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목사의 시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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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6월 4일 

주객이 전도된 진보와 수구의 개념: 경제관의 관점

    노무현씨가 모처럼 바른 말을 하였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6월 1일 서울 효자동에 있는 자신의 단골 삼계탕집으로 국내의 대표적 재계 인사들을 초청한 오찬에서 “노사관계가 국제경쟁력을 해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언급을 하였다. 비록 만시 지탄의 느낌은 있으나 또 말 바꾸지 말고 그대로 밀고 나가준다면 한국 경제 앞날에 한가닥의 희망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웬지 갈팡질팡하는 노무현씨는 그의 지지 세력과 견제 세력 양편에서 신랄한 공세를 받고 있다. 조선닷컴이 전여옥씨가 지난 주에 노무현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인물이라는 칼럼을 썼으니 이번에는 그의 지지자인 도올 김용옥이 노무현 대통령을 변호하는 글을 써줄 차례였다. 그러나 그는 노무현 대통령 취임 100주째 되는 6월 3일자 문화일보 <도올 김용옥기자의 시국진단>란에 “盧대통령, 당신은 통치를 포기하려는가”의 제목으로 “당신은 이 나라 국가의 원수다!”, “순진을 가장한 미소 속에 당신의 양심이 썩어가고 있는 것”,“당장 대통령을 때려치우시오”라는 격한 표현을 서슴지 않으며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 갈팔 질팡하는 모습 때문에 리더십이 없어보인다는 지적을 받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날 한국인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교육 행정을 위한 컴퓨터 시스템을 네이스(NEIS)로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새만금 간척사업 을 계속할 것인가 중지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국론이 팽팽하게 양분되어 있다.

   미국에서도 동일한 정책을 놓고 늘 엇갈린 견해가 있다. 만일 서로 상반된 정책을 가지고 있는 공화당과 민주당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한 정책이 바뀐다면 우리나라는 갈피를 잡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성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엇갈린 견해가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플러스 요소이지 결코 우리나라처럼 국론이 양갈래로 찢어지는 혼란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와 정치가 노무현 대통령 취임 백일 만에 대위기를 맞고 있는 것일까? 노무현씨를 지지하던 이들도 견제하던 이들도 모든 책임을 노무현씨에게 뒤집어씌우기는 쉽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좌파 세력이 진보라는 용어를 도적질해감에서 출발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를 진보와 수구, 보수와 혁신, 개혁과 반개혁 세력으로 양분하는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용어들의 논리적인 모순은 진부하고 퇴보적인 좌익 집단이 스스로를 진보, 혁신, 개혁 세력으로 자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이 글에서는 진부하고 퇴보적인 좌파가 도적질해 간 이 용어의 모순을 그들의 경제관의 관점에서 살펴 보기로 하자. 본래 좌익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경제관에서 출발한다. 무엇이 그들의 경제 이론의 출발인가? 사회를 부르조아, 즉 유산자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자 계급으로 양분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의 정치 이론의 출발인가? 계급 투쟁이라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좌익 중에는 주사파처럼 김정일에 맹종하는 골수 공산주의자들고 있고 사회주의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분배의 평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공산주의 경제 이론은 온 국민이 다같이 못살게 하는 이론, 즉 전국민의 절대적 빈곤화를 초래하는 이론임이 이미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의 실험에서 입증되었기에 지금은 러시아와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도 저버린 퇴보적인 이론이다. 그럼에도 이 퇴보적인 마르크스 사상이 오늘날 진보, 혁신, 개혁의 이름을 간판을 달고 한국의 신세대에 파급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그 어느 나라도 완전히 해결치 못한 인류의 빈곤은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나뉘어진다. 지난 5월 31일 서울대 시간 강사가 자살한 것은 아마도 절대적 빈곤감보다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대 출신 박사이며 부부가 모두 고학력으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점에서 그는 성공의 정상에 올라와 있다. 정녕 그 가정이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는가?

   앞세대에는 정말로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사람들이 있었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단신 월남한 정주영씨는 쌀집 점원으로 일하다가 그의 성실함이 주인 마님의 눈에 들면서 생활 터전도 마련되고 미8군에서 건설 용역을 따내면서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었다. 역시 가난한 정비공이었던 조중훈씨도 그의 성실함에 감동된 미군 장교 부인이 그에게 미8군 한진버스 사업권을 주면서 대한항공이라는 세계적 항공사업가로 발돋음하였다. 이들은 가난했던 나라의 절대적 빈공 상황에서 정신력과 성실함의 내면적 자원을 가지고 성공한 예이다. 그러나 국민 생활 수준이 100배로 높아진 요즈음 그 시간강사처럼 오히려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자살하는 이들이 있다.

   좌익 집단 혹은 좌파 세력은 그런 상대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선다. 한국이 노사 문제가 심각한 나라인 이유는 좌익 경제 이론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상대적 빈곤감이 날로 심해지는 이유는 아리러니하게도 이 상대적 빈곤감을 없애겠다는 바로 좌익 경제 이론 때문이다. 좌익 경제 이론은 한국 경제를 불황의 늪에 빠져 온 국민이 절대적 빈곤에 처하게 하기에 상대적 빈곤감을 증폭시킨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빈곤을 먼저 해결하고 상대적 빈곤도 해결하자는 전략을 세우셨다. 성장이 빠를 수록 분배의 격차가 생긴다. 그것은 성장이 빠르다는 것은 사업 투자가가 노동자보다 소득이 많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장이 빠른 것이 노동자의 소득 향상에 도움이 된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 때의 경제 개발 이론의 개념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조금 상대적 빈곤감이 있더라도 GNP가 20.000 불인 국가의 노동자가 상대적 빈곤감이 적더라도 GNP가 100 불 이하인 나라의 노동자보다 훨씬 소득이 많다는 것이다.

   GNP가 100 불 이하인 나라라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빈익빈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영세 빈민국이 되어감을 의미한다. 지금 북한 경제가 이런 늪에 빠져 있다. 하물며 천연자원 없고 곡물과 석유 등 필수적 수입 상품이 많은 남한에서는 그 타격이 더 클 것이다.

   GNP가 100 불 이하인 나라의 노동자는 자녀를 유학 보내거나 외국 여행을 하기는 커녕 비행기 표 살 엄두도 못낸다. 그러나 GNP가 20.000 불인 국가의 노동자는 GNP가 100 불 이하인 나라의 부자보다도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산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비전이 잠시 소득의 격차가 있더라도 GNP가 20.000 불인 국가의 국민이 되자는 것이라면 좌파의 경제관은 GNP가 100 불 이하인 나라에서 상대적 빈곤감 없이 살자는 것이다.

   그런데 좌파의 경제관대로 GNP가 100 불 이하인 나라 노동자가 되면 상대적 빈곤감이 없어지는가? 아니다. 국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한다는 것은 한국처럼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는 GNP가 10 불 이하로 떨어질 수 있으며, 그것은 실업자의 수가 늘어남을 의미한다. 그때 유일한 취업은 외국에 불법 노동자로 취업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에서 상대적 빈곤감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 빈부의 격차가 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빈부의 격차도 줄고 중산층이 등장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경제 성장과 분배의 평등을 동시에 이루는 것은 불가능함을 쉽게 설명한 것이다. 단지 이것은 시간표의 문제이다. 경제가 상승하는데는 추진력이 필요하며, 상승하지 못하는 경제는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러나 일단 선진국형 경제로 자리잡으면 경제는 안정되고 좀처럼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않는다. 한 나라의 경제가 안정된 국제 경쟁력을 갖게 되면 성장의 엔진이 없어도 안정된 경제가 유지된다.

   우리나라처럼 천연자원이 없는 나라에서는 이것은 생산 자립에 이어 부품 기술까지 자립하는 시점임을 박정희 대통령은 내다 보셨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에 부품 기술 자립을 성취한 나라이며, 박정희 대통령은 부품 기술 자립의 원대한 목표를 세우셨다. 그리고 그 시점이, 즉 절대적 빈곤이 완전히 해소되고, 한국 경제가 안정된 선진국형 경제로 자리잡은 시점이 적극적 분배 평등 정책을 실시할 때, 즉 상대적 빈곤의 문제까지 적극적으로 해결하기에 이상적인 때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절대적 빈곤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나서 상대적 빈곤 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하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구상은 전두환 대통령 때에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였으며, 상대적 빈곤부터 해결시키려는 그의 정책은 오년도 못되어 IMF 사태를 초래하여 절대적 빈곤이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역시 상대적 빈곤 해결사임을 자처한 김대중은 한국 경제에 중병이 들게 하였으며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 모두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상대적 빈곤의 진짜 해결사임을 자처한 노무현 대통령 취임 100일만에 이리 갈팡 저리 갈팡하는 것은 국민이 흉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즉,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 중 어느 것부터 해결해야 하는가?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적 빈곤부터 해결하는 것이 상대적 빈곤까지도 해결할 시간표를 앞당기는 최선의 정책임을 입증해 보이셨다. 그리고 양김씨는 상대적 빈곤부터 해결하는 것이 온 국민을 절대적 빈곤으로 끌고가는 정책임을 예증하였다. 국제 사회의 무한 경쟁 시대에 마르크스 경제 이론은 국제 경쟁력을 무한 약화시키기에 이미 세계가 버린 퀘퀘묵은 낡은 이론이다. 그런즉, 다른 나라들이 오래 전에 쓰레기통에 버린 그 이론을 줏어온 좌익을 진보, 혁신, 개혁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김대령 목사의 글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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