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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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2월 26일 

여중생 추모식인가? 반미 시위인가?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효촌리에서 미2사단 44공병대(캠프하우즈)의 차량들이 군사 작전을 위한 행군을 하고 있었으며 효촌리 56번지 지방도로변을 심미선, 신효순 두 여중생이 걷고 있었습니다. 현재 밝혀지지 않는 것은 민간인 접근이 잠시 통제되는 그 시간에 어떻게 두 여중생이 그 도로를 걷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마 두 여중생은 도로변은 안전하리라고 방심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한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56번지 지방도로의 폭은 3m 40Cm인데 비해 이날 사고를 일으킨 장갑차는 지뢰 제거용 대형 장갑차로서 도로보다 훨씬 폭이 넓은 3m 67Cm입니다. 그리고 장갑차 운전병의 시야는 전방에 제한되어 있기에 도로변이 이 경우 훨씬 더 위험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고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무전병의 연락입니다. 그러나 도로변의 두 여학생을 발견한 무전병이 황급히 건 첫번째 연락은 조작 실수 혹은 무전기 고장으로 연락되지 않았으며, 두번째 연락을 받고 워커 마크병장이 장갑차를 급회전시킨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두 여중생은 이미 탱크 옆에 부딪쳐 도로변에 쓰러져 있었는데, 옆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무전병의 연락만 받고 급히 방향 전환한 것이 오히려 두 여중생을 압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여중생의 죽음에 가슴 아파합니다. 그러나 그 좁은 도로에서 도로 폭보다 훨씬 큰 지뢰 제거용 장갑차를 운전하였던 워커 마크 병장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가 쟁론화하지 않을 뿐이지 실은 우리 국군의 장갑차에 의한 압사 사건이 오히려 더욱 빈번하다는 사실도 한번쯤 상기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 경우 아무도 살인 사건으로 비약시키지 않습니다. 장갑차 운전병이 옆을 볼 수 없다는 정황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 사건을 민간 법정에서 처리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군사 작전 중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세계 주요 미사일 수출국 중 하나일만큼 군사 강대국이며, 전쟁 도발의 화약고와 같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남북을 다시 잇는 철도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유럽 수출의 수송비를 절감하는 경제적 실리는 크겠지만 6.25 동란 때 인민군 기갑 사단을 수송했던 그 철도를 우리 손으로 다시 복원하여 주는 것은 사실 국가 안보가 걸린 모험이기도 합니다.

   사실, 만약 우리나라에 주한미군이 없다면 이런 모험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군이 남북 철도 연결 공사에 동원되었던 그 무더운 6월 13일에도 미군은 땀을 흘리며 유사시 수도권 방위를 위한 훈련 작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민간인 접근이 통제되는 그 훈련장에 어째서 두 여중생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6개월 후 전혀 예상치 못할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Los Angeles Times 지를 비롯한 2002년 12월 15일자 미국 일간지들에는 미국 대통령의 사과 직후 십만 명의 인파가 운집하여 대형 미국 국기들을 찢으며, 영어로 크게 Axis of Evil George W. Bush(악의 축 조지 부시)라고 쓴 피켓을 둔 한국인들의 사진이 게재된 기사가 톱기사로 실렸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주장은 테러분자들의 주장과 같으므로 이 기사에는 한국인들이 미국의 대 이라크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글귀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이것이 여중생 추모의 순수 의도인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여중생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지,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사과 이후에 그런 반미 시위를 하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만일 의도적 반미 시위가 아니라면 추모식에서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의 나라 국기를 찢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미국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탱크부대가 철원을 넘어 단숨에 서울까지 쳐들어 오던 날 즉시 파병하였던 우방입니다. 우리나라가 외국에 이백 명의 평화 유지군을 파송하는데도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하물며 미국은 한국 전쟁 동안 십만 명의 병력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당시 한국군 총병력이 십만이었으며, 현재 미국 총병력이 오십 만임을 감안할 때 미군 전사자의 수 십만은 실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꽃다운 젊은 나이에 십만 명의 미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굳이 형평성을 따지자면 우리에게 두 여중생의 목숨이 소중하듯이 미국인들에게도 그 십만 명의 젊은이들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를 위한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 표현 한번 안하는 것은 그렇다칩시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우리는 미군이 고의로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바로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6.25 때 십만의 한국군을 파죽지세로 공격하며 남침하였던 장갑차,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후 북괴군 양동 작전을 위해 사용되었던 강력한 무기 장갑차의 치명적 단점은 운전병이 옆을 볼 수 없으며, 장갑차는 급회전합니다. 그래서 기갑 사단에는 행진 중의 장갑차에 접근하지 말라는 금기 수칙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군 훈련 중에 무심코 장갑차 옆에 있던 병사가 압사당하는 사고가 잦습니다. 그런데 우리 군에서 일어나는 안전 사고는 문제삼지 않으면서 미군 훈련 중에 일어난 사고만 문제삼는 것은 사실 형평성의 균형을 잃은 행위가 아닐까요?

   만일 이 사건을 빌미로 SOFA 개정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SOFA가 개정되어서는 아니될 이유입니다. 가령 한국군이 A국이라는 나라에 파병되어 훈련 작전을 하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작전 기간 동안 민간인 접근을 막아달라는 공문을 그 나라 정부에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런데 장갑차 운전사는 옆을 보지 못하며, 장갑차는 급회전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 정부에서 대한민국 군인을 체포하여 살인죄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고 합시다. 이럴 때 우리는 그것을 정의로운 재판으로 보기보다는 A국 국민의 감정에 따른 재판으로 볼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미군 병사의 혐의를 전혀 입증하지 못하면서 국민 감정만 내세워 미국 대톨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21세기의 선진 국민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 두 병사는 명령에 따라 대한민국에 파병되어 대한민국 그 날 그 시간에 대한민국 방어 훈련을 받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젊은 장갑차 운전병은 그 작전 군사 구역에 민간인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병사의 범죄 혐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만일 범죄 혐의가 없는 자를 살인자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것만이 애국심입니까? 대한민국 검찰도 일찌기 이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한 후에 우발적인 사건이라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럴진대, 그리고 정체가 이상한 일부 단체들이 허위 주장으로 반미 정서를 선동하는 처사에 동조하는 것이 우리의 의사가 아닐진대 우리는 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이런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면 먼저 세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군사과학의 측면에서 장갑차 운전병이 옆을 볼 수 있는 장갑차를 발명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둘째는, 군사 작전 통보를 받은 정부 관련 부처에서 해당 지역에 민간인 접근을 통제하는 업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우리 스스로 장갑차 군사 작전 지역에 접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중 첫번째는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사항이지만 두번째와 세번째는 오히려 우리편에도 책임이 있는 사항임은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명분으로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입니까? 또 무엇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사과하자마자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미국 국기들을 찢는 것입니까? 아! 한국인이여, 이것이 과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십만명의 젊은이가 피흘리며 싸우다 전사한 우방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이란 말입니까?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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