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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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3월 5일 

좌익 사상 재등장의 불씨와 연료 -- 민족사적 관점

   1979년 12월 12일 군부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 하극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킬 소지가 있다. 본래 12.12 사태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군의 의지 행사였다. 당시 군은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인 정승화 장군의 지배 체체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 수호 정신이 투철한 육사 출신 장성들을 지도자로 받드느냐의 선택의 갈림길에 있었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정승화 장군이 독단적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장군을 제거하려 하였으며, 정승화 장군측 한 장성이 자기가 지휘하는 헌병대에 전두환 장군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그 헌병대 장교가 오히려 그 명령자를 체포한 다음 그 사실을 육사 출신 장성들에 보고한 것이 12.12 사태였다.

   왜 대한민국 군 내부에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 장성들 대 육사 출신 장성들간의 반목과 대립이 있어 마침내 12.12 사태를 야기하였던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박정희 대통령께서 정규 육사 출신 장성들을 중심으로 하나회라는 육사 동기 친목회를 조직하신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9년 대한민국 국군이 창군됨과 더불어 주한미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나 아직 육사가 없었다. 육사는 그 후 여러 해 지나서 설립된다. 그러면 누가 장교가 되었는가? 대다수가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 장교들이었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창군 후 여러해 지나서야 비로서 육사를 설립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 장교들의 사상을 의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 군관들이 소위 연안파라고 불리는 빨갱이들이였다.

   이렇듯 자기네끼리 토종, 순종, 잡종 빨갱이를 따지며 차별하는 북한에는 본래 다섯 부류의 대표적인 빨갱이 부류들이 있었던 바,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의 연안파, 러시아군 출신의 소련파, 남로당계, 빨치산계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서로 순종과 잡종을 따지는 대학살극에서 러시아 군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의 소련파 빨갱이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스스로 항일 투사를 자처하는 김일성은 일본군도 손댈 수 없었던 독립군 지도자들을 단지 순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장 많이 학살한 자요, 주체 사상을 말하는 그는 철저한 러시아 사대주의자였다. 러시아에서 지원받은 무기로 수백 만명의 동포를 학살한 전쟁을 일으킨 그는 북한에서도 빨갱이의 성분을 순종과 잡종으로 구분하여 박헌영 등 엄청난 수의 좌익 인사들과 토지 소유주들과 지식인들을 학살하였다. 북한의 공산주의 혁명은 피의 혁명이었으며, 김정일은 그 피의 혁명으로 세워진 정권의 세습자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일견에서 우리는 이북에서는 중국공산당 출신의 연안파 빨갱이들은 밥그릇 차지는 커녕 무참하게 모두 학살되었는데 비해 남한에서는 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라갔던 정승화 장군이 그 예이듯이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 장교들이 득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군부 장악은 이승만 대통령의 그 철저한 반공 정책에도 불구하고 어쩔수 없이 인정되어야 하는 현실이었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발견한 문제점이 있었다. 한편으로, 국가 경제 발전에만 전념하시던 박정희 대통령은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 장성들의 텃세에 짓눌려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의 진급이 어려움을 보았다. 그래서 정규 육사 출신들이 서로 격려하며 단합하는 친목회로서 하나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에 정승화 장군 측 장성이 영관급의 헌병대 장교에게 전두환 장군 체포 명령을 내렸을 때 영관급 육사출신 장교들은 누구를 군의 지도자로 모시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그리고 상황 판단은 매우 빠르고, 기민하게 이루어졌다. 전두환 장군을 체포하러 가던 발길이 되돌아섰다. 이것이 12.12 사태이다. 이것은 지극히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이 우발적인 사건 배후에는 향후 대한민국 군대가 누구를 지도자로 모시느냐의 선택의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군은 자유 민주주의 수호의 편에 서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흔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경제 발전도 못 시킨 독재자였다는 혹평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런 혹평은 타당성이 없다. 우선, 1952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의 강수를 쓰면서까지 미국으로부터 끌어낸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외교의 명수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믿거나 말거나 1950년 6.25 전쟁 발발 소식은 한국 정부보다 미국 정부가 먼저 알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삼팔선 일대에서 북한 인민군 사단들이 기습 공격을 하자 전방의 군 부대는 취침 중에 황급히 깨어나 후퇴하여야 했다. 이것은 예사 상황이 아니라는 보고를 받은 주한미국 대사관에서 한국 정부에 확인 문의를 하려 했으나 일요일이라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정부 고관들의 집집마다 찾아갔으나, 그날 새벽에 군부와 고관들의 연회가 있었던 관계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 트루만 대통령에게 먼저 한국 전쟁 발발 소식을 긴급 보고하였다.

   일요일에 그 보고를 받은 트루만 대통령은 즉시 미국의 한국 전쟁 참전 명령을 내렸다. 아직 한미 동맹이 체결되지 않은 때였다. 지금의 이라크 전 참전처럼 국회의 동의를 얻기는 커녕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안건 상정도 하지 않고 참전 명령을 내렸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 국민은 평화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정치 생명이 걸린 문제이며 결국 그는 재선에 실패한다. 더구나 그 해 봄에 미국은 아치슨 독트린이란 성명을 발표해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선언을 하였었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도 소련의 스탈린도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트루만 대통령이 한국 전쟁 발발 보고를 받고 즉각적으로 미국의 한국 전쟁 참전 명령을 내렸다. 왜? 만일 그때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 아니라 지금의 노무현 같은 중도 좌익이었다면 트루만이 한국 전쟁 참전을 결단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철저한 반공 정신은 그만큼 미국의 정계에서 신임이 두터웠으며, 야당에서도 트루만 대통령의 결단을 환영하였다. 흔히 국제 외교에 문외한 이들은 미국이 자기네 이익 때문에 한국을 지킨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 외교는 일차적으로 지도자의 신임의 문제이다. 당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미국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계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이 두터운 신임의 한미 외교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경제적 업적이 없었다는 혹평 또한 편파적이다. 그 명분이 무엇이든 1960년의 4.19혁명이 남긴 과제는 그때를 기점으로 미국이 무상 원조 중단 조치를 취하고 해마다 1억불씩 무상원조액을 삭감해나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시작하실 무렵 국고에는 외화가 1억불도 안되었으며, 당시 GNP가 75불이었다.당시 UN에 등록된 120여개국 중에서 우리 밑에 인도만 달랑 있었다.그러나 인도는식량을 자급 자족할 수 있는 나라인데다가 6억마리의 소를 수출만 하여도 않아서 부자될 수 있는 나라였다. 당시 한국은 어떠하였는가? 국가 재정의 90%가 미국의 지원으로 충당되었다. 70%는 무상원조였으며,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지출하는 달러가 한국 정부 예산의 20%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 90%는 물론 미국의 기독교계와 사회사업단체 등 각종 민간 단체들이 지원한 막대한 병원 건축비,학교 건축비,사회복지시설 지원비 등을 제외한 금액이다. 이런 막대한 지원을 받고도 한국의 GNP가 75불이었다면 그것은 한국의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음을 의미한다.   

   오죽하면,1950년대에는 방글라데쉬와 캄보디아 같은 나라들까지 우리나라에 경제 원조를 했었겠는가? 세계에 국가 경쟁력이 가장 없었던 나라가 우리나라였다.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는데다 자원마저 없으니 인도네시아처럼 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미국이 엄청난 지원을 했다. 당시 미국이 한국 한 나라에 한 지원은 2차 대전 후 마샬 플랜을 통해 유럽의 독일,프랑스 등 여러나라에 한 것보다도 더 많았다. 액수로 따지면 한국은 미국의 대외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한국의 GNP 75불은 미국의 원조로 이루어져 있었다.수천 만명을 미국이 먹여 살렸다. 당시 국제 고아와 같은 한국에 미국은 맘좋은 외삼촌과 같은 나라였다. 산업시설이며, 병원시설이며,학교시설이며 우리나라를 재건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자기네가 알아서 챙겨주었다. 원조를 요청한 것도 아닌데 막대한 무상원조까지 해 주었다. 왜? 국제 외교에 문외한들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천만에! 이것은 일차적으로 지도자의 신임의 문제이다. 국제 외교에 문외한들이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이 ?임하자마자 미군은 철수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이승만 대통령 때 미국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혈맹의 우방으로 우대하였다. 왜? 국제 외교는 일차적으로 지도자의 두터운 신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임기가 2회에서 3회로 늘었다고 반드시 독재자는 아니다. 미국도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돕기 위해 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하는 헌법 조항을 수정한 예가 있으며, 한국도 대통령 임기를 2회에서 1회로 수정하는 개헌을 한 바 있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좌익 인사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민주주의인가? 2003년 오늘의 싯점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우리 민족의 지난 사십 년간의 민주화 운동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음을 분명히 예시한다. 여하간, 민주주의의 정통성의 논란을 떠나 이승만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은 그 시대 상황에서 한미 외교의 무엇보다도 귀중한 자산이며, 국제 정세에 무지한 노무현 정권의 외교는 한국의 외교 시계를 60년 뒤로 후퇴시켜 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결코 안될 이승만 대통령의 치적은 그의 반공 정책이었다.  

   1946년 3월 1일에 광복 후 첫 삼일절 기념행사가 열렸으니 실로 얼마나 뜻깊은 날이었던가! 아직도 어른들의 기억에 생생한 이 비극적 충돌은 좌익과 우익이 따로 행사를 가진 후 시가행진 도중 충돌이 발생하였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태는 서울역 맞은편의 세브란스 부근( 현 연세재단 빌딩)에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부드럽게 말해 충돌이지 실은 우익 애국지사들이 좌익 깡패 패거리들에게 각목으로 몰매 맞는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간, 좌익 깡패들이 활개치는 당시 사회는 그만큼 살벌하였다. 다행히 미군 군정이 치안을 유지하였기에 망정이지 만일 이러한 치안 유지가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이 생존할 수 있었을까? 태평양 전쟁 당시 너무 일본제국에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수탈당했기 때문에 해방 후 우리나라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었다. 이런 경제적 생존의 위기 외에 무엇보다도 치고, 때리고, 죽이는 좌익의 폭력 때문에 우리민족의 앞날은 매우 불투명하였었다.

   다행히 경제 문제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인심좋은 외삼촌 역을 하기 시작한 미국이 알아서 챙겨 주었지만 좌익의 난무하는 폭력이 한국인을 불안케 하였다. 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팔순 노인들이 3.1절 국민대회에 모여들었는가? 그들은 좌익이 활개치는 사회는 생지옥임을 목격한 역사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 상황에서 우리 민족에 필요한 초대 대통령은 누구였겠는가? 1945년 8월 15일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지 3년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 우리 민족 오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 민주주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민족은 아직 단 한번도 자유 민주주의를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제 시대에 독립군이 있었다. 사가들은 동북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진영으로 구분하는데, 그 주류는 물론 공산주의였다.

   일제 시대 때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여야 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막대기로 일본군과 싸울 수 없다. 독립군도 총이 필요하였다. 당시 독립군이 무장하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항일 공동전선을 펴며 하나는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중국공산당 팔로군의 지원을 받는 길이었다. 즉, 이것은 일제시대에 대다수의 민중이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란 일제식 교육 아니면, 러시아 적군과 중국 공산당 팔로군을 통해 접하는 공산주의 사상이었을 뿐임을 의미한다. 독립군들이 모두 빨갱이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독립군의 무장을 위해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 건국 50년 기념식 때 북경에서 울려 퍼진 중국 혁명가도 한국인 작곡가의 노래이다. 항일 투사들이 러시아군 혹은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연대하여 독립군 무장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이들도 있었으니 러시아 군관 출신인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공산당 팔로군 출신인 남한의 정승화 장군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 여기서 어떤 과정을 통해 독립군 중 상당수는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당 진영과 연계한 항일 활동을 하게 되었는지 연대별로 약술해 보자. 러시아 연해주지역은 1910년 국치 전후로부터 서·북간도와 함께 중요 독립군기지로 개척된 지역이다. 망명 민족운동가들에 의해 이와 같이 개척된 연해주의 독립군기지에서 양성된 많은 독립군들은 한·러의 국경인 두만강을 넘어 국내 진입 유격전을 펼쳤다. 러시아 연해주에 잔류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1937년 소련정부에 의해 강제 실시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이주정책이 있기전까지 무장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7년에 스탈린은 어느날 밤 갑자기 연해주의 한인 십만 명을 강제로 열차에 태워 열차로 열흘 걸리는 우즈베키스탄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독립운동을 방해한 주제에 스탈린은 1945년 8월 15일에 미국이 일본제국으로 우리나라를 해방시키자 서둘러 러시아군을 파병하여 북한에 러시아 군정을 수립하면서 김일성을 내세워 괴뢰 정부를 세웠다.

   1920년대 만주지역의 운동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그러나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성립된 이후 특히 북만주와 동만주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많은 공산주의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단체들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독립운동단체들을 재편성하였다. 1930년대 초에서 후반까지 남만주의 항일 무장 세력의 큰 줄기를 이루었던 부대는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유격대였다. 중국 공산당에 소속된 항일 유격대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이들은 조선인 유격 부대였다. 이렇게 중국공산당과 더불어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의 일부는 해방 후 북한으로 갔고, 다른 일부는 남한으로 왔다.

   그런데, 각계의 독립지사들이 새 정부 수립의 주도권을 겨루던 해방정국에서 중국공산당 독립군의 운명은 북한과 남한에서 크게 달랐다. 북한으로 갔던 중국공산당 출신인 연안파 빨갱이는 세력 싸움에서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의 소련파 빨갱이에 밀리다가 6.25 동란 이후 모두 학살된다. 그러나 남한으로 온 중국공산당 출신 독립지사들은 비록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이승만 박사에 밀려 정권을 차지하지는 못하지만 1949년에 창군된 국군의 창군요원들과 고급장교들로서 대거 대한민국 군부의 지도부를 형성한다. 즉, 빨갱이끼리 순종이냐 잡종이냐의 성분을 따져 단지 순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연안파를 모조리 학살하였던 북한에 비해 남한에서는 그들이 항일 투사였다는 점을 우대하여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발전시키는데 일조할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숭고한 독립군들의 정신을 이어받되 독립군은 다같은 독립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수의 독립지사들은 사재를 털어가며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진영으로 구분되는 빨갱이 독립군들 또한 있었다. 그들은 어차피 조국에 토지도 재산도 없는 떠돌이들이었으며 조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면 지주의 토지를 다 빼았아 혁명군에게 준다는 공산주의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간 자들이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그들의 꿈이 이루어졌으며 공산주의 이념을 국시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었다. 잔혹하게 학살하면서 인민들의 토지와 재산도 모두 몰수하였다. 그러면, 그들의 꿈은 이루어졌는가? 아니다. 그 다음에는 빨갱이들 사이에 피비린내나는 밥그릇 싸움이 있었으며, 연안파로 불리던 중국공산당 출신 독립군들과 빨치산 항일투사들은 모두 반동으로 몰려 학살되었다. 소련파 독립군들 중에서도 김일성의 가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치범수용소나 아오지탄광으로 보내졌다.

   만일 김일성이 일으킨 6.25 동란에 한가지 화중복이 있다면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도 손쓸 수 없었던 남한의 좌익들을 김일성이 스스로 싹쓸이 학살하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일제 시대때부터 대중의 지지 세력 기반을 굳혀온 남로당의 거두 박헌영이 재야의 왕노릇을 하며 뛰어난 조직력으로 전국 도처에서 빨갱이들의 반란 사건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행히 6.25 동란 중 월북한 남로당 빨갱이들을 김일성이 이북 토종 빨갱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 학살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남한의 빨갱이들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 권오석 씨가 그 예이듯이 6.25동란 중 모든 남로당 빨갱이들이 월북하였던 것은 아니며, 6.25동란 이후에도 검거되지 않은 빨갱이들이 있었다. 실로, 우리사회에 좌익 사상의 불씨는 남아있었으며, 연료만 공급되면 언제든 다시 점화될 소지가 있었다.

   바로 이런 시대의 맥락에서 우리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치적을 재평가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대통령의 사명은 아직도 군부와 사회 도처에 있는 빨갱이들을 색출하여 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55년이나 거친 오늘에도 좌익 세력의 추방은 너무나 힘든 일이라면 하물며 그 시대 상황에는 얼마나 더욱 힘들었겠는가? 지난 해의 16대 대선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들의 흑색 선전이 국민들로부터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를 도적질하여 갔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후보가 낙선되고 거짓말하는 후보가 당선되었기에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직 국민들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던 시절에, 그리고 실제로 북한의 GNP가 남한보다 훨씬 앞섰던 시절에 어떻게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굳건하게 수호될 수 있었게는가?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투철한 반공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교육 정책과 김대중의 전교조를 내세운 친공 교육 정책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누가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 지도자였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여하튼, 우리나라에 빨갱이 사상의 불씨는 남아 있었으며 민주주의 정치인의 가면을 쓴 김대중이 그 불씨를 점화할 연료를 제공해 왔다. 이 사실은 소위「진보」세력이라는 김정일 똘마니의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가장 감상적인 자유주의자들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들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공산주의와는 서로 상극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한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인권 탄압에 민감하다. 이 사실을 아는 빨갱이들은 적화 통일되면 학살 명단 첫 줄에 오르는 이 자유주의자들과 연합 전선을 편다. 남파공작원들은 자신들을 인권 운동가라고 위장하고 좌익 인사들이 공안 당국에서 구금된 사실을 얘기한다. 이 자유주의자들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 반체제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이제 이들에게 인권 운동이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소리를 낼 건수가 생겼다. 이렇게 해서 자유주의자들을 이용하는 빨갱이와 차츰 좌경화되는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인의 가면을 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런 좌익 운동권의 활동에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북한 전체주의 (totalitarianism) 사회에서는 한 개인에게 무한 자유를 허용하자는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기에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이 좌익 사상의 출발점인 남한의 잡종 빨갱이들을 이북 빨갱이들은 학살할 수밖에 없다. 남한 잡종 빨갱이와 이북 빨갱이는 사상 구조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그 차이는 극단적 주관주의와 극단적 객관주의의 창이이다. 절대적 다원론(total pluralism)은, 즉 극단적 주관주의는 사회의 법 체제와 공권력 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은 저항을 위한 저항을 한다. 그리고 무한자유를 요구하는 그들의 감상적 자유주의는 좌익 사상의 불씨에 연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신종 좌익 사상의 문제는 김정일의 공산주의 체제는 개인에게 아무런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 군대가 수십년 동안 죽인 독립군의 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좌익 독립군들을 김일성이 왜 하루 아침에 학살하였는가? 일인 독재 체제를 굳히기 위해서였다. 왜 김정일의 학살 대상 목록 첫 줄에 남한의 그의 똘마니들 이름이 올라 있는가? 그것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요구하는 감상적 자유주의자들은 북한의 수령 독재체제에 가장 적응할 수 없는 자들, 적화통일되면 지상에서 가장 인권을 부정하는 김정일에게 가장 반항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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