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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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월 9일 

영국 다이애너 황태자비와 한국 두 여중생의 윤화사고의 비교

   영국 다이애너 황태자비와 한국 두 여중생의 윤화사고는 그 추모 행사 기간이 길고 또 사상 최대의 추모 인파가 운집하였다는 점 등 여러가지 공통점이 많다. 그럼에도 추모 방식에 있어서 우리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1997년 8월 31일 자정을 지나 새벽이 가까와오는 시간에 영국의 황태자비 다이애너는 그의 연인 더디 파예와 르랑스 파리에서 밀월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찰스 황태자와 결혼한 뒤 줄곧 남편은 있으나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하던 다이애너 황태자비는 모처럼의 달콤한 순간을 즐기며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러나 파리 한 지하도 기둥에 자동차가 충돌하는 비운의 사고가 일어난다.

   당시 다이애너 황태자비가 타고 있었던 고급 승용차는 두 여중생 과실치사 사고를 낸 궤도차 못지 않은 철갑차였다. 그 어떤 차와 충돌해도 끄떡 없다는 가장 안전한 차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 고급 철갑차 때문에 다이애너 황태자비는 오히려 그녀의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사고 후 즉사한 운전사와 그녀의 연인과는 달리 다이애너 황태자비는 많은 피를 흘렸을지언정 살아있었다. 그러나 구조대가 도착하였을 때 그 철갑차를 부수고 그녀를 구출해낼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도착하였어도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어이없게 잃었다.

   다이애너 황태자비가 아직 어둠이 짙은 그 날 새벽 프랑스 한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였을 때 의사는 몸에 피멍이 든 그 피투성이의 여인이 다름아닌 다이애너 황태자비라는 사실에 너무도 놀란다. 즉지 주불 영국대사관에 그 사실을 알린 뒤 제일 먼저 취해진 조치는 아무도 그녀의 상처입은 모습을 사진찍지 못하게 한 것이다. 생전에는 가장 많은 사진이 찍혀졌던 여인이었다. 영국 왕실의 경호원들조차 속수 무책일만큼 그녀가 어디를 가든 그녀의 모습을 찍는 카메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후에는 철저하게 기자들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며, 그 어떤 기자도 그녀의 피멍이 들고 창백해진 모습을 찍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아니, 수사상의 이유로도 그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 여기는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대사가 두 여중생 과실사고 후 조의를 표했다는 뉴스가 나가자마자 카메라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던 범대위 아저씨 같은 이들이 얼씬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언론과 보도의 자유? 아니었다! 몸에 큰 상처를 입은 다이애너 황태자비의 모습을 사진 찍어서는 안된다는 도리가 언론과 보도의 자유에 우선하였다.

   다이애너 황태자비의 비운의 사고가 영국 왕실에 전해지자마자 주불 영국대사에게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사는 여왕이 조의를 표할 줄로 기대하고 위로의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왕의 명령은 다이애너 황태자비의 몸에 있는 모든 보석들을 환수하여 즉시 영국 왕궁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차거웠다. 주불 영국대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리고 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영국에서 달려온 찰스 황태자에게 여왕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찰스 황태자의 의지는 단호하였다. 다이애너 황태자비의 몸에서 아무 보석도 거두지 말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싸움에서 그는 언제나 어머니 편에 서있었다. 자기와 이혼한 여자, 그리고 장차 국왕이 될 왕자의 어머니로서 에집트 사람과 결혼하려 했던 여자, 결혼 이래로 늘 자신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던 여자. 그럼에도 찰스 황태자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다이애너 황태자비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 하나의 보석도 그녀의 몸에서 거두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자기 어머니인 영국 여왕의 명령보다도 더욱 강한 것이 찰스 황태자의 추모의 정이었다.

   평상시에는 언제나 엘리자베스 여왕에 충성하는 영국 국민들이었다. 그러나 다이애너 황태자비를 추모하는 물결이 전국을 덮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조의 표현도 없이 쌀쌀한 여왕에게 영국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매일 영국 신문들의 톱기사는 "우리의 여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였다. 이런 국민적 저항은 마침내 여왕의 자존심을 굴복시켜 여왕이 다이애너 황태자비에게 조의를 표하는 특별 생방송이 방영되었다.

   한편, 다이애너비기 후송된지 몇 분만에 숨을 거둔 프랑스 병원의 문제는 다이애너비의 모습을 어떻게 하면 가장 아름답게 회복시키며 보존하는 것이었다. 기자단의 출입을 완전 봉쇄한 채 그녀의 몸을 깨끗이 씻고 급히 영국에서 공수된 그녀의 예복을 입히고, 그녀의 보석으로 단장시키고, 실내도 일반 병실과 달리 그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과 조명으로 바꾼 후에야 기자들의 보도가 허용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범대위와 영국 국민들이 추모하는 방식의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김정일이 미국과 한국을 이간시키기 위해 미군 범죄만을 전문적으로 들추어내는 남파 공작원들을 대거 남파하고 있을진대 범대위는 처음부터 남파 공작원들과 구별된 행동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수사관도 아니요, 기자도 아닌 범대위 아저씨들이 불의의 윤화사고를 당한 두 여중생의 사진을 찍거나 얻어내겠다고 우르르 몰려 다녔다. 도대체, 그 의도가 무었이었단 말인가?

   사실 처음부터 범대위가 이 두 여중생 윤화사고에 간여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20분에 사고가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대사가 즉각적으로 두 여학생에게 조의를 표하러 왔으며, 한미합동조사단이 소집되었다. 그리고 범대위 아저씨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수일 전에 미2사단장은 유가족에게 8억원의 보상금 지급을 약속한 바 있다. 사고 발생 한 달 후에는 한미합동조사단의 수사 보고에 의거하여 미군 지휘부는 무전기 고장을 사전에 알아내지 못하고 마크 워커 병장에게 훈련 장비를 지급했던 4명의 직속 상관을 중징계 하였다.

   범대위 아저씨들이 이 사건에 참견하여 생긴 결과가 있다면 당초 미군측은 8억원의 보상금 지급을 약속하였으나 범대위 아저씨들이 이 일을 한없이 크게 확대시키는 바람에 보상금이 4억원으로 크게 준 것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별도의 위로금과 미군들의 추모 기금 외에 그 4억원의 보상금도 11월 초에 완전히 지급되었다.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도 발표되었다. 따라서, 미국인의 상식으로는 이것은 보상금 지급이 완료된 지난 해 11월 초에 종결된 사건이었다. 한국인의 법 상식으로도 이것은 마찬가지가 아니인가? 윤화사고 합의금을 지급받고서도 재판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범대위는 미군측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보상 책임을 완료한 그 시점부터 참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였다. 너무나도 처참한 두 여중생의 사진을 공공장소에 대대적으로 공개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우리 독립 투사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던 사진 공개가 역사 교육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그 사진을 공개하는 것은 또 다른 교육적인 문제를 낳는다. 6.25동란 때 빨간 완장을 낀 공산당원들이 우리 민족을 죽창으로 잔인하게 학살한 사진을 공개하는 것이 반공 교육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그런 사진들을 공개하는 것은 또 다른 교육적인 문제를 낳는다.

   더구나,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를 추모하면 우리는 그들의 처참하게 상처입은 모습을 사진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모처럼의 임시 공휴일에 신바람이 나서 친구 생일잔치 집에 가던 우리의 두 여중생 못지 않게 영국의 다이애너 황태자비도 한 운전수의 과실 사고 때문에 너무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영국 국민들은 물로 프랑스인들도 그녀의 심하게 상처 입은 모습은 사진찍지 않았다. 이것의 고인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자들의 예의였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두 여중생의 처참한 사진을 공공장소에 공개한 범대위의 저의에 의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민주사회에서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처참한 사진을 맘대로 찍어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사람들의 잔인성이기 때문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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