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오디오 설교 김대령 에세이 황효식 칼럼 학술ㆍ생활 정보 추천 사이트
    2003년 6월 7일 

현충일에 잊지 못할 무명의 용사들

   역사는 유명 인물과 무명 인물이 함께 만들어 간다. 전쟁의 승리에도 명장의 공로와 무명의 용사들의 숨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맥아더 장군 없는 한국 전쟁을 생각할 수 없다. 트루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끌어낸 이도 맥아더 장군이요, 근 석달 간의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자와 실종자를 포함 십만 명의 병력을 잃은 미국이 한국전에서 손을 떼려 하였을 때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한국 영토를 되찾아준 이도 맥아더 장군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자유와 생명을 보존해 준 이들 중에는 무명의 한국인 용사들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한 인민군 주력부대는 개성, 문산, 의정부, 서울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공격해 왔다. 북한 수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인 김일성(당시 38세)은 이 의정부 방면에 4만 병력과 50대의 탱크를 투입했다. 십만 명의 침략군 중 나머지 절반은 옹진반도, 춘천, 강릉 방향 등 다른 3개 방면으로 분산 투입되었다. 침략군은 38선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옛 도시 개성을 쉽게 점령하고 문산으로 향했다.

   당시 한국군은 삼분의 일 이사의 병력이 농번기 휴가 중이었으며, 소련제 T-34형 탱크를 막을 장비가 없었다. 전날 육본에서 파티가 있었기에 심지어 지휘관이 부재 중인 부대들도 있었으며, 취침 중에 공격을 당한 부대의 병력들은 혼비 백산 후퇴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도 용맹한 부대가 있었다. 1978년에 전두환 장군이 사단장이었던 1사단은 구보 훈련 때 사단장이 맨앞에서 뛰는 부대였는데 바로 이 부대가 6.25 때 용맹을 떨쳤던 부대였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제1사단 사단장은 백선엽 대령이었으며, 이 부대의 장병들이 문산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지난해 두 여중생 과실 사고가 난 지역에서 왜 미군들은 남들이 다 보는 한일월드컵 구경은 커녕 하루 다섯 시간 미만의 수면을 취하며 그 더운 여름에 강훈련을 받았던가? 바로 그 도로가 6.25때 인민군 탱크들이 노도처럼 밀고 들어왔던 도로요, 문산 방어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미 2사단이 문산 방면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유사시 인계선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미국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지켜주겠다는 의지의 강력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한국전 초기에는 우리 국군이 문산을 방어하여야 했다. 그리고 문산이 뚫린다는 것은 서울 침공로가 적에게 열린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문산 방어 전투는 중요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선엽 대령의 국군 제1사단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그들의 소구경 바주카포는 소련제 T-34형 탱크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소총 외에 유일한 중무장은 바주카였으나 바주카 포탄은 명중해도 거대한 탱크에서 탁구공처럼 튕겨나갔다. 비록 이런 열세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전투에서 무명의 용사들의 장렬한 전투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신속하게 “자살특공대”에 자원하는 용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수류탄을 들고 적의 탱크에 육탄 돌격했다. 어떤 용사는 탱크 밑으로 몸을 던지는가 하면 또 어떤 용사는 탱크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수류탄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탱크 몇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으나 인민군은 서울 북방 35킬로 지점인 의정부를 향해 전진을 계속했다. 비록 적의 남침을 완전히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였을지라도 이 무명의 영웅들이 자기 몸을 던져 적의 탱크 몇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적의 공격을 단 몇시간, 아니 몇분이라도 저지시킨 것은 생명을 바쳐 나라를 구한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인민군 남침 소식을 접해 들은 맥아더 장군이 6월 28일 전세를 파악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일본에서 날아와 한강둑 남쪽편에 이르렀을 때 인민군 전투기가 쏜 폭탄이 그의 헬기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었다. 이것은 남침 사흘 만에 서울을 정복한 인민군이 단 몇분만 더 빨리 쳐들어왔어도 맥아더 장군의 생명이 위험할 뻔했음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의 무명의 영웅들이 적의 탱크에 부딪쳐 산화하기는 했으나 그들이 단 몇분이라도 인민군 탱크들의 진격을 저지한 것이 잠시나마 맥아더 장군에게 순시할 기회를 주었으며, U.N. 군이 우리나라를 도우러 올 시간을 벌게 하여 주었다.

   역사가들은 만일 6월 28일에 서울을 정복한 인민군의 그 기세로 바로 수원, 오산, 대전을 공격했다면 미국이 한국을 도울 기회를 영영 놓칠뻔 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인민군이 서울에서 사흘이나 머뭇거리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이지만 아마 두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남한의 해방구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군 1사단의 무명의 용사들에 의해 파손된 탱크들 때문에 전열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의 원군이 올 시간을, 그리고 U.N.에서 한국전 참전을 결의할 시간을 벌게 하여 주었다. 이처럼 국군 1사단의 무명의 용사들은 지대한 공을 세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5월18일 망월동으로 달려가 머리를 숙였다. 여기에 가기 위해 미국방문 일정을 축소했다는 말도 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현충일인 오늘 현충원을 뒤로하고 일본 왕을 배알하러 간단다. 노무현씨에게는 현충일은 중요하지 않고 5월18일은 그토록 중요하다는 말인가.

   5.18 묘지에는 누가 많이 묻혀있는가? 물론 윤상원 열사도 있다. 그는 열사인가? 만일 거짓 유언비어들을 조작하여 폭동을 선동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이라면 그는 열사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있는가?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국군에게 사격하였던 이들은 구두닦이, 막노동자, 무직자, 양아치, 좀도둑들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들의 혁명을 일으키려던 군중 심리가 민주화 운동이라면 그들은 열사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의 민중 봉기는 심리는 민주화 운동과는 구별되어야 할 듯하다.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약탈하다 총에 맞은 이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과학적 사실은 총상으로 희생된 자들의 72.2%는 시민군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M-1과 칼빈 소총에 희생된 자들이다. 남의 차를 몰래 운전하다 사고를 당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탱크를 공격하는 용감한 이들도 있었다. 비교적 정확히 현장을 목격했다는 위성삼씨 (당시26·조대4)는 이때의 목격담을 이렇게 털어 놓는다.

   [군중들이 MBC차고에서 취재차량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때 계엄군이 밀고 들어왔고 시위대는 계림동으로 다시 후퇴했다. 그곳에는 장갑차 1대가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감시경이 시민들에 의해 파손돼 있었다. 누군가 볏짚을 가져와 바퀴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고 내가 다시 볏짚을 뚜껑위에 올려놓았다.] 즉, 그는 폭도들의 MBC 취재차량을 방화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온 계엄군 장갑차 승무원들을 모두 태워죽이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전쟁 아닌 전쟁 상황이었으며, 군경과 민간인 양편에 불가피한 희생자가 생기게 하였다. 그러나 인민군과 국군을, 적군과 아군을 혼동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인가?

   정말로 민주화 운동을 한 용사들은 6.25 때 문산 전투에서 인민군의 서울 공격로를 단 몇시간, 아니 몇분만이라도 저지시키기 위해 수류탄을 들고 인민군 탱크 속으로 뛰어들었던 자들이다. 누가 맥아더 장군이 6월 28일 한국전 상황을 순시할 시간을 벌게 하여 주었는가? 바로 이 무명의 용사들이었다. 누가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전에 참전할 결정적인 결심을 하게 하였으며, 무엇이 미군에게 한국인을 위해 싸울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는가? 비록 무기는 없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몸으로 적의 탱크의 진격을 막은 이 무명의 용사들의 무용담이었다. 비록 노무현씨 대통령은 오늘 현충일에 일본왕을 배알하러 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6.25 때의 무명의 용사들이 있었기에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은 분쇄되었고,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수호될 수 있었음을 잊지 않는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황효식 목사 칼럼 김대령 목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