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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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2월 7일 

한국 민주화 운동의 두 주역 양김씨의 악연

   우리나라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징처럼 여겨지며, 실로 지난 근 반세기 동안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 온 두 주역이었다. 그 사실은 김영삼 대통령의 행정부가 '문민정부'로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정부가 '국민의 정부'로 불려진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그럼에도 양김씨는 동지이기는 커녕 서로 앙숙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실정이 노출될 때 군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은 오히려 침묵하여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따가운 질책을 퍼붓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오늘 (2003년 2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의 현대상선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 "이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도저히 묵과할수 없는 이적행위로 국민을 핵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김대중씨는 마땅히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사법처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가시가 돋혀있다. 아무리 현직 대통령이지만 그의 반민주적 행동은 사법처리돼야 한다. 그런데 사실 양김씨는 정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서로 앙숙이다.

   본래 양김씨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IMF 환난의 책임 문제와 관련하여 두 분의 사이는 더욱 나빠진다. 사실, 김영삼 행정부의 외환관리 정책의 허술함은 1997년 IMF 사태 발생의 환경적 요인을 제공하였다.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펴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종금사의 수가 6개에서 30개로 늘어났다. 30개의 ‘종금사’는 모두가 해외에서 외채를 빌려서 원화로 환전, 어음을 교환해 줄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종금사의 수를 늘린 금융정책의 장점은 기업의 자금 갈증을 해소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멀리 앞을 내다 보았다면 종금사가 가져다 줄 득보다 손실이 더 컸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재벌이 원하던 은행을 소유하게 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 청와대 경제수석 오원철씨는 그 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자금조달의 길이 열리고 나니, 재벌들은 과잉 경쟁과 과잉 투자에 질주를 했다. 재무구조 악화, 적자운영의 개선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http://www.ceoi.org/export(11).htm )

   그러나, 야당 총재 시절 김대중 씨는 IMF 사태 발생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 사실을 kaseum이란 아이디의 한 네티즌은 한 인터넷신문 게시판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 이면에는 반드시 그 현상을 있게 하는 원인이 있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대북 송금 문제만 아니라 5년 전에 일어났던 imf라고 불리우는 환란 뒤에도 존경하는(?) 김대중 선생님이 계셨다.

   우리는 너무 피상적인 것만 본다. 그때 금융관계법과 노동법을 국제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개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선생은 필사적으로 법안 통과를 막았고 기아 자동차를 해결하고자 했을 때도 국민 기업이라며 막았다.

   그것은 결국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불신감을 안겨 주었고 그들은 떠났다.

   이 이야기는 김영삼 대통령과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 이석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문민정부의 마지막 개혁을 수행한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경재 정책을 추진하던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그해 4월부터 "경쟁력 제고"를 명분으로 노동법 연내 개정을 위한 여론조성에 나섰다. 당시 김대중 씨가 이끄는 야당과 노동계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해 12월에 강하게 악화된 경제여건 개선을 위해 노사관계 혁신이 필요하다는 이석채 경제수석 등 경제팀의 의견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김대중 씨가 이끄는 야당의 반발 때문에 '복수노조 허용' 조항을 '3년 유예'하는 수정 조항을 넣어 12월 26일 아침 6시에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돌이켜 보건대, 정리해고의 길을 열기 위해 국회에 제출하였던 노동법개정안은 그대로 통과될 수 있었다면 한국 경제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가 새 노동법 반대 운동을 거리로 끌고 나오자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법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정한 것이다. 경제가 어려운 만큼 대국적으로 참고 견뎌야 한다"며 국민의 이해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씨의 야당과 노동계는 "정권타도"와 "YS하야"로 응답했다. 심지어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는 국회의장을 감금하는 물리력을 동원하면서까지 결사적으로 법안 통과를 저지했다. 그리고 12월 26일 아침 6시에 가까스로 통과되었던 노동법개정안은 날치기라는 국민회의와 노동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안타깝게도 철회되고 말았다.

   국민회의는 그 후 일년이 지나 집권당이 되자 입장을 바꿔 정리해고의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무능을 드러낸 것이다. 경제위기를 초래하고서야 비로소 정리해고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것은 그야말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다. 막상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 보니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면 노동법 개정이 불가피하였다. 한국처럼 노조가 터무니없이 강한 나라에 그 어느 외국인이 와서 공장을 짓겠는가! 임금 인상 때문에 가격 경쟁력에 밀려 수출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김대중 행정부는 외국 투자를 유치해야 했으나 국내의 노조가 너무 강한 노동시장이 걸림돌이었으니 실로 김 대통령에게는 자업 자득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씨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1997년 12월23일경 『한국 경제가 위기에 봉착한 직접적인 요인은 금융개혁을 늦춘 것과 기아사태를 장기화한 데 있다』는 말을 했다. 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기아사태를 장기화시킨 당사자 또한 야당 총재 시절의 김대중 씨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려대 학생들의 정문 출입 저지 등 우여곡절 끝에 2000년 10월 20일 강의를 했다. 그때 외환위기에 대한 문민정부의 시각을 말하면서 김광일 전 비서실장은 문민정부가 추진했던 노동법ㆍ금융개혁법 개정이 무산된 데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두 법이 통과됐다면 외환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기아자동차를 여야 정치권이 무리하게 두둔한 것도 외환위기의 큰 원인 중 하나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김대중씨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내가 노동법을 개정하려고 했는데 김대중씨가 필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김대중씨는 또 기아 노조에 세 번을 가 연설을 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기아는 국민의 기업이기 때문에 반드시 살린다'고요. 무책임한 거짓말쟁이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그 어른이 고대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10시간 동안 저지를 당하면서도 포기치 않고 이 강의를 하셨던 데에는 정말로 이 말을 꼭 하고 싶으셨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사가가 IMF 환난의 책임자를 규명할 때 자기 정책만 탓하지 말고 김대중 대통령의 야당 총재 시절의 과오를 보아달라고 호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김대중 씨의 간섭으로 기아 사태가 방향을 못잡고 장기화하면서 한국 기업의 신용은 떨어지고 국제 증권가에 동아시아 외환위기설이 떠돌면서 외국 투자가들이 일시에 자금을 빼나갔다. 환율이 8백 대 1에서 1천6백 대 1로 상승하면서 종금사들은 막대한 환차손을 입고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에 늪에서 허덕이게 되었다.

   그럴진대 지난 근 반세기 동안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 온 두 주역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합작으로 한국에 IMF 사태가 닥쳤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종금사 수를 30개로 늘려 놓은채 너무 서둘러 OECD에 가입하였던 것은 분명 김영삼 행정부의 실책이었다. 그러나 그 정책이 실책이었던 것은 노동법과 금융관계법이 그때 개정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은 김영삼 행정부의 노동법, 금융관계법 정비에 발목을 잡은 당시의 야당 총재 김대중 씨에게 있었던 것이니 경제 정책 실패의 책임을 놓고 이래저래 양김씨는 서로 앙숙이 아닐 수 없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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