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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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2월 17일 

테러 지지를 평화라, 518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 칭함이 타당한가?

   여느 때처럼 뉴욕에서 2001년 9월 11일의 아침은 밝고,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상징되는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인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세게무역센터의 마천루들은 그 미래를 확신하는 강대국의 건축상의 미래상으로서 푸른 하늘 아래 서있었다. 이 고요한 평화가 하늘로부터 침입한 테러범들에 의해 훼방 받을 줄을 그 누가 꿈에나 상상하였겠는가! 그러나 납치된 비행기들이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탑들에 충돌하였을 때에 이 거대한 건축물들은 위층으로부터 연기가 소용돌이치다가 무너져 내려 잿더미가 되었다. 이 갑작스러운 공격 때문에 그 날의 고요는 깨지고 한 뉴욕 사람이 아마겟돈으로 묘사한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으며 그 날은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비행기와 충돌하여 거대한 화염에 싸인 쌍둥이탑이 무너저내려가고 있을 때 뉴욕의 경찰관들과 소방대원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 까만 연기가 가득한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언제 건물이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이 상황 하에서 그들은 아직 피하지 못한 이들을 찾아 십 층, 삼십 층, 백 층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영웅적인 희생 정신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할 수 있었으나, 거대한 쌍둥이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 74명의 경찰관과 200 명이 넘는 소방대원들이 처참하게 건물 잔해에 깔려 죽었다. 지난 해 6월 전방의 민간인 보행이 금지된 한 미군장갑차전용도로에서 두 여중생 윤화사고가 났을 때 우리는 그 처참함을 기억한다. 만일 미군의 사전 예고된 훈련 장소에 민간인 접근 통제를 해야 하는 한국 공무원의 근무 태만으로 빚어진 이 사고에 대하여도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대하여 그토록 분노하였다면, 마찬가지로 미국인들도 여러 대의 민간 항공기 승객들을 인질로 잡아 미국의 주요 공공건물들을 폭파시켜 순식간에 수천명을 건물더미에 깔려 죽게 한 이 가공할 테러범들과 테러 지원국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911테러의 비극이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아직 주한미군을 붙들어 둘 기회가 있을 때 붙들지 못하고 핵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당할 비극은 9.11 테러의 비극보다 훨씬 심각할 것이다. 9.11 테러 직후 뉴욕시의 문제는 미국 전역에서 너무나 많은 식수와 식량을 구조대와 자원 봉사자들에게 보내주어 쌓아둘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쟁이 일어나면 식량은 커녕 식수 공급도 안된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되어야 하며, 핵무기 개발 자금을 지원하는 햇볕정책은 수정되어야 하며, 대통령과 온 국민이 하나로 합하여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아야 한다. 주한미군의 전방에 생명의 담보로 있는 한 전쟁은 억지된다. 그리고 그들을 우리 편으로 붙둘어 두어, 계속 생명의 담보로서 전방에 근무하도록 요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죽고 사는 문제이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기회를 놓치는 민족은 불행하다.

   평화는 전쟁의 불씨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며, 아직 불길을 끌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불길을 잡아야 한다. 그럴진대, 이 잔인한 9.11테러 배후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전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테러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을을 알았을 때 어찌 미국이 방관할 수 있겠는가? 국제 사회의 깡패를 두둔하는 것은 9.11테러 때 거룩한 희생을 한 소방대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사담 후세인의 테러 전쟁 음모로부터 지켜야 한다.

   사실, 미국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사담 후세인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그리고, 세계 평화 편에 서는 우리 역시 사담 후세인의 퇴진을 강력하게 촉구하여야 한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인류를 살상하려고 테러 전쟁 준비를 하는 사담 후세인을 비호하는 것이 평화 운동이라고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국제 사회가 하나되어 이라크에 평화를 요구할 때 사담 후세인은 퇴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천년 역사 내내 평화를 사랑하던 우리 민족은 지금 김정일 폭정 하의 북한에서는 테러국에 핵무기 수출하기 위해 북한 동포가 존재하고 있고, 남한에서는 일부 몰지각한 친북 좌익 집단이 사담 후세인 지지 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제때에 북한 핵무장을 저지하지 못하면 언제 삼천리 금수강산에 잿더미가 될지도 모르는데 북한핵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으며, 9.11 테러를 지원한 사담 후세인이 바빌로니아 제국의 재현을 누리며 전세계 정복을 위하여 생화학 무기를 제조하는데도 그를 두둔하는 것을 평화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사상 한민족 생존의 최대의 위기의 때에, 그리고 세계 평화도 테러로 전세계를 정복하려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악랄한 야욕에 위협받고 있으며, 법치 민주주의 국가의 실현을 위한 국민의 염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비밀대북송금으로 배신당한 이 시점에 우리는 518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를 이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어째서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화 운동은 국가를 공산화로 몰아가고 있었느냐의 물음은 그가 정략적으로 이용한 518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왜곡시킨 것과도 관련이 있다.

   먼저 518 광주사태를 우리는 그 돌발 배경으로 올바르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1980년 5월 중순은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의 다른 대학교들에서는 가라앉은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전남대학교에서는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금남로에서 매일 시위를 계속하였었다. 당시 시위 이슈는 그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재 잔당이라고 부르는 최규하 대통령 정권의 퇴진이었다. 물론 이 시점은 대학생들이 당시 최규하 대통령께서 정보부장 서리로 갓 임명한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때이다. 이렇듯 518 시위 이슈는 처음부터 신군부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민주 광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518 광주 사태를 신군부와 관련시키는 것은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거나 역사 조작이다. 만일 518광주 사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역사 조작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으며 5월 19일 시위의 주체는 분명히 대학생들이었는데 불과 이틀만에 그 시위의 주체가 학생들에게서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이끄는 노동자들에게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 이상의 대학가의 시위가 아니라 시민군의 시위로 성격이 바뀐다.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부수고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한 것도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주동하였다. 21일 그는 이 유혈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광주 외곽 지역까지 시민군을 보내 습격하여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해 오게 한다.

   그가 무장 시위군을 조직하여 군인들에게 총을 쏘라고 하였다. 그때 온건파로 불리는 다수의 광주 시민들은 이 시가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격파로 불리며 노동자들이 주도하던 시위 지도부는 온건파 학생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시위대에 편입시켰다. 당시 현장에 있던 광주 시민들에 의하면 이들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청년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강제로 시민군을 삼았다고 한다.

   흔히 광주 시민들이 그때 무장한 것은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과잉 시위였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과연 자발적인 과잉 시위였을까?

   총을 든 폭도들이 전라도 도지사 위에 군림하였으며, 무장 시민군을 조직하자마자 방송국들부터 불질렀으며, 경찰에게서 치안권을 빼았고, 경찰에게 임무를 할당하였으며, 광주는 대한민국에서 독립하였다며 광주 해방구를 선포한 것이 과연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을까? 오히려 조직적인 배후 세력이 분명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는가? 더구나 청년들과 시민들을 강제로 총으로 위협하여 시민군에 편입시키는 당시의 광주는 공포 사회였다.

   만일 계엄군이 5월 27일 광주 시민들을 이 폭도들로부터 구해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폭도들이 광주의 행정과 경제와 치안권을 장악한 상태가 한달 더 지속되었어도 광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을까? 만일 당시 시위 지도부가 북한과 내통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무모한 일을 담대하게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1980년 5월 27일 광주 시민들을 폭도들로부터 구해낸 계엄군이 김대중 대통령 정권 하에서는 범죄자로 지탄을 받아야 하는가? 이제는 총든 과격파 시위대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군에게 총을 쏘아야 했던 것이 과연 자발적인 행동이었는지를 광주 시민들이 말해야 할 때이다.

   5월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진주할 때 총으로 위협하며 결사 항쟁을 강요하던 자들의 신원은 정직하게 확인하였는가? 그리고 항복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화력을 총동원하여 계엄군에게 발포하였기에 총격적은 불가피하였으며, 따라서 군민 피차간에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희생자가 있었다. 광주를 구하기 위하여, 더 나아가 이들이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던 유혈 시위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하여 시가전은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폭도들이 유공자로 포상받고 시위대가 빗발처럼 쏘아대는 총격을 무릅쓰고 폭도들로부터 광주를 구해낸 계엄군은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아야 하지 않는가?

   폭도는 폭도이다. 누구든 경찰서를 파괴하고 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빙송국들을 붙태우고 군인의 장갑차를 약탈하고 무장 폭력배들을 조직하여 경찰에게서 치안권을 강탈하고 도지사에게서 행정권을 수탈하고 선량한 온건파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시가전을 선동한 자들은 폭도이다. 그리고 광주의 상처는 이 폭도들을 유공자로 대우하고 이 폭도들로부터 광주를 구한 계엄군을 죄인 취급함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광주의 진정한 명예는 그 출신지와 정체가 수상한 폭도들의 갖은 횡포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시민군에 합세하지 않음으로서 그 유혈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자들의 궤교를 분쇄시킨 광주의 선량한 시민들에 의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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