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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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7일 

좌익의 이상한 역사적 치매 현상

   같은 한국 사람이요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면서도 좌익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이상한 역사적 치매 현상 때문이다. 범대위, 한총련, 전교조 등의 좌익의 치매 현상은 6.25동란이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심각하다. 그런데, 그들이 심각한 역사적 치매 현상은 그들의 반미주의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우리 민족이 주권을 상실하였다. 그러면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1919년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민족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우리 민족의 독립선언을 하였다. 우리 땅에서 우리의 주권을 되찾겠다는데 우리 땅에서 외적 일본인들에게 체포되고 처형당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주권을 되찾을 것인가? 그것은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3.1운동 직후 상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애국지사들은 1919년 4월 프랑스 빠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한국대표단을 보내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불어로 작성된 이 청원서는 한국이 1882년에 체결된 한미 수호 통상조약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과 맺은 조약으로 국제사회에서 자주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던 사실을 논증하였다. 또, 1919년 8월에는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각국정부에 보냈다. 영문으로 된 이 외교문서에는 임시정부의 철인이 찍혀 있고, 유럽지역 외교를 담당한 빠리위원부의 대표 김규식 선생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서명이 담겨있다.

   또한 빠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프랑스 대통령 클래망소에게 요청하는 청원서와 임시정부의 각료명단을 각국정부에 알리는 통지문도 보냈으며, 빠리에서 "자유한국"이라는 불어판 월간지를 발간해 독립운동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우리 정부가 내 나라 땅에 있지 못하고 만리 타향에 세들어 있어야 하는 땅 없는 정부요, 이천 만 국민이 있으되 국민이 없는 정부요, 각료들이 콩나물국과 소금으로 끼니를 잇는 가난한 정부였으나, 그럼에도 분명한 주권 의식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해외에 알리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하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이 카이로 선언은 한국을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국제 사회의 의지를 처음으로 공약한 의의가 크다. 그럼에도 이 선언문의 “때가 되면”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이 당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 지도자들의 가슴을 애태웠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막연한 표현에 대한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난다. 남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반도에 흑해를 마주보는 얄타(Yalta)라는 도시가 있다. 바로 이 도시에서 1945년 2월에 이차 대전 종전 이후의 일을 논의하는 얄타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런데 1945년 2월에 얄타 회담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러시아의 위상의 변화이다. 여태까지 소련은 국토는 가장 넓으면서도 대국으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얄타 회담을 시점으로 중국의 장 개석 총통은 국제 사회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소련의 스탈린이 새 강자로서 떠오른다. 이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한국이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는 독립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미국, 영국, 소련 및 중국 4개국이 한국을 신탁 통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스탈린이 동의한 이 안이 선언문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것을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행사의 명분으로 십분 활용한다. 어느 한 강대국이 한국의 새 정부 수립 과정에 독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루즈벨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만일 그때 루즈벨트의 건강이 좋았더라면 보다 신중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품는다. 두 달 후 그는 그의 병환으로 대통령 임기 중 서거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거한 며칠 후인 4월 29일 마침내 독일은 항복하고 ,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의 교외 포츠담에서 개최된 회담에는 미국의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과 소련의 죠셉 스탈린(Joseph Stalin) 등 3개국 정상이 각각 군사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이 이행될 것을 천명하였다. 이렇듯, 카이로, 얄타, 포츠탐 등에서 미국이 주도하여 세차례 열린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약속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실로 끈질긴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교의 결과였다.

   실로 백성은 있으나 주권과 국토가 없는 임시정부의 26년간의 끈질긴 외교 끝에 얻어낸 독립 약속이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그러나, 왜 36년 만에, 그리고 우리 주권 되찾기 외교 26년 만에 비로서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는가? 1919년 4월 프랑스 빠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우리 민족이 제출한 청원서는 왜 무시되었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카이로, 얄타, 포츠딤 회담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 약속되었을 때 우리나라와 프랑스에 희비의 쌍곡선이 있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사실, 유럽에 반미주의가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카이로, 얄타, 포츠담 선언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독립의 약속을 의미하였지만 프랑스에는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지역의 무수한 식민지를 내놓아야 함을 의미하였다. 미국이 유럽을 나치군의 군화로부터 구출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민족자결주의를 지지하는 미국은 유럽에 세계의 모든 식민지들을 해방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유럽인들에게 식민지는 밥줄이요 경제의 터전이었다. 그식민지들을 미국이 주도하는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이 모두 독립시켰다. 유럽인에게 미국이 어느 나라였던가.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독일 유학 갔다오지 않으면 지성인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2차 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상전으로 여기며 미국을 문화 후진국으로 비하시켰었다.

   2차 대전 때 미국의 신세를 진 것은 진 것이고, 아프리카 대륙과 동남아와 중남미의 광대한 식민지를 미국의 강요에 의해 독립시켜주어야만 했다는 것은 유럽인들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인의 문제일 뿐이요, 우리 민족에게는 그것은 미국이 우리 3.1운동의 민족자결주의를 지지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좌익은 우리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입장이었음을 잊어버렸는가? 근자에 유럽의 반미주의를 베겨오는 좌익의 국적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러면 상해임시정부의 26년간의 피나는 그 모든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카이로, 얄타, 포츠담 선언이 필요했던 것인가? 그것은 카이로, 얄타, 포츠담 선언은 제국주의의 종식과 식민지 정책의 철폐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프랑스 빠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우리 민족이 제출한 청원서는 유관순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경에 잡혀 생명을 잃는 위험을 무릅쓰고 작성한 외교문서임에도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째서? 그때는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서로 식민지 확장 경쟁에 혈안이 되어있던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비웃었다.

   일본이 우리 주권을 뻬앗은 배후에는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가 있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복하기 전에 정한론(征韓論)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국 정복을 정당화시키려는 이 이론은 사실 유럽의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었다. 19세기 말에 유럽을 지배한 철학 사조는 사회진화론이었다.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말한다. 이 세상은 강자가 살아남고 약자는 강자에게 잡혀먹는 세상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따라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는 것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이루기 위한 역사적 사명이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이것이 유럽의 제국주의요 식민지 정책이었다. 이런 사회 진화론의 이론에 따라 유럽은 세계 도처의 여러 약소국들을 강제로 식민지로 삼았다. 중국같은 대국조차도 유럽의 식민지가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 이론을 그대로 베껴와 정한론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 각본에 따라 우리 민족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는가? 일본은 점령한 자가 땅임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국주의에 식민지 정책에 따른 합방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2차 대전 이전의 사회 질서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질서였다. 요 며칠 전(2003년 5월 초) 두 20대 청년이 66새의 운전기사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사회진화론에서는 이것이 정당화된다. 이 세상은 적자생존의 세계요 약자는 강자에게 잡혀먹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래서 프랑스, 화란, 영국, 벨기에 등 여러나라들이 세계 여러 대륙을 돌아다니며 정복하고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독일의 히틀러가 등장하여 정말로 강한 민족은 아리안족이라는 독일 민족이며 독일 민족에 전세계를 정복할 사명이 있다는 나치즘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치 군대가 전 유럽을 식민지로 삼았다.

   유럽이 여러 대륙을 정복하는 강자의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을 주장할 때는 재미있었는데, 독일에게 정복당하고 보니 바로 자신들이 그 사회진화론의 피해자였다. 그래서 더 이상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를 정당화하지 말자는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여 기존 식민지를 다 포기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신세계질서에 유럽이 순응하였다. 신세계질서는 약소 민족의 독립을 보장해 준다. 지난날에는 강대국은 끊임없이 약소숙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 후의 팍스 아메리카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쿠웨이트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할 권한이 없다.

   실로,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당당하게 중국을 상대하며 주권 외교를 할 수 있었는가? 카이로, 얄타, 포츠담 선언 이후이다. 우리가 중국을 맞싸워 이길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큰소리치며 당당할 수 있었는가? 아니다. 우리 배후에 팍스 아메리카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여전히 우리나라를 자기네 속국으로 여긴다.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는 중국으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존중하게 만든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였던 시대가 언제부터였는가? 바로 카이로, 얄타, 포츠담 선언 이후이다. 왜? 그 선언은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론이 지배하는 지배하는 세계 질서의 논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의 좌익의 반미주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아니면, 좌익은 심한 역사적 치매를 앓고 있는 것인가?

김대령 목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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