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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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7월 31일 

한국사에 무지한 강정구 교수 좌익 논리의 문제점

   강정구 교수처럼 김정일 똘마니 근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 좌익의 주특징 중 하나는 역사에 대한, 특히 한국사에 대한 무지이다. 그들이 한국사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과 너무 다르게 말한다는 점이다.

   강정구 교수의 논리는 미소 냉전이 남북 분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정구의 억측과 달리 1945년에 미국은 한국에 별관심이 없었다. 1945년 8월 15일까지만 해도 소련은 미국이 막대한 군사 원조를 제공하던 미국의 주요 우방이었다. 2차 대전 중 독일 침공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소련이 독일군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서부 전선에서 미군이 독일군을 궤멸시켰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일본군과도 싸우던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국이 전략상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했다. 러시아군과 독일군의 전투 때 미군이 독일군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독일군의 전투력이 분산되게 하였듯이 이번에는 러시아군이 일본군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일본군의 전투력이 분산되게 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미국의 막대한 군사 원조를 받으면서도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지 않다가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기 불과 며칠 전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미국에 항복하자 일본군에 총 한번 쏜 적이 없는 러시아군은 자기네도 승전국이라면 전리품을 챙기러 한반도에 남하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군 병사들은 미국 본토로 돌아가고 싶어했으며, 아들과 아빠와 남편을 여러 해 동안 기다리던 미국 시민들도 미군이 귀국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극동 CIA는 러시아군이 계속 한반도에서 남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러시아군이 삼판선 이남으로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도 서둘러 미군을 남한에 상륙시켰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려면 한일합방 문서를 폐기하는 국제 협약이 필요하였다. 바로 이 외교를 미국이 우리를 대신하여 해 주었다.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과 중국의 쟝 개석 총통이 모인 삼개국 정상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 제안으로 이루어진 이 카이로 선언의 중요성은 한일합방 문서의 무효화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 영토의 주권을 주장할 근거는 한일합방 문서였다. 그러나 카이로 선언이 이 문서를 무효화시킴에 따라 1943년 12월 1일부로 일본은 우리나라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할 명분을 국제사회에서 상실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삼천리 반도 강산에는 해방의 기쁨과 감격이 충만하였으며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은 만세 소리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여전히 조선총독부가 존재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포츠담선언이 국제사회가 우리나라를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을 보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해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의 교외 포츠담에서 개최된 회담에는 미국의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과 소련의 죠셉 스탈린(Joseph Stalin)이 모인 3개국 정상회담 카이로 선언대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재확인하였다. 이 포츠담 선언 뉴스가 전해졌을 때 우리나라에는 이미 해방에 대한 벅찬 기대가 있었으며, 오로지 언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느냐는 시간 문제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의 중요성의 교훈을 배운다. 일제 시대 때 다양한 형태의 독립군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독립군 부대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몇번 소규모 교전을 한다 하여 한일합방 문서가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만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주도한 1943년 12월 1일의 카이로 선언이 아니었더라면 일본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다. 당시는 한반도가 일본 영토로 전세계 지도에 표기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다. 아직 세계가 한반도를 일본 영토로 여기고 있던 때였다. 이때 미국 대통령이 카이로 회담을 개최하여 한일합방 문서는 무효이며 한반도는 일본 영토가 아님을 전세계에 알리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다. 이 카이로 선언이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근거였다. 그리고 이 카이로 선언은 상해 임시정부의 부단한 외교적 성과였다. 상해 임정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광복군을 창설한 것 외에는 독립군을 조직하지 않고 오로지 외교만 하였다. 그리고 24년간의 끈질긴 외교 끝에 마침내 미국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이고 1943년 12월 1일에 카이로 선언을 받아내었다. 우리나라는 독립군 전투가 아닌 외교적 방법에 의해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이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애써준 것이 왜 잘못인지 강정구에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강정구는 우리나라가 일본 총독정치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한 일이 무엇이기에 미국의 선의를 왜곡하는가? 일제 시대에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이 있었는데, 강정구가 지지하는 단체는 공산주의 진영이다. 일제 시대 때 독립운동 단체들은 크게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구분된다. 훗날 우익으로 알려진 이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자비로 혹은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당시에는 조선인으로 불림)들이 보내는 후원금으로 독립 운동하였다. 그리고 훗날 좌익으로 알려진 공산주의 진영 독립군은 중공군과 러시아군 부대 소속이었으며 때로 항일 투쟁과 전혀 관계 없는 전쟁에 파병되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우익 독립군과 좌익 독립군의 독립운동 방식에는 몇가지 대조점이 있었다. 우익 독립군의 궁극적인 투쟁 대상은 일본군이었던데 비해, 좌익 독립군의 궁극적인 투쟁 대상은 조선인이었다. 좌익이 공산주의 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조선인 부르조아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여 차지하려는속셈 때문이었기에 그들의 독립운동은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산주의 진영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고 일본의 시각에서 공산당 군대와 일본군간의 전투였다. 그리고 공산주의 진영 독립군 역시 항일 투쟁에서 한몫의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항일 투쟁은 오히려 문제를 초래하였다. 즉, 우익의 독립운동은 주권 찾기에 기여한데 비해 좌익의 공산주의 운동은 오히려 주권 상실에 기여하였다.

   우익 독립운동단체인 상해임정이 하나의 휼륭한 외교적 주체 역할을 하였던데 비해 중공군과 러시아군 소속 조선인 부대였던 좌익 독립운동단체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일본군에 징병된 조선인들이 일본군 소속이었던 것처럼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공산당 군대에 배속된 좌익 독립군은 전혀 우리 민족의 외교적 주체가 될 수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또 다른 외세에 침략의 명분을 주었다.

   만일 미국의 견제가 아니었더라면 러시아는 남북한 전체를 정복하여 몽고처럼 자기네 영토를 삼았을 개연성이 있다. 부동항을 찾아 한반도 문제에 이해관계가 있던 러시아는 1905년의 노일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도 과욕을 부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다가 1945년 8월에 패망을 눈앞에 앞두고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설욕의 기회가 왔으며 한반도를 점령한다 해도 이제 아시아에는 러시아를 견제할 다른 나라가 없었다. 중국도 모택동의 공산당 혁명군과의 내전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러시아의 이런 호기를 미국의 견제하였다. 1945년 8월 2일 미국이 스탈린을 참석시킨 포츠담 선언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스탈린의 서명을 받아낸 한국 독립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에 러시아는 엉큼한 생각일랑 할 생각하지 말라는 암시가 있었다. 포츠담 선언으로 한반도를 식민지 삼을 길이 없어진 스탈린은 그럼에도 김일성 내세워 북한에 형식상 독립국가인 괴뢰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가 그렇게 할 근거는 김일성이 러시아군 장교였다는 사실이었다. 이처럼 좌익의 항일 투쟁은 한반도에 또 다른 외세를 불러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자마자 한반도에 남하한 소련군이 삼팔선 이남을 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입국하였다. 이렇듯 소련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보호해 주기 위하여 입국한 미군이 어째서 점령군이라는 것인지 우리는 강정구에게 물어야 한다.

   김정일 똘마니 강정구 교수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권력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가? 그들의 권력은 스탈린에게서 왔다. 김일성을 괴뢰 정권의 우두머리로 임명한 자도 스탈린이요, 북한의 행정 체제도 러시아 군정사령관의 작품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의 똘마니 김일성이 주체 사상을 말한 것은 주제 파악을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정구 교수와 같은 김정일 똘마니들이 김정일을 찬양할 때 결국 김일성을 임명한 스탈린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을 찬양하는 것은 그의 폭정과 학살 행위를 찬양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좌익 사관이 비뚤어져 있는 이유는 한국 좌익은 그 태생부터 스탈린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사대주의가 한국 좌익의 출발이었으며, 스탈린을 최고 수령으로 받들던 이들이 오늘날 그 꼬붕이의 아들 김정일을 수령으로 받들고 있다.

   중국 공산당 팔로군 소속으로 활동하던 좌익 독립군도 오히려 우리나라에 또 다른 외세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50년 10월 압록강 근처 산골마을까지 혼비백산 도망친 김일성이 중국의 모택동에게 파병을 요청하였을 때 모택동으로서는 내리기 무척 힘든 결정이었다. 겨우 건국 1주년을 맞는 중국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확대될지 모르는 모험을 하기는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파병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은 과거에 조선인 부대가 중국 공산당 군대 소속으로서 쟝개석 총통의 정부군과 싸웠기 때문이었다. 연안파로 팔로군 출신이 해방 후 북한에도 가고 남한에도 왔으나, 북한에 있던 연안파는 6.25 전쟁 때 이용당한 후에는 모두 김일성에게 학살당하거나 숙청되었다. 오히려 남한에 온 연안파는 1949년에 창군 요원이 되어 정승화씨처럼 훗날 한국군 최고 지휘관들이 되었다. 여하간 그들이 일제 시대에 중국공산당 팔로군에서 활동한 것은 1950년 10월 중공군이 김일성을 도와 한국전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우익 독립운동단체인 상해 임정 인사들을 독립운동가로 보느냐 아니면 강정구처럼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공산당 소속 군인들을 독립운동가로 보느냐에 따라서 한국 현대사의 해석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김정일 똘마니 강정구 교수의 보다 큰 문제는 한국사에 대한 그의 무지와 왜곡에 바탕을 두고 그의 좌익 논리를 전개한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훗날 다듬어지고 내용이 보충되어야 할 미완성작입니다. )

김대령 목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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