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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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0월 31일 
아래는 저희 까페 "http://cafe.daum.net/futurekorealab 에서 제가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설명한 글입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 역사를 이해하는 방법

   카르타고님, 우리나라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난 외적 요인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계에 우리 민족은 자주 민족임을 선언할 근거가 되었던 것이며, 또 삼일운동 정신에서 상해 임시정부는 출발하였습니다.

   만일 1943년 12월 2일의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하지 않았으면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였어도 우리나라는 해방될 가능성이 희박하였을 것입니다.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여도 일본 영토는 일본 영토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전세계인이 한반도를 일본 영토로 여기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한일합방 문서를 국제 사회에서 무효화시킨 것이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의에 따른 카이로 선언이었습니다.

   이 카이로 선언은 상해 임정의 끈질긴 외교로 얻어졌던 것이며, 미국은 외교적으로 우리나라의 해방의 근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좌익도 미국의 외교적 도움으로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우리나라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좌익은 가쓰라-태프트 조약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부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좌익이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언급할 때 이것은 미국 역사에 대한 좌익의 무지를 드러냅니다.

   만일 어느 외국의 학자가 한국은 구한말에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썼으니깐 지금도 쇄국정책을 쓰는 나라라고 주장한다면 님은 그 외국인 학자가 우리나라 역사를 아는 학자라고 말하시렵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오류를 좌익 아저씨들이 늘 범하고 있습니다. 각 시대에는 각 시대의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구한말 대원군 시대와 구한말 개화기의 패러다임이 다르듯 1905년의 미국의 패러다임과 1945년의 미국의 패러다임은 크게 다릅니다.

   좌익 아저씨들은 1905년의 미국이 오늘날과 같은 강대국이었다고 우기는지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05년의 미국은 후진국이요, 약소국이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미국에서는 독일 유학 갔다 오지 않으면 지성인 취급받지 못하던 때요,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귀족 행세를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학문적으로 유럽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럽에 유행하였던 사조는 사회진화론이었습니다. 사회 진화론은 문명 선진국이 후진국을 식민지로 삼아 선진 문명을 전수하는 것이 선진국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 진화론이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였습니다.

   본래 청교도 정신에 입각하여 건설되었던 미국에서 딱한번 유럽의 정치 사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때가 이때였습니다. 저도 필립핀 식민지화를 놓고 당시 미국의 정치 논객들이 찬반 논란을 벌이던 글들을 일일이 읽어 보았습니다. 20세기 초에는 미국에서 사회진화론 학파가 한때 득세하였습니다. 그러나 필립핀 식민지화를 정당화시키려던 사회진화론은 20세기 초에 미국 정계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패러다임인데, 그 패러다임이 1945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좌익이 주장한다며 그것은 좌익의 사관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참고로, 필립핀이 스페인의 영구 식민지로 남아있거나 중국의 영구 식민지가 되는 것보다는 한때나마 미국의 보호를 받았던 것이 필립핀에 오히려 국익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여하간 그 판단은 필립핀 사람들에게 맡길 문제입니다.)

   미국 역사를 조금만 살펴 보아도 미국 정치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이지 결코 사회진화론이 아닌데, 좌익은 언제까지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팔 것인가요? 미국이 1943년 12월 2일 대통령 명의로 카이로 선언을 하여 한일합방 문서를 무효화시켰을 때 1905년 육군대장 명의로 하였던 가쓰라-태프트 조약은 영구히 역사의 휴지통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정의 관계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시는데 저도 질문이 있습니다. 1945년 10월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시자마자 당시 공산당원들로 구성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이승만 박사를 주석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리고 건준위의 추대를 거부한 이승만 박사가 미군정과의 협조도 거부하였던 사실을 아십니까?


미군 장성들이 보낸 화환


사고 직후 달려온 주한미군 장성들이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고 있다.
이때 콧배기도 안보이던 좌익 정치인들과 좌파 집단들이.
뒤늦게 나타나 두 여중생의 이름을 정략적 목적으로 팔며 반미촛불시위를 선동하였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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