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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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5월 31일 

월남의 민중봉기사의 관점에서 본 5.17 비상국무회의

    5.18 광주 사태는 단지 화약고에 누군가가 불을 붙였을 뿐이며, 그 이전의 5월 위기설은 언제든 이런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5월 위기설이란 당시 김대중이 5월 20일 일으키려다 22일로 연기하였던 민중 봉기에 대한 두 시각의 충돌을 말한다.

   5.18 광주 사태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1950년 5월 18일 운동권의 긴급 연락을 받고 모인 500 명의 전남대 학생들이 정문을 경비하던 7명의 군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한 시간은 오전 10시 20분이었다. 그때 군인들은 뼈가 부스러지도록 돌에 맞으면서 피하지 않고 있었다. 폭동 주동자 윤상원의 과격 시위 선동이 실패하고 학생들이 광주역 앞으로 모인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시위를 선동할 뿐 전남대 시위 지도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학생들은 자진 해산하여 귀가하려 했던 시간이 오전 11시 30분이었다.

   당시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을 비롯한 시위 지도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것은 아침 일찍 이들이 윤상원과 폭동 거사 모의를 한 즉시 무등산장으로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자진 해산하려 하는 순간 누군가가 "군경이 박관현 학생회장을 잡아다 죽였다"고 소리질렀다. 아마 이 거짓말은 당시 5월 위기설을 증폭시켜 운동권의 과격 시위를 선동하였던 남파 간첩들의 소행이었거나 어떻게든 과격 시위와 과잉 진압을 유발시키려던 윤상원의 자작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출처 불명의 미확인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 학생들이 파출서로 몰려가 투석전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이 파출서에 돌을 던지니 시민인지 간첩인지 깡패들인지 정체가 불명한 이들이 같이 돌을 던지기 시작하여 그 수가 삼천 명이 넘게 불어났다. 처음에는 광주 경찰들이 과격 시위 학생들을 경찰봉으로 때리고 연행하면서 최선을 다해 진압하였다. 그러나 광주 경찰 병력이 총동원됨에 따라 윤상원 등 폭동 주동자들은 시위대에 화염병을 대량 전달하였으며, 화염병이 경찰과 파출서에 격렬하게 날아들자 경찰과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가 군의 진압을 요청한 시간이 오후 3시였다. 그리고 수천명의 과격 시위대에 비하면 그 수가 열댓명밖에 되지 않는 군인들이 처음 진압에 동원된 시간이 오후 4시 40분이었다.

   당시 군인들이 과잉 진압을 하였다는 주장은 사실 어불 성설이다. 윤상원이 군인들의 과잉 진압을 유발시키려는 필사의 유인 작전을 폈다는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것은 처음부터 윤상원의 자작극이었다. 그럼에도 광주 사태를 바라보는 두 시각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당시 폭력 시위는 민주 항쟁이었으므로 시위대가 파출서들을 다 때려 부스든 말든 국군은 경찰의 진압 작전에 협조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폭력 시위대가 아무리 군경에게 칼빈 소총과 기관총 사격을 하여도 군인은 자위 방어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5월 21일 오후 8시에 도청 경비를 하던 사병들의 생명을 폭도들로부터 구하기 위해 한 지휘관이 경비용 실탄을 지급한 것은 학살극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 시각에서는 시위대가 파출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아세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탈취하여 5월 21일 오후 8시경 도청을 경비하던 두 군인을 압사시킨 것은 민주화 운동으로 미화되며, 무기 탈취범들은 5.18 민주항쟁 유공자 포상의 대상이 된다. 오히려, 당시 더 이상의 사병의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력을 철수시키는 길을 열고자 경비용 실탄을 도청 경비 병력에게 지급한 행위는 힉살에 의한 군사 쿠데타의 증거로서 규탄된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런 시각으로 광주 사태를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같은 한국인끼리 어째서 이 동일한 사건을 서로 정반대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던가? 그 시각의 차이는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의 민중봉기 거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만큼이나 달랐다. 사실상의 쿠데타였던 김대중의 민중봉기를 민주화 운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이것을 저지하는 행위는 쿠데타로 여겨졌다. 이미 당시 내무부 장관은 경찰의 힘으로는 시위대의 화염병 투척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을 최규하 대통령께 보고드린 때였다. 그리고 정부가 군의 애국적 결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민중봉기를 민주화 운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이 민중봉기를 저지하려는 5.17계엄 전국확대는 군사 쿠데타로 규정되었다.

   이처럼 당시 5월의 위기설이 마냥 증폭되었던 때에 쿠데타에 대한 시각과 해법이 서로 엇갈렸다. 정부 편에서는 민중 봉기를 악용하려는 김대중의 쿠데타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민중 봉기 거사를 민주화 운동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만일 김대중의 예정된 민중 봉기 거사 저지에 군이 개입한다면 그것은 군사 쿠데타로 규정되었다. 한편에서는 구국의 결단이 필요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결사적인 민주화 운동을 하려 하였다. 그러면 어느 편이 옳았는가? 이것은 김대중이 일으키려던 민중 봉기가 과연 진정한 민주화운동이었나 아니었나의 해석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다.

   당시 윤상원은 공산주의 서적에 탐닉하고 있었다 한다. 공산주의 사상에서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킨다. 따라서 그에게는 주요 관공서 방화, 파출서 파괴, 시위대의 총기 무장. 심지어 군경에게 기관총을 발사하는 행동까지도 정당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윤상원에게 공산주의 사상이 우선하였다면 우리에게는 법치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그래서, 아무리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우리의 아픔이 크더라도 우리는 윤상원의 논리에만 끌려갈 수 없다. 우리에게 좀 더 객관적으로 광주사태를 관찰하기 위한 논거가 필요하다.

   월남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기에 월남의 민중봉기사의 관점에서 우리는 5.17 비상국무회의의 배경을 관찰할 수 있다. 즉, 월남 참전세대는 역사적 체험이 주는 지혜 때문에 좀 더 객관적으로 김대중의 내란 음모를 관찰할 수 있었다. 정부가 5월 17일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기에 앞서 주영복(周永福) 국방장관이 소집한 전군주요지휘에서 그는 이런 발언을 하였다:

   『어제 밤11시에서 12시 사이에 청와대 대책회의 겸 정세보고 자리에서 각하가 「나이 60이고 살만큼 살았다. 이 시점에서 국가전복은 보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정권이전의 문제입니다. 국가보위의 신성한 임무를 띤 군은 단안을 내려야 할 단계입니다. 여러분의 결의사항을 국무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며 정식결재를 받고 계엄군을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지역비상계엄을 전국비상계엄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학생은 계엄해제를 요구하나 해제하면 국기가 흔들립니다』

   요컨대, 민중봉기로 국가가 전복되는 상황이 닥치는 것을 최규하 대통령은 원하지 않으시니 군이 단안이 필요하다는 것이 주영복 장관의 발언의 요지였다. 그러면, 6.15를 겪은 세대요, 월남 참전 세대는 오늘의 신세대가 보지 못하는 어떤 관점에서 민중 봉기를 파악하고 있었을까? 당시 한국 상황과 아주 유사한 상황이 월남에서 두번이나 전개된 적이 있었다.

   역시 분단 국가로 북쪽의 공산주의 국가 월맹 즉, 비엣민의 호지명이 북한의 김일성처럼 남침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나 주월미군이 월남을 지켜주고 있었다. 비엣민의 국방상 보 응우엔 지압 장군은 주월미군을 무력화시키는 적화통일 방법으로 1968년도 구정에 민중봉기를 유발싴고자 했다. 구정 전날인 1월 29일 밤의 베트남의 교통상황은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큰 혼잡을 이루었다. 이러한 틈을 노려 비엣콩들은 쉽게 도시로 잠입 할 수 있었다. 베트남군 복장으로 위장한 비엣콩들은 미군 트럭을 세우고 태워달라고까지하며, 목표지역으로 침투하였다. 무기와 탄약은 장례식을 가장한 관 속에 넣거나 야채 수송 차량에 숨겼으며, 나룻배 밑의 상자 속에 숨겨 운반 하였다.

   구정 다음날 새벽부터 비엣콩들은 사이공과 주요도시에서 본격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미국 대사관을 필두로 하여 베트남 관공서와 정부 주요 시설물들을 공격했다. 여섯 개의 직할도시 중 5개와 대부분의 지방수도를 공격했다. 민중 봉기로 위장된 이 내란의 평정 작전을 베트남 정부군에게 내맡겼던 주월 미군 사령관 웨스트몰랜드는 수도 사이공이 적에게 함락되기 전에 작전에 참여하여 시가전을 진압하였다. 비록 월맹이 월남에서 일으킨 민중봉기는 미군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월맹(비엣콩)은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미국인들에 대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부터 주월미군은 미국 본토로부터는 반전 여론, 주월미군 철수 여론에, 그리고 월남에서는 반미 시위에 시달렸다. 미군은 월남의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여 주었음에도 민중 봉기 진압에 미군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월남 사회에서 반미 감정을 증폭시켰다. 결국 1973년 미군은 완전히 철군하였으며, 월맹의 침입이 있을 때 공군과 해군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1975년에 훗날 1980년 한국의 광주에서 있었던 광주사태와 유사한 민중 봉기가 또 일어났다. 그리고 이 민중봉기를 틈타 월맹군이 일제히 침입하였으나 미군은 다시 오지 않았으며 4월 15일 월남의 수도 사이공은 공산군에 함락되었다.

   1980년 5월의 위기설은 월남전 참전 세대에게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5월 17일은 김대중이 5월 22일 전국 각 도시에서 일제히 민중 봉기를 일으킴과 때를 같이하여 남침할 공격 명령을 인민군이 휴전 일대에서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이런 국난의 위기에서 신속히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정부는 5.17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였던 것이다. 윤상원의 논리에서는 이것이 군부의 쿠데타로 여겨졌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논리이다. 그리고 당시 안보가 급선무였다는 시각에서는 당연히 정부는 행동하고 단안을 내려야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간첩들이 운동권에 5월 위기설을 증폭시키는 온갖 유언비어들을 유포하여 폭력 시위를 선동하던 시점에 더욱 사실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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