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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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7월 22일 
아래는 조갑제 기자님 토론방 http://cafe.daum.net/futurekorealab 에서 바다를 건너다님이저에게 성경에 나타난 '심판'에 대한 해설을 부탁하셨을 때 제가 "인간의 희망에 대한 좌익과 가독교 역사관의 차이"를 설명해 드린 글입니다.

인간의 희망에 대한 좌익과 기독교 역사관의 차이

   심판에 대해서 물으시는 것은 종말론(eschatology)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종말은 말세와는 그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낙원 회복은 파멸에 이르는 종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낙원이 회복되는 종말은 영원한 미래를 향하여 펼쳐진 희망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심판의 사건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사망에 처해지는 형벌입니다.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으며 하나님과 악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육의 전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도 있습니다. 악마의 왕국에도 황제 혹은 왕이 있는데 그를 사단이라고 부릅니다. (참고로 붉은악마는 악마의 왕국에서 군대장관쯤 되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편 아니면 사단 편에 서있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있듯이 영적 세계에도 전쟁이 있으며, 이 영적 전쟁에서 중립이란 없습니다.

   심판에 대해 공부하시고 싶어하셔도 그 이야기는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독교는 심판의 종교이기에 앞서 구원의 종교입니다. 악마가 심판받는 날 악마 편에 선자들도 심판받습니다. 악마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편에 끌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역사도 영적 전쟁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12월의 반미촛불시위 이전에 붉은악마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산군의 진격하는 곳에 종교의 자유는 말살됩니다.

   악마는 한 사람이라도 더 악마의 왕국에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이 악마의 왕국을 우리는 지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악마는 모든 사람은 다 죄를 지었으므로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붉은악마 응원단이 붉은악마 마스코트를 사용할 때 그것은 악마의 소유를 나타내는 표식이 될 수 있음으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기준으로 하면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사님은 무죄합니까? 스님은 죄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습니까?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죄문제 해결을 위하여 흠없는 어린양을 속죄양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즉, 죄의 댓가는 사망이지만 어린양이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원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신약의 십자가의 사건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속의 피를 흘리셧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구원을 쉽게 설명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되 결코 강압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사단은 사람은 죄인이므로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이야기는 구약 욥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사람이 모두 죄를 범했는데, 심판대에서 악마가 사람의 범죄 증거를 제시하면서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죄는 대속함을 받았다"는 선언을 하는 사람 앞에서 악마는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속죄의 피를 주고 사신 증거, 즉 속죄의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마의 주장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고백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 재판 법정에 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하면 안됩니다. 재판에서 이기려면 자기가 죄 없다는 증거를 제시하여야 합니다. 심판, 즉 영적 재판에서 이 증거는 이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가 의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 우리의 구원을 시인할 때 악마가 물러갑니다. 악마는 강하면서도 우리의 구원의 증거 앞에서 약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피흘리셨기에 우리는 강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증거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에, 끝까지 악마 왕국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하는 자는 최후의 심판 때 그의 선택에 내맡기십니다.

   좌익과 우익의 싸움이 있기 훨씬 이전에 창세기에서 선과 악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좌익 이론은 마르크스의 유물론, 즉 물질적 행복이 사람의 행복이 전부라는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사단의 유혹이 바로 그 유혹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판에 대해서 공부하기 원하시면 먼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공부하셔야 합니다. 기독교의 심판은 종말의 윤회설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천지창조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는 실낙원한 인생이 복낙원하는 희망의 미래로 향하여 나아갑니다. (님은 문학에 조예가 있으시니 밀터의 실낙원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그런데, 희망의 미래는 좌익도 말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은 무신론적 유토피아를 말합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좌익 청년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희망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의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개인은 미래 유토피아를 위한 소모품입니다. 그들은 그들 국가의 전체주의를 위해 개인은 존재한다고 세뇌시킵니다. 좌익 사상에서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유토피아를 위해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좌익의 세계에서 사람의 죽음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르크스 사상이나 기독교의 천국 복음이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유토피아는 머나먼 미래에 있지만 기독교의 복음에서 희망은 현재에서 출발하여 먼 미래로 향하여 펼쳐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언제나 미래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건입니다. 사람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언제나 현재의 순간에 경험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내세 천국과 미래의 천년 왕국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오늘 현재 여기서 경험될 수 있습니다. 희망을 얻으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좌절된 후에도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천국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다님이 기독교 심판에 대해서 물으신 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제게 성경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 것인지를 물으셨는데, 모든 이야기는 창세기의 천지 창조로 시작합니다. 먼저 창세기를 읽으세요. 그리고 모든 심판의 예언은 요한계시록이 있으니 일독을 권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이니 지금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적 희망의 근거를 아시기 위하여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를 읽으세요. 그래야 기독교의 심판은 형벌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심판임을, 그리고 사망의 형벌 선고를 위한 심판이 아니라, 영생의 선물을 위한 심판임을 분명히 보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경의 이런 큰 줄거리를 먼저 파악하신 후에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같이 대화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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