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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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월 30일 

한총련과 전교조가 왜곡시킨 한반도 국토 분단의 원인

   한총련은 6.25 동란의 북침설을 퍼뜨리며 미군은 우리나라에 점령군으로 주둔하고 있다는 말로서 반미 정서를 선동한다. 그런데, 이를 막아야 할 김대중 대통령의 정부는 오히려 좌경화 운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정권은 4.3사건, 여수 순천 반란 사건, 심지어는 7명의 경찰을 학살한 동의대 사건까지 의거로 둔갑시켜 친북 좌익 논리의 설 땅을 마련해 주었다. 개혁을 큰 목소리로 외쳐 국민이 잠시 방심하는 사이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친북 좌익 세력들을 정부와 공기업과 언론계의 요직에 앉혔다.

   "국민의 정부"의 민주화 정책이란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체재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자들에게 벼슬을 주는 것이었다. 친북 좌익 인사들은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포상받고 등용되었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에게는 인권이라는 명목 하에 면죄부가 주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말로 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혼동하였든 아니든 국민은 "국민의 정부"에 속았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거꾸로 가르치는 전교조의 통일 교과서와 왜곡된 통일 수업으로부터 우리의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하기에 우리나라 국토 분단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를 여기 그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 규명해 본다.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이 카이로 선언은 한국을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국제 사회의 의지를 처음으로 공약한 의의가 크다. 그럼에도 이 선언문의 “때가 되면”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이 당시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 지도자들의 가슴을 애태웠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막연한 표현에 대한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난다. 남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반도에 흑해를 마주보는 얄타(Yalta)라는 도시가 있다. 바로 이 도시에서1945년 2월에 이차 대전 종전 이후의 일을 논의하는 얄타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런데 이 얄타 회담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국제 사회에서의 러시아의 위상의 변화이다. 그 이전의 소련은 국토는 가장 넓으면서도 대국으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얄타 회담을 시점으로 중국의 장 개석 총통은 국제 사회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소련의 스탈린이 새 강자로서 떠오른다. 안으로는 공산 게릴라와 내전을 치루며 밖으로는 일본군의 공격에 저항하는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아시아의 대국이 아니었다.

   천수이볜 대만 총통은 지난20일(2000년 6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에게 남북한 정상회담과 같은 양안(중국과 대만) 정상회담을 갖자고 공식 제의했다. 천 총통은 총통 취임 1개월을 맞은 기자회견에서 ‘양안 지도자가 모두 지혜와 창의력을 갖고 역사를 새로 써가야 한다’며 장 주석에게 시기와 장소에 상관없이 함께 앉아 악수하고 화해하기를 진지하게 제의하였다. 그러나 주방자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에 두 개의 중국이 있을 수 없으며, 대만은 중국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차갑게 답변하였다. 남북한 지도자들이 악수하고 회담하는 사진을 서재에 걸어놓고 이를 배우고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삼는다는 천수이볜총통의 양안 정상회담에 대한 열망은 강자의 논리 앞에 이렇게 꺽였다.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권이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그 어부 지리를 혁명의 기회로 삼은 것이 중국 공산당이었다. 만일 큰 집에 든 도둑이 원주인을 오두막으로 쫓아내고 나서는 오십 년만에 화해의 악수 한번 해보자는 원주인의 청마저 거절한다면 그것은 분명 대도(大道)에 어긋나는 처사이리라.

   다시 본 화제로 돌아와, 태평양 건너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일본군을 미국은 해전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미군 전술의 지리상의 한계였다. 그래서 미국이 만주국 등 아시아 북부의 일본군 공격을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만일 루즈벨트가 러시아의 스탈린이 영국의 처칠과 같은 파트너의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었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왜냐하면 그 결과 스탈린은 일본이 항복하기 며칠 전에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서 총 한방 쏘지 않고 전승국 행세를 하며 아시아의 넓은 땅덩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스탈린에게 한국이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는 독립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미국, 영국, 소련 및 중국 4개국이 한국을 신탁 통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스탈린이 동의한 이 안이 선언문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것을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행사의 명분으로 십분 활용한다. 어느 한 강대국이 한국의 새 정부 수립 과정에 독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루즈벨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만일 그때 루즈벨트의 건강이 좋았더라면 보다 신중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품는다. 두 달 후 그는 그의 병환으로 대통령 임기 중 서거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거한 며칠 후인 4월 29일 마침내 독일은 항복하고 ,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의 교외 포츠담에서 개최된 회담에는 미국의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과 소련의 죠셉 스탈린(Joseph Stalin) 등 3개국 정상이 각각 군사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미군 지휘관들은 소련이 대 일본 전쟁에 참전할 것을 종용하였으며, 소련군 지휘관들은 한국에 일본군 기지가 있으니 미국이 한국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공격 대상은 일본 본토이지 한국이 아니라는 것이 미국측의 답변이었다.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이 이행될 것을 천명하였다. 8월 8일 대 일본 전쟁에 참전하면서 소련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서약하였다. 다음날 소련군은 만주에서 활동 개시를 하고 한국의 북쪽 접경 지대에 이르렀다.

   8월 11일 미국이 작성한 한국 주둔 일본군의 항복 조건 문안의 일반 명령 1호에서 삼팔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에 그리고 삼팔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 항복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방송으로 항복을 발표하자 삼천리 반도 강산에는 해방의 기쁨과 감격이 충만하였으며, 미국은 승전 경축으로 들떠 있었다. 그후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극동의 CIA는 소련군이 북한에서 계속 남진하고 있다는 첩보를 워싱톤에 긴급 보고하였다. 이에 당황한 워싱톤 행정부는 9월 8일에 하지 중장이 인솔하는 미군을 남한에 급파한다. 다행히 소련군은 정확히 북위 38도에서 남하를 멈추었으며, 미군은 서울에 입성한 다음날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다. 북한에서 소련군 장교 출신 김일성을 후원하는 소련군 주둔 사령부의 군정이 곧바로 시작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잠시 행정과 치안의 공백기가 있다가 역시 곧 군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왕래할 수 있는 분단이었으나, 1948년 8월과 9월에 남한과 북한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별개의 독립을 하므로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다가, 1950년의 6.25 사변과 1953년의 정전 협정 이후 더 이상 왕래할 수 없게 된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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