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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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8월 17일 

한국인의 미학적 관점에서 한국인의 힘 찾기

   한국인의 힘은 과거와 미래로부터 온다. 우리 민족의 과거의 역사적 체험이 한국의 힘의 원천이다. 민족의 과거는 우리 시대의 거울이며, 한국적 문화는 한국인의 저력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 또한 한국의 힘의 원천이다. 국난의 위기와 시련의 때에 희망이 우리 민족을 지켰으며, 미래의 비전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역사적 시각에서 보는 이 두 가지 한국의 힘의 원천 중 이 글에서는 민족의 과거로부터 오는 한국의 힘을 미학적 관점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우리의 독특한 역사 속에 우리 민족이 형성되었으며 우리 문화가 발전하였다. 한국인은 단일 민족이며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민족이기에 소중하다. 그리고 한국인의 특질 속에 한국인의 독특한 힘이 있다. 한국 전쟁의 폐허 위에서 단시일 내에 그 국민의 지식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된 것도 한국인의 독특한 힘 때문이었다. 시련의 세월 속에 좌절하지 않고 굳세게 달려오는 민족성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었다. 한국인의 고추장과 김치는 서민 문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원숙미가 있다. 고추장과 김치는 익어갈 때 제 맛을 낸다. 세월의 연륜 속에 익어 가는 한국인의 원숙미--이것은 한국인의 힘이다.

   2002년 여름의 한일월드컵은 한국인의 힘을 보여준 축제였다. 그리고 이것은 신세대의 발랄한 젊음이 주축이 된 응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대중문화가 십대 문화 중심이 되면서 한국인의 미학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사람의 아름다움에는 세월의 연륜 속에 더욱 꽃피우는 지성미와 인격적 완숙미 등 다양한 미가 있음에도 신세대의 외모지상주의는 선배 세대를 왕따시키고 퇴출하였다. 민주당과 좌익이 젊은이들의 표를 노무현 후보에게 몰아주기 위해 많이 사용한 구호 중의 하나가 이회창 후보는 구세대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무현 후보보다는 훨씬 원숙한 이회창 후보는 구세대 인물이라는 인상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준 그들의 전략이 초래한 16대 대선 결과를 사람들은 2030세대 돌풍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국적인 원숙미를 부정한 2030세대 돌풍은 그 시작부터 순수하지 못했다. 한일월드컵의 붉은악마 열풍 다음에 한 오마이뉴스 청년 기자가 앙마라는 아이디로 벌인 촛불 시위 자작극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기극으로 촛불 시위 열풍을 일으켜 교묘하게 특정 후보 선거운동을 한 것은 한일월드컵 에너지를 도둑질한 행위였다.

   신세대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한국 좌익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민족"과 "자주"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진보는 서열 파괴이다. 무엇이 서열 파괴인가? 그것은 원숙미와 천방지축의 세대 교체이다. 노무현씨가 어제(2003년 8월 14일) 언론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하였을 떼 이것은 새로운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과거의 대통령들은 결코 언론사들을 상대로 그런 소송을 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대통령의 세대 교체를 실감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새 시대의 새 대통령의 모습인가? 비록 그것이 일부 천방지축하는 젊은이들과 문화 코드가 맞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원숙미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야 국민들은 나라의 최고 원로에게 원숙미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신세대는 빠른 것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민족의 영도자는 노사모 돌풍으로, 촛불 시위 열풍으로 급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은 그가 한 정당의 당수로서 그의 통치력이 검증받을 수 있는 기회를 원하였다. 그러나 선거에 이용된 반미촛불시위는 그런 기회를 앗아갔으며 노무현씨는 원숙의 기회 없이 나라의 최고 원로인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원숙이 결여된 곳에 미숙은 필연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우리나라 건국 초창기에는 우리나라에는 아직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도 시장 경제에 대한 경험도 없는 신생국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오히려 원숙한 지도자의 영도 하에 나라가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하였는데,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우리나라가 갖출 것을 거의 다 갖춘 이 시점에서는 노무현이란 미숙한 인물의 손에 국정 운영이 맡겨져 있다. 노무현의 코드는 원숙이 아니라 미숙이며, 노무현씨의 개혁은 원숙한 자와 미숙한 자의 교체이다.

   노무현씨가 언젠가는 원숙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운전을 운전 연습생에게 맡겨야 할 이유였던가? 그리고 원숙한 지도자를 배척하고 미숙한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우는 것이 민주주의였다는 말인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민주주의 투표의 정신은 원숙한 지도자의 선출에 있다. 그러면 그 무엇이 이회창 후보, 이인제 의원 등 보다 원숙한 분들을 제치고 노무현씨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는가? 노사모 및 노사모에 달라붙은 여러 좌익 세력들과 그들의 부정선거운동이었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좌익의 득세를 의미하였으며, 전교조와 한총련과 범대위 등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좌익 세력이 민주화 운동 간판을 달고 국민을 속이는 선거운동을 하였다.

   우리나라에 침투한 남파공작원들과 친북 좌파가 그들의 심리전을 위해 "민족"과 "자주"라는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 이미 침투한 공산주의 사상에 의해 그 씨가 뿌려지고 해방 정국 때 그 모습을 드러낸 좌익은 그 기원부터 비한국적이었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레닌이 모두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혁명 방식은 원숙미의 부정이라는 점도 비한국적이다. 그들의 계급 투쟁 이론에서 사람은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 중 하나에 속한다. 그리고 부르주아는 악덕 지주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곰처럼 미련한 좌익이 그 논리를 한국 사회에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긴다. 모든 부르주아가 악덕 지주인가? 좌익은 흥부든 놀부든 부르주아는 악덕 지주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래서 좌익이 설치는 곳에서는 근면한 흥부의 원숙미는 개혁 대상이 되어버린다.

   본래 좌익 사상은 놀부의 도둑놈 심보에서 출발한다. 무엇이 경제 문제 해결책인가? 그것은 흥부처럼 근면한 생산 인력이 되던가 아니면 놀부처럼 흥부의 몫을 자기 몫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무엇이던가? 바로 이 놀부의 심리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무엇이 공산주의의 문제인가? 생산 활동에 종사할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전국민이 절대 빈곤에 처하게 됨을 의미하며, 좌익 정권이 들어선 나라에서는 노동자에게 일자리가 없어짐을 의미한다. 곰처럼 미련한 좌익이 말하는 노동자의 천국은 전국민이 절대 빈곤에 처하게 되는 나라, 노동자에게 일자리가 없는 나라이다. 무엇이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 자주의 문제인가? 그것은 집단 농장의 농민들은 미국의 식량 원조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자주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 민족 자주인가? 아니다.

   흥부의 것을 빼앗아 놀부끼리 나누어 갖으려는 심보에서 출발한 좌익 사상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예가 없다. 레닌이 1917년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원숙한 기술 인력을 미숙한 노동자들로 대체한 러시아의 산업시설은 마비되었으며, 레닌 자시도 혁명에 성공하자마자 병에 걸려 죽었다. 레닌은 스탈린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레닌의 혁명 동지들을 한 명씩 차례 차례로 모두 죽였으니 그가 혁명으로 거둔 것이 무엇이었던가? 우리나라에서도 박헌영씨가 남로당을 이끌고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한국 전쟁 중 스탈린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에게 모두 학살당하였다. 같은 공산주의자인데 김일성이 왜 박헌영을 학살하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빨치산 부대 출신인 김일성보다는 박헌영이 훨씬 더 원숙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좌익 사상은 원숙미의 부정이라는 데서 비한국적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혹은 좌익 사상이 한국 사회에 침투하여 한국인의 미덕인 원숙미를 부정하였을 때 두 가지 종류의 리더십이 나타난다. 북한에서는 김정일 같은 미숙아에게 절대 권력을 주기 위하여 그를 수령으로 떠받드는 우상 숭배가 나타난다. 참으로 원숙한 지도자는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 같은 거창한 호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숙한 지도자일수록 권력의 허세가 강하다. 남한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남한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노무현씨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예우가 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놈현이라고 부르거나 심지어 노무현 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무현씨는 권위주의를 벗어버리겠다고 말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도자로서의 그의 원숙미를 보기 원한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미숙을 감추기 위해 인권 탄압을 한다. 현 대통령의 미숙이 드러난 남한에서는 땅에 떨어진 대통령의 권위 때문에 사회 기강마저 도전을 받고 있다.

   물론 진보도 필요하지만, 문제는 좌익이 말하는 진보는 미숙을 향한 진보라는 점에서 퇴보적이라는 사실이다. 세계에는 그리스, 이탈리아, 몽고, 이라크 등 위대한 선조를 자랑하는 나라들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수 천년 전의 선조를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오늘 뒷걸음치고 있다면 그 자랑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위대함은 원숙미를 향한 행진에 있다. 해 뜨는 나라는 숨어 있던 가능성이 언젠가 빛을 발할 나라이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은 옛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타민족이 와서 배우고 싶어하는 정신 문화를 가지는 것이다. 스포츠 강국이 되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꿈의 전부인가? 아니다.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신비로운 문화가 더욱 그 원숙미를 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나라는 그 시끌시끌한 정치적 이슈들로 세계인의 눈총을 사고 있다. 불과 이 백년 남짓한 역사를 가졌으며, 다민족 국가인 미국도 국가적 대사를 놓고 일치 단결하는데,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인 우리는 단합하지 못하고 있으며, 반미촛불시위 등 한국 시사가 자주 세계 뉴스거리로 등장한다. 그런데 해방 정국 때 시작된 좌익과 우익의 첨예한 대립은 한마디로 흥부의 경제관과 놀부의 경제관의 대립이었다. 이 세상에는 열심히 일하는 흥부와 놀고 먹으면서 남의 몫까지 독차지하려는 놀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일찍부터 우리 민족은 열심히 일하는 흥부에게 그 보상이 돌아가는 경제관을 일찍부터 권장하였던 바 이것은 서양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윤리가 발전시킨 자유시장경제와 그 정식이 일맥상통한다. 또 하나의 경제관은 좌익이 러시아에서 수입해온 마르크스-레닌 경제관인바, 이것은 게으른 놀부가 부지런한 흥부의 몫을 차지하는 것을 제도화하는 경제관이었다.

   한국 사회에 침투한 좌익이 "민족"과 "자주"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실상 그들은 지독한 사대주의자들이다. 정치적으로 김일성 왕조의 임명자는 소련의 스탈린이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러시아판 놀부 경제관인 공산주의 경제관도 우리 민족의 경제관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경제관, 즉 한국적 경제관은 흥부의 경제관이며, 흥부의 경제관의 서양판이 자유시장경제이다. 그러므로 자유시장경제, 즉 자본주의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모형이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럼에도 좌익이 여태껏 러시아판 놀부 경제관을 고집할 때 이것은 한국적 원숙미의 부정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경제관인 흥부 경제관을 우리 시대에 더욱 원숙하게 발전시키면 얼마든지 국력이 튼튼해질 수 있음에도 한국적 미학을 부정하는 좌익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는 내일의 한국의 희망이다. 그리고 청년의 힘의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대 교체의 이유도 아닐 뿐더러 섣부른 세대 교체는 한국인의 원숙미의 부정이다. 인터넷 세대가 앞세대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인터넷이 초래하는 역기능도 있다. 예를 들어, 앞세대 청소년들에게는 고전을 탐독하며 고전의 지혜의 샘 속에서 성장 영양분을 얻을 기회가 더 많았다면 신세대 청소년들은 오늘의 인터넷을 통해 오늘의 연예인의 외모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기회가 더 많다. 신세대 청소년들이 뛰어난 인터넷 정보 능력으로 아무리 연예인의 외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어도 그 지식은 지성을 살찌우게 하는 지식은 아니다. 그러나 고전을 읽은 자가 더 멀리 앞을 내다보는 시대의 안목을 가진다. 반미촛불시위에 동원되었던 청소년들과 일부 청년들은 그 촛불시위가 초래한 갖가지 국가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앞세대는 구세대라는 편견을 가지는 것은 한국적 원숙미의 부정이다. 발랄함은 신세대적 미의 자랑이다. 그러나 천방지측은 발랄함이 지니는 약점이다. 영국인들은 이십 대의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미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기품 있는 원숙미는 그녀가 30대가 되었을 때 더욱 돋보였다. 영국 마거리트 대처도 할머니 나이에 수상에 올랐으나 그녀의 원숙미는 날로 돋보였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이야말로 원숙미를 가꿀 수 있음에도 근자에 미의 기준이 십대, 이십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대중음악도 십대 취향에 편중되어 있다. 십대 문화의 파워는 좋은 것이지만 세대차가 너무 강조되는 것은 한국적 원숙미의 부정이다. 그리고 친미문화의 신세대가 반미주의를 품고 있다는 것도 자기 모순이다. 보다 한국적이며 보다 원숙미를 가지고 있는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가 미의 정서를 공유할 때 우리는 세대차를 극복할 수 있으며, 세대차 극복은 좌익과 우익의 갈등을 해소하는 한 열쇠이다.

   오늘날 한국 신세대 문화는 한국적 정체성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외국 문화, 특히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그리고 미국 문화에 심취해 있는 신세대가 좌익의 반미주의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며, 한국적 원숙미를 계발한 창작이 세계적인 문화이다. 미련한 좌익은 앞세대는 보수적이며 따라서 수구꼴통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 속에 발전된 한국적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앞세대는 한국적이며, 그러기에 세계적인 문화 창조의 원천이다. 실로, 한국적인 원숙미야말로 한국인의 힘이며, 이 한국인의 힘의 원천을 더욱 원숙하게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새 시대를 위해 한국인의 힘을 키우는 길이다. 그리고 여기에 선후배 세대가 세대차를 좁히며 한국적 원숙미를 계승하여 한국 문화를 더불어 발전시켜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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