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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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4일 

미래 한국 비전을 위한 기업윤리와 정신적 가치관

   미국은 남의 사업 성공에 대한 국민들의 시샘이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왜 한국 사람들이 미국 시민권을 원하는가? 아무리 한국인이 사업에 성공해도 전혀 시샘과 인종이나 민족 차별이 없는 사회가 미국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부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리 좋지 않다. 왜 재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사람들의 시샘이 그 주요 이유이다. 왜 재벌 개혁이 실패하는가? 합리성이 없기 때문이다. 재벌을 해체시키는 만큼 국제 경쟁력은 약화되고 국제 경쟁력이 약하지는만큼 수출이 줄고 수입이 늘기 때문이다.

   여기 한국의 좌익이 가지는 경제관의 모순점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경제적 자주란 한국의 자본가는 괴롭히면서 외국 투자가들을 유치하는 것이다. 외국 투자가가 누구이던가! 바로 그들이 자본가들이 아니던가! 만일 좌익이 말하는 것처럼 자본가가 나쁘다면 어째서 러시아도 중국도 우리나라도 그토록 외국 자본가들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애쓰는 것일까? 경제가 성공하려면 투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민족은 근면하지만 조선시대의 우리나라 경제 체질이 허약했던 것은 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은 투자를 요구한다. 만일 우리 자본이 없으면 외국 자본이라도 끌어들여와 투자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투자는 자본주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가들이 나쁜 사람들인가? 아니다. 투자를 하면 환원을 하는 자본가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기업주가 서민보다 소득이 많은 것이 결코 좌익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개혁의 대상만은 아니다. 사업은 모험이다. 사업에는 항상 실패의 위험이 있다. 따라서 모험을 하여 사업에 성공한 사람에게 그 모험의 댓가가 돌아가는 것은 미국인의 사고방식에서는 정당화된다. 한국의 경우 대기업의 기업주는 어떤 의미에서 국민을 먹여살리기 위해 삶을 희생당한다. 이병철씨도 정주영씨도 사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인생은 짧으며 흙으로 돌아갈 때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에게 단 하루라도 자기 시간이 있었던가? 사업은 엄청난 노력을 요하며 사업에 성공하였을 때는 이미 백발 노인이 된다. 외화를 열심히 벌어와 국민을 먹여 살리는 공복의 노릇을 하던 김우중씨에게 청년과 장년의 시절의 낙은 없었다.

   그럴진대, 기업의 혜택을 기업주가 누리는가? 아니다! 기업주가 더 많이 식사를 하기는 커녕 김우중씨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기업이 있기에 국민에게 직장이 생기며 또 외화가 들어와서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된다. 그럴진대, 기업주의 자본과 시간의 투자로 얻어지는 잉여 가치의 가장 큰 수혜자는 기업주가 아니라, 국민이다. 나그네 인생길이 곧 끝나는 날 기업가의 성공도 허무하되 오로지 사업에 전념한 기업주들의 덕택으로 나라 경제는 발전하며 국민의 생활 수준은 올라간다.

   무엇이 미국과 한국의 의식수준의 차이인가? 미국 국민들은 이 사실을 알며, 한국 국민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니, 좌익의 거짓된 계급 투쟁 논리가 사람들로 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누구인들 황소처럼 일만 하다가 생을 마치고 싶어하겠는가? 그럼에도 그 역할을 맡는 사람에게 그들이 맘껏 일함에 대한 명예는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용기가 나며 보람도 생길 것이 아닌가! 노무현씨가 서민 편에 서겠다고 했다. 뒤집어말하면 기업주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업 투자 의욕을 꺽어놓으니 취직문도 좁아지며 경제가 침체된다. 과연 이것이 서민을 위한 길인가? 그리고, 어디 그것이 오늘 태릉골프장에서 골프를 친다고 경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이겠는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씨의 경제 철학이 새로와져야 하는 것이다.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평생을 황소처럼 일하는 기업인들을 죄인 취급하는 풍토를 노무현씨 같은 엉터리 인권변호사들이 이제는 그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받는 도전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기업 윤리는 우리의 기업 윤리보다 훨씬 휼륭하다. 많은 이들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한국 등 세계 여러나라 개발도상국들의 병원과 학교와 연구소와 복지 시설 등은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사회에 환원을 하지 않는 자본가들도 투자를 한다. 그리고 투자가 있어야 생산이 있고 생산이 있어야 소비가 있으며, 소비가 있어야 잉여 가치의 소득 분배가 있는 것이기에 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투자는 중요한 것이다. 분배의 평등이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된 나라들은 구소련의 국가들과 아프리카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투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며, 러시아의 무용수들이 한국 술집에 취직하러 온다. 이것은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투자가도 필요하고 국제경쟁력을 가진 기업도 필요하다.

   그럴진대, 왜 좌익들은 한국 자본의 형성을 왜 그토록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가? 사실, 좌익의 편견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93년에 한국인은 러시아에서 세가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나는 선교사의 모습이요, 다른 하나는 성공한 기업인들의 모습이요, 세번째는 일부 여행자들의 졸부 행세 모습이었다. 그리고 졸부 행세 오년 만에 IMF 사태의 망신을 당하였고, 십년 만에 오늘의 위기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30년 동안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한국인은 위대하다. 그러나 졸부 근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 자본주의는 건전한 기업 윤리의 바탕 위에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졸부 근성을 가진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부패의 온상이 된다. 미국은 소득의 격차가 크면서도 상대적 빈곤을 별로 느끼지 않는 나라이다. 그러나 한국은 도토리 키재가하여 상대적 빈곤을 몹시 느끼는 나라이다. 무슨 차이일까?

   한국에서는 일부 중산층의 몰지각한 졸부 행세도 상대적 빈곤감을 부추기는데 한몫을 한다. 명품 치장으로 으시대며 자녀에게 고액 과외를 시키며 골프 관광으로 흥청 망청한다. 사실 이런 졸부들에 대한 서민들의 반감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요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2003년 5월 4일) 노무현씨 내외는 골프장에서 18홀 라운딩을 하였다. 그리고 "돈있는 사람들은 골프도 치고 하면서 소비를 해야 경기가 살아난다"는 것이 그의 궁색한 변명이다.

   사실 반듯하게 준비된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것은 이변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민주당의 부정선거운동과 특정 지역의 95% 몰표라는 비민주적 투표의 요인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졸부들이 서민을 자극시키는 일을 자제시켜 달라는 주문도 있었던 것으로 관찰된다. 그런 그가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은 특권층, 특히 졸부들의 사치와 낭비의 상징인 골프를 선두에 나서서 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노무현 정권은 요즘 또 개혁신당을 창당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건국 이래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구조를 이백년이 넘도록 유지해 미국에서는 정당 이름이 바뀐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개혁을 그리고 요란하게 한답시고 또 개혁신당인가? 무엇을 바꾸는 것이 개혁인가? 제도만 바꾸는 것이 개혁인가? 민주화를 위한 미국 혁명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메리카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청교도 운동이 있었으며, 민주주의 철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토론이 있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정신 없는 제도가 아니며, 미국의 자본주의는 결코 기업 윤리가 부재한 체제가 아니다.

   부끄러운 수표 외교로 세계에 그 오명을 널리 알린 김대중 대통령은, 그리고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를 민주당으로 바꾼 정치인들이 무슨 개혁을 어떻게 하였기에 이제 또 다시 개혁신당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김대중의 개혁은 허풍이었던가? 아니다. 그도 뭔가 하기는 했다. 카지노로 시작해서 교육정책 실패며, 의약분업 실패며 일연의 실패를 거쳐 르또로 마무리하는 개혁을 하기는 했다. 뭔가 열심히 제도를 뜯어고치며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개혁을 했다. 그리고 노무현씨의 개혁신당은 제도를 더욱 뜯어고치는 개혁을 하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노무현씨의 개혁은 위험한가? 여기서 우리는 카지노로 시작해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거쳐 르또로 마무리시킨 김대중의 개혁의 근본적인 잘못을 생각해 보자.

   경제 정책에 관한 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계획은 가장 이상적인 정책이었다. 그는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에 적합한 경제 모델을 창안하였으며,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성취하였다. 단,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도 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국민의 정신 문명보다 생활 수준이 훨씬 더 빠르게 발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박대통령이 하실 수 있는 일의 한계였다. GNP 성장의 속도가 정신 문화 성장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엊그제도 이십 대 청년 두 명이 66세의 버스기사를 때려 숨지게 한 일이 일어났다. 국민 소득이 오늘날의 이백분의 일밖에 안되었던 1963년에는 청년들이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다. 적어도 도덕적 수준에 관한 한 40년전보다 훨씬 후퇴하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어째서 정신 문화의 향상이 경제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였는가? 아니, 어째서 도덕 수준은 40년전보다 더 뒤로 후퇴하여 미개국 수준으로 추락하였는가?

   박정희 대통령도 일찍이 1967년에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시고 국사교육을 장려하시면서 정신문화 발전에도 큰 관심을 가지셨다. 그러나 북한의 침략 위협을 막아내시면서 국가 경제로 발전시키는 것이 그가 전념하실 수 있는 일의 한계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종교 지도자들이 도와야 했다. 그런데 그 시대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거꾸로갔다. 모처럼 우리나라에 나타난 박정희 대통령을 문익환 같은 사이비 목사가 무척 괴롭혔다. 그리고, 심지어 김수환 추기경도 이점에 있어서는 떳떳치 못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위대한 지도자를 밀어주는 것이지 밀쳐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생각한 이들이 종교계에도 있었다.

   정치적 제도 개혁만으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오산임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한다고 하였으나 실은 진정한 의미의 악덕 기업주인 한보의 정태수 회장이 그의 정권과 정경유착을 하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한다고 하였으나 실은 그의 세 아들들이 엄청난 부정 축재를 하고 있었다. 노무현씨가 또 개혁한다고 시퍼런 칼을 뽑아들더니 부정 축재의 장본인이 다름아닌 그의 최측근 안희정씨임이 밝혀지자 자기 친구라며 감싼다. 이처럼 정치 제도를 아무리 바꾸어도 노무현씨 측근들처럼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여 있으면 결코 진정한 개혁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종교인의 역할이 필요하다.

   미국의 록펠러는 가장 부요한 자이면서 가장 가난한 자였다. 그는 자기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요, 자신은 단지 관리인이요, 그래서 자기 재산은 사회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기업 윤리이다. 이와는 반대로 개척교회 시절의 조용기 목사는 가장 가난한 자이면서 가장 부요한 자였다. 그는 하나님 것이 다 자기 것이라는 어린아이의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믿음을 배신하는 부모 없듯이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믿음을 사랑하신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든 금요철야기도회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이것이 정신적 가치관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런 정신적 가치관이 있으면 결코 가난한 자가 아니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럴진대 분명 종교 지도자들에게 기업 윤리와 정신적 가치관을 위해 설교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사명한 감당하였는가? 사이비 목사 문익환처럼 시대의 사명을 거꾸로 생각했던 이들도 있었고, 세속 사회의 도전을 받은 교회들도 있었다. 모든 성직은 소중하되 모든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되는 기회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물량주의 가치관이 교회에 침투했으며 대형교회 목사는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개척교회 목회자는 무시되었다. 대형교회가 없던 1950~60년대에는 모든 작은 교회들이 작은 천국이요 사랑의 공동체였으나 1970년대에 대형교회들이 등장하면서 교회는 물량주의 가치관의 공격을 심하게 받았다.

   그럼에도 만일 지금 우리가 미래한국의 비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교회는 기업 윤리와 정신적 가치관에 대하여 설교할 사명이 있다. 청교도 운동 없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생각할 수 있는가? 아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좋으며 미국의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를 지탱할 만큼 생산성이 높은 것은 그 바탕에 청교도의 정신 문명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그의 재임 기간 중 륀스키라는 백악관 여직원에게 성희롱한 적이 있었으면서 없었다고 거짓말한 적이 있었다. 미국 국민은 그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고 즉각 탄핵을 요구하였다. 비록 국제 사정으로 탄핵은 보류되었으나 다음 선거에서 미국 국민은 공화당 후보를 선택하였다. 클린턴의 그 모든 경제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민들은 지도자의 거짓말을 용서하지 않았다. 정치적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이런 엄격한 도덕적 기준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는 건강하다.

   그런즉, 한국 정치는 언제까지 개혁의 연속이요, 개혁 신당 창당의 되풀이어야 하는가? 만일 노무현씨의 개혁신당이 정말로 개혁할 의지가 있다면 5.18광주폭동을 그들의 선임 정권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명명한 것부터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 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짓이요, 결코 거짓의 바탕 위에서 정확한 역사 인식과 올바를 정책 입안이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근본적인 거짓부터 바로잡지 않고 또 즉흥적으로 제도만 뜯어고칠려고 한다면 그런 개혁은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여하튼, 지금은 미래 한국의 비전을 위해 신학도의 음성이 필요한 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이비 종교인 문익환 목사처럼 계급 투쟁을 조장하며 사회 분열을 일으키는 역할이 아니라, 미래 한국의 비전을 위하여 기업가에는 기업윤리를 서민에게는 정신적 가치관을 설교하기 위해서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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