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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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3월 16일 

남남 분열 일으킨 두 성직자 짠후탄 신부와 문익환 목사

    1975년 4월 30일 정오에 월맹 공산군 제2군단 소속 탱크 부대가 사이공에 입성하자 친북 좌파 시민들이 월맹기를 들고 월맹군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애쓰던 민족 공조의 꿈이 실현되던 날 친북 좌파 교수, 종교인, 학생들이 모조리 체포되어 처형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빨갱이들의 주장이다. 그 외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까지 합하면 적화통일 직후 살해 당한 사람들의 수가 무려 9백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목숨 걸고 탈출한 보트 피플의 수가 106만명이었다.

    1973년에 월맹과 월남간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월맹이 평화협정을 파기할 때에는 월남에 즉각적으로 공군과 해군을 파병한다고 약속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미군은 오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 두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일단 미군 지상군이 철수한 다음에는 다시 미군 파병을 하려면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당시 미국은 아직 닉슨 게이트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설상 가상으로, 1975년 3월10일 새벽 2시에 월맹군이 중부 월남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런데, 월남군은 예상되는 반격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통일운동가를 자처하는 문익환 목사같은 정치군이요,「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인 짠후탄 신부가 그 전투는 월맹군의 침략이 아니라, 민중 봉기라는 여론을 일으키면서 오히려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받던 짠후탄 신부가 월남 중부전선의 전투는 월맹군의 침략이 아니라, 민중의 봉기이며 따라서 월남 내의 내전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한, 그리고 친북 좌파쪽으로 기울어진 월남의 여론이 짠후탄 신부의 주장에 동조하는 한 미국은 파병할 수 없었다. 문익환 목사처럼 민중을 빛이 아니라 어둠으로 인도하던 짠후탄 신부는 너무도 정치적 편견이 심한 나머지 월맹군의 분명한 침략마저 침략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분별력이 흐려졌었다. 그리고, 그의 멍청한 판단과 억지는 자신도 처형됨은 물론 자신을 추종하던 친북 좌파와 그가 어둠으로 인도하던 신자들을 포함하여 900만명이나 학살되게 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그는 한국의 문익환 목사처럼 남남 분열을 초래한 엉터리 성직자였다.

    성직자의 성직자됨은 성직자와 정치가 사이의 선이 분명함에 있다. 그런데, 짠후탄 신부는 한국의 정치군 문익환 목사처럼 그 선을 넘어가 있었다. 그는 일국의 대통령 후보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만한 입김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정세 판단에 장님인 자로서 정치 여론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 정치 지도자들의 문제도 있었다. 보는 시야가 짧은 정치인들의 불행은 햇볕정책이 성공한 정책임을 내세우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협정이 성공적이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티우 대통령이 전쟁의 위험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며, 거짓 평화를 말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신념이 되어버린다. 이런 평화 무드 속에서 세계 제4대 군사강대국이었던 월남군은 주적의 개념마저 상실하고 있었다.

    게다가 문익환 목사처럼 정세에 눈이 어두우면서 정치에 관여했던 짠후탄 신부는 그런 월남 사회의 안보 위기를 한층 더 가중시켰다. 그는 월맹군의 남침이 없었다고 월맹은 남침의 의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5년 1월8일에 월맹군은 18개 사단 총병력을 남침을 위해 휴전선 일대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적장이 월남의 전략적 급소 한가운데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비록 짠후탄 신부 같은 이들이 월맹에는 남침 의도가 없다고 헛소리하더라도 보안 기관만은 적장의 침투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친북 좌파 강금실 법무 같은 이들이 세상은 변했다면서 검찰청 공안 업무를 무력화시킨 월남 정부에서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1975년 3월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대선을 몇 달 앞두고 레임덕에 빠져 있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그제서야 거짓 평화의 환상이 깨졌음을 알아차리고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 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티우 대통령이 북풍을 대선에 이용하려 한다고 주장하여 자기가 지지하는 야당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 주려 했다.

    대선 정국이란 이런 것일까? 아무리 월남이 국토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중부 전선의 급소를 찔린 월남군이 연일 연야 패태하고 있는 중에 정치권 재야 인사들은 일제히 짠후탄 신부의 말에 맞장구를 쳐 티우 대통령의 북풍을 비난하며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여기서 짠후탄 신부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만일 그의 말을 따라 월남 국민 대다수가 월남 중부 전투는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라고 믿는다면 미국이 군대를 파병할 명분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짠후탄 신부의 성명을 티우 대통령의 담화문보다 더 믿던 월남군 사병들은 국군이 시민군과 전투할 수 없다며 군무를 이탈하였기에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월남군은 군화도 못신은 월맹의 거지 군대 앞에 허수아비처럼 무너져내렸다. 월남군의 연전 연패하는 한달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으며, 미군은 영영 다시 오지 않았으며, 월남은 적화통일되었다. 그런데, 월남의 패망을 초래한 전쟁사에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 볼 전투가 월남 중부 반 메뚤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였다. 이 전투를 민중봉기로 보느냐 월맹의 공격으로 보느냐가 당시 미국의 파병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기 때문이다.

    미군은 게릴라와 민간인의 식별이 어려운 전투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한다. 그것은 미국이 미국의 자존심을 내버리고 월맹과 평화협정을 맺어주었을 만큼 싫은 것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월남이 패망하던 4월 30일 일기에서 월남이 망한 것은 자주 국방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셨다. 월남은 강대국 미국을 믿었다. 그러나 미군은 다시 오지 않았다. 만일 미군이 다시 오게 하려면 당시 여야는 한 목소리로 월남이 침략당한 사실을 인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월남의 인권 운동가 짠후탄 신부는 그것은 월맹의 침략이 아니라 민중 봉기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1973년에 평화협정을 체결한 월맹의 속셈은「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외형상 1984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동학 혁명과 유사한 이 민중 봉기는 그 속 내용은 월맹의 남침이었다.

    그리고, 월맹의 중부에서 발생하였던 이 민중 봉기는 그로부터 5년 후 5.18 광주사태를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있다. 1980년 5월에 오늘날 속칭 386 운동권으로 불리우는 당시 정치학생들을 데리고 김대중 선생이 꾸미시던 일은 광주 사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광주 사태는 처음에는 광주 경찰과 시민간의 마찰이었다. 5월 중순 인민군 총병력이 휴전선에 집결하고 미군 항공모함이 한국으로 이동해 오던 준전시 상황 하에서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서울모 대학을 지키던 계엄군이 식기를 챙길 틈도 없이 급히 광주 전남대로 이동 배치된 것이 5월 19일 아침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광주의 혁명가 윤상원이 그가 평소 공산주의 사상을 의식화시키던 노동자 패거리들을 이끌고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를 부스고 무기를 탈취하여 시민군을 조직한 다음 도청으로 쳐들어가자 급히 도청 방어를 위해 이동하던 계엄군이 광주 시민군 장갑차에 압사당하고 발포 사고까지 나자 숫적으로 열세인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것이 광주 사태였다. 그러나 광주사태를 윤상원이라는 혁명가의 민중 봉기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탈북자들이 당시 광주에는 인민군 전투 요원들이 침투해 있었다고 증언하는 까닭이다.

    다행히도 광주에는 총을 들고 가가호호 방문하여 청년들과 장정들을 끌어내어 강제로 시민군에 입대시키는 윤상원의 혁명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온건파로 남아있기로 결단하는 용기 있는 시민들이, 도지사 위에 군림하던 윤상원의 혁명군에게 무기를 정부에 반납하자고 호소하던 용기 있는 광주 시민들이 있었기에 저들이 광주 시내의 모든 방송국을 불태우고, 각종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중 봉기를 획책하고, 광주를 해방구를 선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굴복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던 선량한 시민들이 광주시를,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 일발 위기의 상태에서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였다. 그러나, 1975년 월남 중부의 농민들에게는 그런 자유 민주주의 수호의 의지가 없었다. 그들은 혁명에 성공하면 지주의 토지와 부자의 재산 다 빼앗아 농민과 노동자에게 나누어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경찰서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하여 시민군을 편성하였으며, 이미 잠복하여 있던 월맹군이 그들과 합세하여 월남군을 공격하였다.

    월남군도 자기 형제요 아버지인 시민군에게 발포하지는 못한다. 당시 월남인들이 조국 월남을 구하려면 더 이상 시민들이 빨갱이의 농간에 넘어가 혁명군에 가담하지 않도록 국론을 통일시키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 정도의 자주 국방의 의지는 있어야 미국이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짠후탄 신부는 이것은 민중 봉기이니 티우 대통령은 북풍을 선거에 이용하지 말고 퇴진하라고 요구하였다. 정세 판단력이 없는 짠후탄 신부의 이 정치적 꼼수는 대성공하여 티우 대통령을 완전 레임덕 상태에 빠지게 했다. 그 결과 얻은 것이 무엇인가? 외형상 시민군의 민중 봉기요, 그 본질은 월맹의 남침인 중부 전선 전투에서 공산당 세력이 3월 26일 다낭을 함락하자 그때부터 휴전선 일대의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마침내 4월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면, 자신의 성직자의 신분을 이런 남남 분열을 위하여 이용하던 짠후탄 신부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정권은 예정보다 앞당겨져 4월 21일에 교체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새 대통령 집권 9일 만에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이 월맹군 탱크들에 점령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되고, 월남의 자유 민주주의의 역사는 끝났으며, 지도상에 그 이름이 없어졌다. 너무도 어이없는 사실은 짠후탄 신부는 월맹군에 체포되고 나서야 그 군대가 자기를 추종하는 민중의 봉기가 아니라, 월맹군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월맹의 입장에서는 월남군을 무력화시키고 미군 파병의 명분마저 없앴던 짠후탄 신부는 월맹군에 무혈 승리를 가져다 준 자였지만 그도 개조캠프라는 형무소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짠후탄 신부는 성직자였던가? 분명한 월맹군의 남침을 민중 봉기라고 거짓말한 결과 월남에서 기독교는 사라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월남은 기독교 선교사가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무신론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정세 분별력이 없었던 그가 정치에 깊숙히 개입한 결과 엄청난 대학살극이 벌어지는 적화 통일을 초래하였다. 성직자와 정치군의 선이 분명하지 못하던 그는 침략군과 시민군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과오를, 그리고 한 종교 지도자로서 국민들에게 진정한 애국과 이적 행위의 사이를 구분해 주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다. 「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 짠후탄 신부는 국민을 구국 평화의 길이 아니라 망국 재난의 길로 인도하던 지도자였다.

    월남의 짠후탄 신부 못지 않게 정세 판단력이 없으면서 정치군 노릇을 한 성직자로 우리는 문익환이란 이름을 들 수 있다. 그가 일제 시대 때 만주에서 다닌 신학교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르나, 그가 만주에서 이미 붉은 사상을 가진 무리들과 어울렸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비록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성경을 읽는 방법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읽는 방법과 너무도 다르다. 그는 유물론적 성서해석”이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적, 유물론적 분석방법으로 성경을 읽는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무신론주의이다. 어떻게 무신론주의의 시각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일반 학문에서도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고물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낡은 이론, 그 허위가 폭로된 이론이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미 문명 사회에서 버려진 그 낡은 이론을 어디에서 주워와서 진보 사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우리는 월남의 짠후탄 신부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월맹의 침략군과 월남의 시민군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적군의 침략마저 민중의 봉기라고 미화하였을 때 그도 문익환처럼 남미의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자였다는 추론은 가능하다. 우리나라 신학계에 소위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아무데나 신학이란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신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민중신학 원조의 한 사람으로서 문익환 목사를 꼽는다. 그러나 학문적 토론을 전혀 글로 남기지 못한 이를 우리는 신학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하간 복음적이기는 커녕 학문성조차 없능 민중신학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너무도 엄청나기에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중신학을 말하는 이들의 민중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1)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며 사회적 실체이다.
(2) 민중은 정치적 피억압자, 경제적 피수탈자, 사회적 소외자 등 사회의 하류층이다.

   그러나,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라는 이 한마디의 명제에도 엄청난 모순이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속 사회의 역사가들도 한 시대의 역사는 후대의 사가가 보다 공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론이다.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라는 말에서 출발하여 민중을 이해할 때 자칫 편파적 주관주의에 빠져 민중을 말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은 이 때문이다.

   "민중은 정치적 피억압자, 경제적 피수탈자, 사회적 소외자 등 사회의 하류층이다"라는 정의에도 마르크스 계급 투쟁 이론 냄새가 물씬 풍긴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마굿간에서 가장 가난한 자로 태어나신 예수는 만왕의 왕이시다. 기독교의 사랑의 복음은 계급 투쟁을 초월한다. 사회학적 견지에서 자녀에게 물려줄 재산이 아무 것도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늘 서민이셨으며, 민중신학 원조 문익환의 아들 문성근은 "언론 탄압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 민중 편에 서있는 언론들을 탄압할 만큼 정치적 실세이다. 따라서 이런 예는 문익환과 그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민중의 정의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을 드러낸다.

   월남의 짠후탄 신부가 월맹군의 남침을 월남 민중의 봉기라고 우김으로 월남의 패망을 가속화시켰던 바로 그해 1975년에 한국에서 민중신학이 출발하였다는 것은 눈여겨 볼 사실이다. 그런데, 토착화 신학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명세를 타던 이 민중신학은 실은 민중과 점점 멀어지는 신학이었기에 이십 년도 채 못되어 유명 무실해지는 모순에 빠졌다. 그러면 왜 민중신학은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학, 민중에게는 한국 현실과 동떨어진 먼나라의 이데올로기로 들리는 것일까?

   그것은 본래 민중신학이 남미의 해방신학을 베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익환이 남미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을 동일시하였을 때 그는 그의 정치적, 경제적 무지를 드러낸다. 중남미 국가들은 자본주의 경제에 관한 한 한국보다 훨씬 선배이지만 경제적 발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중남미 여러 국가에서 5% 미만의 군부가 토지의 95%를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산업국가로 발돋음하려면 토지 개혁을 해야 하는데, 대지주인 군부가 토지를 내놓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농업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민들은 가난하다. 이 구조악의 문제에 대한 남미 성직자들의 대항이 해방신학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중남미 여러 빈민국의 이러한 군부 독재를 문익환이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정책과 동일시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엄청난 과오였다. 대지주로서 부를 자기네에 독점시킬 뿐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었던 중남미 군부독재자들에 비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시려는 분명한 목적과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서민이 착취의 대상이었는가? 1960년 이전에 우리나라에 직업의 종류가 별로 많지 않았다. 국민 대부분이 농사군이었지만 식량 자급 자족이 안되어 보릿고개를 넘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90%를 지원해 주어도 세계 최빈국이었다. 그러다 1960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혁 일단계로 섬유 수출이 시작되면서 여성들에게 제조공장에서 일할 자리가 생겼으며, 아직 남자들에게는 일자리가 없었다.

   나라의 산업전사들을 키우며 격려하시던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공장들을 자주 방문하셨다. 어느 공장에서 한 여공에게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그 여공은 돈 없어 진학 못했지만 공부가 소원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진 박정희 대통령께서 사장을 바라 보셨다. 각하의 뜻을 알아차린 사장은 "바로 야학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낮에는 일하는 밤에는 교복 입고 공부하는 여공들은 신바람이 낫다. 추석 때는 여학생 교복 압고 고향 가서 자랑하였다. 바로 그들의 손길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첫 수출의 문이 열렸으니 그들의 자랑은 참으로 떴떳한 자랑이었다. 그러나 졸업식 때 문제가 생겼다. 문교부에서 교과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졸업식 때 졸업장을 주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문교부 장관에게 "그 여공들이 돈이 없어 공부 못한게 한이라는데, 무슨 문교부 정책이 그들의 소원 하나 못들어주느냐고 호통치셨다.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의 첫 산업전사인 여공들은 여고를 졸업하였으며, 대학교에 진학한 여공들의 학비도 회사에서 대 주었다.

   이것이 착취인가? 조국 대한민국의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하나된 사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이러한 끈끈한 애정을 착취라고 말하는 노동운동가들의 주장은 상당히 왜곡된 것이다. 강성 노조가 없었을 때는 이렇게 돕고 돕는 미풍이 있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희망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 시절!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서로 화기애애한 가운데 희망을 서로 나누며, 서로 격려하였기에 그토록 살기 좋은 세상이었던 것이다. 비록 가난할 지언정 서로 돕고 나누는 인정은 풍부하였다. 그리고 인정이 넉넉한 사회는 결코 가난한 사회가 아니었다. 그 시절 근면한 한국인은 세계 어디를 가든 환영받기에 우리 민족이 오대양 육대주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강성 노조가 등장하게 한 문익환의 민중신학은 우리사회에 엄청남 과오를 저질렀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계획이 성공하여 1970년대부터는 우리나라에 남자들에게도 일자리가 생겼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넥타이 부대도 생기고, 한국의 GNP가 많아지면서 서민들의 생활 수준이 빠르게 올라갔다. 구멍가게만 있던 시절에는 수출이 없었는데, 기업이 자꾸 생기니 외국에서 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사업가가 없고 기업이 없으면 일자리도 없다. 과연 민중은 그런 비참한 생활을 원하는가? 어떻게 기업주가 근로자의 적이라는, 그러므로 근로자의 직장은 적이요 투쟁의 장이라는 논리가 생긴다는 말인가? 문익환은 자기가 민중 편에 섰으니깐 그것이 기독교의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모순이다. 그리고, 그의 민중신학은 한국 사회에 암적인 강성 노조가 생기는 큰 요인이요, 따라서 국가 경제를 퇴보시키며, 민중의 일자리가 없어지게 하는 결과만을 초래하였을 뿐이기에 경제적인 시각에서 문익환은 민중의 적이다.

   문익환의 민중신학은 신학적인 시각에서도 역사학적인 시각에서도 결코 진보 사상이 아닌, 매우 퇴보적이요 유치한 논리였다. 그의 민중신학은 기독교와 동학운동을 하나로 묶은 혼합주의적이며 혁명적인 사회운동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면하기가 어렵다. 아무런 신학적 체계가 없는 사이비 이론에다 동학혁명을 추가시키면 토착화신학이 되는가? 그들은 동학혁명이 민중 편에 서서 일어난 민중 봉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동학 혁명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학이 기독교 사상인가? 아니다! 동학은 최제우를 그 교주로 하는 하나의 신흥종교였으며, 후에 천도교로 발전한다. 신학적 토대가 약한 문익환의 논리는 이처럼 종교혼합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만일 1894년에 동학혁명이 성공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라가 망하는 것이 민중 편에 서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동학혁명은 청군과 일본군을 우리나라에 끌어들였으며, 청일 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함에 따라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당하는 결과까지 초래하지 않았던가!

   북한 방문기 등 몇권의 수필집 외에는 전혀 신학 논문을 남기지 못한 그를 민중신학 진영에서는 실천하는 민중신학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1989년에 그가 북한에 갔다 왔다고 해서 실천하는 민중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술 더떠 그를 통일신학의 원조라고 내세우는 이들까지 있다. 그런데 월남의 짠후탄 신부가 간과하였던 사실이 무엇인가? 친북 좌파가 월남 사회에 많아졌을 때 그것은 월맹에 남침과 적화통일의 명분을 주었다. 이점에서 문익환의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민족의 통일을 크게 저해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적화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다. 그가 1989년에 북한에서 공동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공동선언이라는 것은 상대편의 이데올로기를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계급 투쟁 이론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어떤 교감이라도 느낀 것이었을까? 여하튼 북녘 동포들에게 공산주의의 그릇됨을 보여주기는 커녕 남한에서 좌익 사상이 활개칠 명분을 준 그의 통일운동은 통일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월남의 성직자 짠후탄 신부가 월맹군의 남침을 월남 민중의 봉기라고 주장하여 남남 분열을 초래하였던 것처럼 남한의 성직자 문익환 목사도 그의 민중신학이 재계에서는 강성 노조에 명분을, 정계에서는 친북 좌파에 명분을 줌으로 남남 분열을 초래하였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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