있쟎아요. 지금은 생활이 어려워도 희망의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쟎아요. 그리고, 엄마! 비록 제가 가난한 부모의 딸이지만 그래도 제 생명도 고귀하쟎아요. "엄마 살려줘, 안 죽을래, 살래!"

   그러나 살고 싶어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버둥대는 딸을 번쩍 들어 창밖으로 내던지는 손 여인은 딸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희망! 그런 것 나도 기다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희망은 우리를 찾아와 주지 않더구나. 그리고 이 험난한 세상에 너희를 내말길 수 없다 말이야. 그러나 우리 같이 죽자꾸나. 이렇게 속삭이며 그녀는 자기 세 자녀를 15층 아파트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가장 잔인한 방법 중 하나였다.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해도 밑에 푹신푹신한 보호망이 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그 떨어지는 충격이 몸의 뼈를 부스어뜨리는 아스팔트 위로 내던져졌다. 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 여인은 유서에 살고 싶지 않다고 썼다. 이 여인은 절망의 종착역에 다다른 그가 그것이 자기 자녀들을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천시 서구 16평 아파트에서 살던손 여인에게는 성실한 남편과 세 자녀가 있었다. 비록 다니던 가구회사가 3년전 부도가 나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지만 그래도 가족 생계의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었다. 게다가 건강하고 똑똑한 세 자녀까지 있었으니 그녀는 그만하면 한 여인의 행복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여인이 동반자살을 택한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카드빚이요, 둘째는 희망의 상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 소득 천 불 시대의 목표를 제시하였을 때 재야 정치인들이 일제히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라고 비난했을 만큼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카드빚이라는 것이 없었다. 현금이 없으면 지출을 안했다. 그러나 김대중 집권 시절 마구 발행한 카드는 카드빚에 몰리는 서민들에게 고통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카드빚이 자살 동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천 만원은 남편 명의 카드빚이고 나머지 천만원은 남편 형의 명의로 대출받은 돈이었다. 1976년 판문점에서 도끼 만행 사건이 있던 때에는 서부 전전에 지뢰 폭발 사고도 많이 있었다. 한 병사는 지뢰 폭발로 한 다리를 잃고 아군 초소로 달려오던 중 남은 다리마저 지뢰 폭발로 잃고 앉은 자세에서 양손으로 뛰던 중 한 팔마저 지뢰 폭발로 잃어버렸으나 한 팔로 몸을 굴리면서 아군 초소를 향해 건져왔다. 그 병사에게는 만일 살 수 만 있다면, 그리고 다시 건강한 몸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까짓 카드빚 이천 만원이 문제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사업에 크게 성공한 다음에 암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남편과 자녀와 건강과 젊음이라는 행복의 4대 요건을 손 여인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카드빚 이천 만원은 서민에게는 큰 부담이며, 특히 노무현씨가 대구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시범 투구하던 날에는 서민의 심정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남편의 카드빚 때문에 남편의 세 자녀를 전혀 남편과 의논하지 않고 죽이는 것은 어머니의 월권이다. 그러나 노무현씨가 대전 야구장에 가서 프로야구 시구를 하던 날에는 그런 충동을 느낄 만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무현씨는 공휴일에 서민과 함께 가족 나들이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그날은 손씨 남편이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대전의 한 공사장에서 일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서민의 대통령 노무현씨가 중산층 서민들과 더불어 프로야구를 관람하던 그 시각에 진정한 의미의 서민들은 그 옆 공사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한쪽에서 남들이 프로야구장에 가족 나들이 온 날에 손 여인 같은 서민은 가족 나들이는 커녕, 노무현씨가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바로 그 도시의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노무현씨가 서민을 위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손 여인네처럼 휴일에 가족 나들이 꿈은 꾸지도 못하는 서민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손 여인도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면 서민의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을까? 노무현씨가 대전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그 시각에 손여인을 마음을 찢은 일은 그날 남편이 대전 공사장에서 아무리 막노동을 해도 4살난 딸 아이 치료비 마련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던 듯하다. 4살짜리 딸아이 팔에 피부염 같은 것이 있어 언니에게 십만원을 빌린 것이 그녀가 가족에 남긴 마지막 대화였다. 그러나 병원에 가지는 못하고 약을 사다 발라 주었는데, 딸을 병원에도 데리고 가지 못했던 것이 괴로웠던 듯하다. 이렇게 노무현씨가 중산층 서민들과 더불어 대전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나들이를 하던 7월 17일 공휴일은 그 인근 공사장에 일하던 손씨 남편이나, 가족 나들이 엄두도 못내는 손 여인에게는 서민의 대통령으로부터 더욱 소외되는 날이었다.

   노무현씨가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약속이 무엇이든 간에 노무현씨가 야구 공을 던진 바로 그 시각에 손 여인이 자가 세 자녀를 던졌을 때 그것은 그녀가 더 이상 노무현씨의 약속에 희망을 걸지 않음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초창기인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도 뜻밖의 죽음이 대서 특필된 적이 있었다. 강재구 소령이 훈련 중 잘못 터진 수류탄으로부터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류탄을 덮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희생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집권 이후, 특히 노무현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의 죽음 사건은 한결같이 카드빚에 몰린 서민들의 자살 사건들이다. GNP 80불 시대에서 GNP 만불 시대로 껑충 뛰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생활고 때문에 자살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가난하지만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가난해도 굳세게 살았다.

   그러면 누가 한국 서민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갔는가? 여기에 정치적 지도자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더불어 반성해야 할 과오가 있다. 김대중이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을 때, 노무현씨가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을 때 그것은 한국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켜 기업이 줄어들고 실업자가 늘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그들은 대통령 선거를 거짓말 대회로 착각하고 있는가?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김대중과 노무현씨처럼 거짓말을 많이하는 자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 같은 좌익 정치인들이 거짓말 대회를 민주화운동과 동일시하는 이런 문제 외에도 문익환과 문동환 같은 좌익 종교인들이 한국을 서민이 살기 힘든 사회로 만든 과오가 있다.

   손 여인이 경제적 희망을 상실했다면 그래도 종교적 희망을 가질 수 잇는 기회가 있었다. 사고나기 엿새 전인 7월 11일(금요일)에 손 여인은 이웃에 사는 할머니를 찾아가 자기도 교회에 가겠다면서 ‘교회가면 아이들 병을 낫게 할 수 있느냐,’ ‘목사님이 만져주면 병이 낫느냐’고 물었다.” 이 기시를 쓴 조선일보 김재은 기자는 "결국 교회에는 가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했던 손씨의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말인가? 과학도 발전하고 GNP 만불 시대가 되엇었으니 이제는 한국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는가? 아니다. 사람의 신용카드 인간의 지혜의 산물이지만 카드 연체료는 사람의 희망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희망을 필요로 한다.

   물론 돈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소중한 것은 희망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하셨다 (야고보서 5장 14~15절). 그리고 그 말씀은 사실이다. 주님의 종의 안수 기도를 받으면 병고침을 받는다. 의사도 못고치는 병이 기도의 능력으로 치유받는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미국도 그 내면에 들어가면 환자들의 세계의 문제이다. 의사가 많고 의료 복지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미국에서도 사람들의 문제는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으로 불치의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항상 일어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에 치유의 능력이 있다. 그것은 성서 시대에도 사실이며, 현대에도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는 기도의 능력뿐만 아니라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병을 치유하기도 한다. 대한제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1909년에도 우리나라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 위해 찾아온 수없이 많은 선교사님들 중에 포사이트 선교사가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한의에서 대마풍이라 부르는 문둥병 환자가 많았는데, 한의에서는 문둥병은 치료법이 없는 전염병이라 하여 문둥병 환자를 동네에서 쫓아내었다. 어느날 길에서 한 더러운 옷을 입은 말기 문둥병 환자가 굶어죽어가는 모습을 본 순간 포사이트 선교사님은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무 여행 일정을 포기한 선교사님은 이 나환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정성을 다해 치료하여 살리신 것이 여수애양병원의 출발이었다.

   퇴보를 진보라 생각하는 한국 좌익이 수구보수로 여기는 기독교에는 이렇게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었다. 그런데, 속에는 빨갱이 사상이 들어 있으면서 겉으로 종교계 인사의 탈을 쓴 문익환, 문동환 같은 이들은 기독교의 사랑을 거꾸로 실천하였다. 즉, 그들은 그들의 좌익 활동에 도시산업선교회라는 간판을 달아놓고 노동 분쟁을 일으켜 기업을 도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집단이기주의를 양산시켜 사랑이 메마른 사회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마르크스 사상을 민중신학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였지만 민중신학에서는 개인은 실종된다. 그들이 서민 편을 든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한 가난하고 지친 영혼에 대한 목회적 관심이 없다. 아마도 문익환의 아들 문성근에게는 노무현 대통령이 야구공을 던진 바로 그 시각에 세 자녀를 던진 손 여인의 사건은 관심밖의 일일 것이다. 카드 연체료와 더불어 개인의 희망을 좀먹는 것이 좌익 논리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한국 기업을 도산시키고 한국 경제의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키므로 실업자가 늘어나게 하기 때문에 서민의 생활고를 한층 더 가중시킨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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