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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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22일 

못된 상놈의 근성으로서의 한국 좌익의 기원

   미인의 기준이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듯 좌익의 기준도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다. 본래 좌익과 우익의 구별은 한 사회적 이슈에 따라 정해진다. 우익이 점진적 발전을 모색한다면 좌익은 급진적 변혁을 요구한다. 그러나 범대위, 노사모, 한총련, 전교조 등 한국의 진부하고 퇴보적인 좌익에게는 이런 기준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의 좌익은 한국에 특정한 정황 및 시대 배경과 더 관계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민주주의라는 용어조차 들어보지 못한 당시 사람들에게, 더구나 문맹률이 90%나 되던 때에 민주주의는 무엇을 의미하였을까? 왕정 통치의 경험밖에 없던 서민들에게 그 한자어 뜻이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풀이되는 민주주의는 참으로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는 민주주의보다도 더 희소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지주의 재산을 빼앗아 농민에게, 부자의 재산을 뻬앗아 서민에게 준다니 그보다 더 희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이 모두 순수하지는 않았다. 국내의 박헌영은 공산주의자였으며, 러시아군 소속 독립군 부대도 중국 공산당 군대 소속 독립군 부대도 모두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에 망명해 활동 중이었던 독립 인사들이나 상해 임정의 독립지사들과는 달리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일 외에도 지주의 땅과 부자의 재산을 빼앗는 목적이 있었다. 본래 우리나라는 양반과 상놈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극소수의 양반이 사회의 주도권을 갖는 사회였다. 노비 제도가 일찍부터 있었으며, 머슴의 신분은 자자손손 이어졌다. 그리고 중인들도 거부와 입에 겨우 풀칠만 하고 사는 빈농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옛 사회 제도는 개화기에 그리고 일제 치하 36년간 이런 사회 제도는 무너져 내려갔다.

   오늘날 한국에서 누가 양반의 후손이고 누가 상놈의 후손인지 외모로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는 이제 완전히 철폐된지 오래다. 그리고, 그 철폐는 일본 총독부 시절에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양반의 권리와 신분을 보장해 줄 정치 체제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신분의 잣대가 교육과 재산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반 제도는 몰락하였어도 땅을 가진 옛 양반들은 여전히 지주 행세를 할 수 있었다.

   1920년 대에 러시아를 통해 공산주의의 계급 투쟁 이론이 한국인 사회에 침투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여기에 상놈이 양반의 재산을, 머슴이 주인의 땅을 빼앗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이론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한 집단의 등장이 한국 사회에서의 좌익의 등장의 기원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래 한국 좌익의 등장은 상놈들의 반란의 성격이 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맡찬가지이다. 그들이 아무리 진보라는 말을 갖다 붙여도 좌익의 등장는 상놈의 근성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치적을 부정하는 김대중이 결코 민주주의 운동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이승만 없는 민주주의 공화국 수립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해방 정국은 좌익이 주도하였었다. 부자 재산 빼앗아 서민에게 주고, 지주 재산 빼앗아 농민에게 준다는데 속아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리고 그런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 역시 좌익이요, 죽창으로 동포를 무참히 찔러 죽였던 자들이다.

   이승만 대통령 없이 대한민국 수립은 불가능하였다. 당시는 박헌영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대였다. 따라서 이승만 같은 걸출한 민주주의 지도자가 없었다면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는 방법을 찾기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며, 죽창 든 좌익들의 학살과 약탈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살과 약탈에 의한 좌익의 불로소득은 한국 시장 경제의 마비를 의미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자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1948년 10월에 대한민국 국군이 창군되었을 때 중국 공산당 군대였던 팔로군 출신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들이 창군되자마자 박헌영의 남로당과 손을 잡고 폭동을 일으켰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임기도 3년간의 한국 전쟁 때문에 지나갔다. 만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임기도 필요에 따라 연장되었었다면 한국도 군부에서부터 빨갱이들을 색출해내는 과업을 완수하여야 했던 대통령의 임기가 한번 연장되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런 그의 치적을 망각하고 그를 독재자로 규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부정하는 오류이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남한의 빨갱이 사상을 뿌리채 뽑으시고 법치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한국에 시장 경제의 원시적인 기틀이나마 마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는 중산층이 없었다. 미국이 한국 정부 예산의 90%를 지원하던 시대에 부자들은 수입상을 하여 열배의 폭리를 취하고 더욱 부자가 되었으나 서민들은 아프리카 부시맨의 수준과 별 차이 없는 생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판자집이나 초가집을 면한 양옥 가옥에서 생활하면 부자로 여겨지던 시대였던 것이다.

   거부와 빈민으로 양분되어 있던 시대에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이 등장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였다. 그전에는 서민의 최고 직업은 교사였다. 그것은 좋은 일이나 대부분의 국민에게 직업이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거부들이 수입상 영업을 금지시키는 한편 산업화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셨다. 기업의 규모도 커지면서 일자리가 계속 창출되고 서민들도 노력에 따라 소득이 늘어나는 시장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전에는 일부 특권층을 제외하고 모두 밑바다 생활을 하던 서민들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중산층 혹은 중류의 대열에 들어섰다.

   사회가 양반과 상놈으로 양분되는 우리나라의 이 해묵은 문제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대에 가장 이상적으로 해결되고 있는 동안 북한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처음에는 지주의 토지와 부자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수많은 이북 동포들이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집과 토지를 뒤로 하고 월남하였었다. 그러면 그 빼앗은 재산을 농민과 서민들에게 주었는가? 아니다. 농민과 서민들의 재산까지 다 빼았았다. 현대의 정몽준 회장은 5억 혹은 8억달러의 대북비밀송금은 50만평에 이르는 북한 토지 사용권에 대한 댓가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것은 북한 전국의 토지 소유주는 김정일임을 의미한다. 북한에서 지주와 소작농 문제를 해결하였다. 문제는 김정일과 공산당 핵심 간부들이 새로운 형태요 지주요, 전 인민은 헐벗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이다.

   지주의 토지와 부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과 서민에게 주겠다는 공산주의 혹은 좌익의 경제 이론이 처음에는 좋아보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 불로 소득 작전에 성공한 북한 사회는 지난 오년간 조선 시대 인구의 절반이 넘는 인구가 굵어죽었으며, 미국의 식량 원조 없이는 연명조차 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맨몸으로 월남한 이들 중 상당수가 큰 재산가들이 되었다. 여기에 시장 경제의 우월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교육열 못지 않게 토지 소유욕이 몹시 강한 민족인 듯하다. 북한에서의 토지 개혁은 토지 소유주 명의이전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하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도 신흥 지주가 되는 목표를 삼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 듯하다. 소출의 효용성을 위해 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땅을 투기 대상으로 삼는 졸부들이 있다.

   땅 임자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땅을 빼앗던 남로당 간부들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 장인도 있었을 만큼 지주에 대한 서민의 감정은 곱지 않았다. 빈농의 가문에서 언제 그렇게 많이 사들였는지 노무현 대통령의 형 건평(建平)씨의 토지소유 면적이 꽤 넓을 만큼 어떤 한국인은 지주가 되고 싶어한다. 미국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우리나라에서는 왜 사람들이 그토록 토지에 대한 욕심이 많은지 실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어쩌면 상놈의 후예들 중에 더욱 땅 욕심이 강한 졸부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유산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여 무산 계급이 공동 분배하자는 좌익의 경제 이론은 근본적으로 모순이 있음을 의미한다. 본래 이론 공산주의 계급투쟁 이론이 일제 시대에 한국에서 무성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다수의 서민들은 상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제도가 바뀌면서 옛 양반들과 지주들 중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사회 제도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하였으며, 반면에 사회 밑바닥에서 상류층으로 뛰어올라간 신흥 갑부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자기가 상놈 신분일 때는 좌익 경제 이론을 주장하던 이들이 신흥 갑부가 된 후에도 유산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자고 주장할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대한민국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는 거부와 빈민간의 소득의 격차를 줄이는 중산층이 육성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다. 그러나 김대중 시절에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아나며 중산층이 얇아졌다. 한편에서 명품만을 쓰며 졸부 행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신용 불량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16대 대선의 특징은 합리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고소득 층에 대한 저소득층의 반감의 표현이었다. 노사모처럼 좌익 진영에 속한 많은 젊은이들은 노무현이 서민 출신이기에 서민 편을 서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그를 지지하였다. 그들은 노무현이 이회창 후보나 이인제 후보처럼 준비된 인물인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누가 한국 경제의 국제 경쟁력을 향상시킬 후보인지도 묻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은 누가 고소득층으로부터 저소득층으로 소득 분배를 역전시켜줄 후배인가를 물었다.

   물론 그러한 기대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역사는 양반과 상놈의 소득의 격차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한 자들은 결코 박헌영의 남로당처럼 동포를 죽창으로 찔러죽인 자들도 아니었으며,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처럼 인민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인마이포킷한 공산주의자들도 아니었으며 김대중 같은 친공산주의 정치인도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기틀을 잡은 법치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시장 경제의 꽃을 피우신 박정희 대통령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해방 정국의 좌익 정치인들처럼 죽창으로 서민들이 불로 소득을 얻게 해주겠다고 감언이설로 꾀는 좌익은 거짓 정치인들이다. 참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처럼 국민에게 열심히 일하는 기회와 줄거움과 보람을 준다. 마찬가지로, 불로 소득하려는 이익 집단들의 파업도 못된 상놈의 근성 때문일 수 있다. 근면한 상놈은 게으른 양반보다 백배 휼륭하다. 그러나 해방 정국의 좌익처럼 불로소득하려는 것은 못된 상놈의 근성일 뿐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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